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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연재]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 : <16> '더 킬러', 하먼 킬러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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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하먼 킬러브루 Ⓒ MLB.com

 

하먼 킬러브루는 1960년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거포이자, 미네소타 트윈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입니다. 킬러브루는 1954년 빅리그에 데뷔해 22시즌 동안 2,435경기 2,086안타 573홈런 1,584타점 타율 0.256 출루율 0.376 장타율 0.509 OPS 0.884를 기록하며 올스타 13회, 홈런왕 6회, 타점왕 3회, MVP 1회를 차지했는데요. 킬리브루가 1960년대에 기록한 393홈런은 행크 애런(375홈런), 윌리 메이스(350홈런)를 넘어 동기간 1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킬러브루는 8시즌 동안 40홈런 이상을 기록했고, 9시즌 동안 100타점 이상을 기록하는 꾸준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또한, 7시즌 동안 100볼넷 이상을 골라내는 참을성과 선구안을 자랑했죠. 실제로 킬러브루의 통산 타율은 0.256에 그쳤지만, 통산 출루율은 0.376으로 타율 대비 0.120이나 높았습니다. 그렇기에 킬러브루는 상대적으로 낮은 타율에도 불구하고 통산 OPS 0.884(OPS+ 143)으로 리그 최정상급 타격 생산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

하먼 킬러브루 Ⓒ MLB.com

 

킬러브루의 본명은 '하먼 클레이튼 킬러브루 주니어(Harmon Clayton Killebrew Jr.)'로 1936년 6월 29일 미국 아이다호주 페이엣에서 하먼 킬러브루 시니어와 캐서린 킬러브루 부부의 다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보안관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대학 시절 미식축구 풀백으로 활약하면서 올-아메리칸 팀에 선정될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는데요. 아버지의 영향으로 킬러브루 형제는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스포츠 종목에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킬러브루는 고교 시절 야구, 미식축구, 농구, 육상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특히 미식축구 쿼터백으로 올-아메리칸 팀에 선정될 만큼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오레건 대학의 장학금 제안을 받기도 했죠. 하지만 그가 가장 사랑한 스포츠는 야구였는데요. 킬러브루의 활약을 지켜본 아이다호주의 상원 의원 허먼 웰커는 워싱턴 세너터스의 구단주 그리피스에게 그를 추천했고, 그리피스는 스카우트인 아지 블루지를 파견해 킬러브루를 살펴보게 했습니다.

 

17세의 킬러브루가 약 133m에 달하는 홈런을 치는 모습을 지켜본 블루지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그에게 계약을 제안합니다. 계약금 4,000달러에 3년간 연봉 6,000달러를 받는 조건이었죠. 당시 메이저리그에는 어떤 팀이 한 선수와 4,000달러 이상의 계약을 맺을 경우 해당 선수를 최소 두 시즌 동안은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유지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킬러브루는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워싱턴에 합류하게 됩니다.

 

킬러브루는 워싱턴과 계약을 맺은 지 4일 후 만 18세 6일의 나이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아이다호주 페이엣 출신의 시골 소년에겐 꽤나 험난한 여정이었죠. 킬러브루는 훗날 이 시기에 대해 "저는 코미스키 파크에서 원정 경기 중인 팀에 합류했습니다. 메이저리그 경기장을 가본 적도 없었는데, 갑자기 제가 기사에 나오는 메이저리거들을 상대로 경기장에서 뛰게 된 것이죠. 모든 게 낯설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적응기를 거쳐 일약 스타덤에 오르다

하먼 킬러브루 Ⓒ MLB.com

킬러브루는 빅리그 데뷔 첫해인 1954년 단 9경기에 출전했고, 1955년에도 38경기에만 출전하면서 첫 두 시즌 동안 타율 0.215 4홈런 10타점 OPS 0.664를 기록했습니다. 또한, 주 포지션이었던 3루에서 수비에 어려움을 겪었는데요. 1956년 의무적으로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유지해야 하는 기간(2년)이 만료되자, 워싱턴은 킬러브루를 산하 마이너리그 팀으로 내려보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메이저리그에 콜업해 그의 성장 수준을 점검했죠.

 

삼촌인 클라크 그리피스가 세상을 떠난 후 워싱턴의 구단주가 된 캘빈 그리피스는 1958년 킬러브루가 주전 3루수가 될 준비를 마쳤다고 판단했고, 시즌 종료 후 기존 3루수인 에디 요스트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트레이드합니다. 풀타임 첫해인 1959년 만 23세의 킬러브루는 타율 0.242 42홈런 105타점 OPS 0.870으로 올스타에 선정됐고, 로키 콜라비토(클리블랜드)와 함께 홈런 부문 공동 1위를 차지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됩니다.

 

킬러브루는 1960시즌 초반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었는데요. 3월에는 비염 수술을 받았고, 5월에는 햄스트링 부상으로 거의 경기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부상에서 복귀한 킬러브루는 타율 0.276 31홈런 80타점 OPS 0.909이란 준수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킬러브루의 분전에도 워싱턴은 성적과 흥행에서 모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1960시즌 종료 후 연고지를 미네소타로 옮겨 팀 이름을 미네소타 트윈스로 바꿨습니다.

 

미네소타로 연고지를 옮긴 첫해 쿠키 라바게토 감독은 킬러브루를 팀의 주장으로 임명했는데요. 킬러브루는 1961년 타율 0.288 46홈런 122타점 OPS 1.012으로 구단 역대 단일 시즌 홈런 신기록을 세우며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2년에는 타율 0.243 48홈런 126타점 OPS 0.912로 홈런과 타점 부문 리그 1위를 차지하죠. 킬러브루의 활약에 힘입어 만년 꼴찌팀이었던 미네소타 역시 91승 71패(.562)로 리그 2위에 올랐습니다.

 

 

미네소타의 홈런왕

하먼 킬러브루 Ⓒ MLB.com

 

킬러브루는 1963년 타율 0.258 45홈런 96타점 OPS 0.904, 1964년 타율 0.270 49홈런 111타점 OPS 0.924를 기록하며 3년 연속 아메리칸리그 홈런왕을 차지했습니다. 1965년에는 수비 중 주자와 충돌해 팔꿈치가 탈구되는 부상을 당하면서 타율 0.269 25홈런 75타점 OPS 0.885로 정규 시즌을 마쳤는데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해 미네소타는 102승 60패(.630)으로 리그 1위에 오르면서 32년 만에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습니다.

 

1965년 월드시리즈에서 미네소타의 맞대결 상대는 '최강의 원투펀치' 샌디 코팩스와 돈 드라이스데일이 이끄는 LA 다저스였죠. 킬러브루는 4차전에서 돈 드라이스데일을 상대로 홈런을 때려내는 등 7경기에서 타율 0.286 1홈런 2타점 OPS 0.873으로 분전했는데요. 하지만 미네소타는 7차전에서 다저스의 에이스 샌디 코팩스에게 9이닝 3피안타 3볼넷 10탈삼진 무실점 완봉패를 당하면서 월드시리즈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후에도 킬러브루는 홈런 페이스를 유지했습니다. 1966년 타율 0.281 39홈런 110타점 OPS 0.929으로 프랭크 로빈슨(49홈런)에 이어 홈런 부문 리그 2위에 올랐고, 1967년 타율 0.269 44홈런 113타점 OPS 0.965를 기록하면서 칼 야스트렘스키와 함께 홈런 부문 리그 공동 1위를 차지했죠. 또한, 킬러브루는 이 시기에 자신의 약점인 타격 정확도를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닫는데요. 바로 볼넷을 얻어내는 능력(선구안)이었습니다.

 

킬러브루는 1966년 103볼넷, 1967년 131볼넷으로 2년 연속 볼넷 부문 리그 1위에 오릅니다. 두 시즌 동안 타율은 0.275이었지만 출루율은 0.400에 달했고, 상대적으로 낮은 타율에도 불구하고 최정상급 타격 생산력(OPS+ 165)을 발휘할 수 있었죠.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킬러브루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는데요. 킬러브루는 1968년 4월, 아이다호에서 일어난 주식 사기 사건에 이름을 도용 당해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하게 됩니다.

 

 

위기를 극복하고 반등에 성공하다

하먼 킬러브루 Ⓒ MLB.com

 

물론 킬러브루에겐 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순박한 그에게 재판 출석은 큰 심리적인 압박으로 다가왔죠. 킬러브루는 시즌 첫 한 달간 타율 0.302 5홈런 14타점으로 순항했지만, 재판 출석 후에는 두 달간 타율 0.173 8홈런 20타점에 그치며 부진에 빠졌습니다. 다행히 그 가운데에서도 올스타에 선정되는 기쁨을 누렸지만, 올스타전 3회 말 수비 과정에서 발이 미끄러져 햄스트링이 파열되고 골반뼈가 부러지고 말았는데요.

 

이 부상으로 킬러브루의 커리어에 큰 지장이 생기리라는 전망이 이어졌습니다. 킬러브루는 초인적인 회복력으로 약 6주 만에 그라운드에 복귀하긴 했지만, 기용되는 횟수도 줄었을뿐더러 성적 역시 타율 0.210 17홈런 40타점 OPS 0.782로 데뷔 이후 최악의 수치였습니다. 여기에 킬러브루의 나이도 어느덧 30대 중반. 일각에서는 그의 전성기가 끝났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언론의 반응은 킬러브루에게 동기 부여로 작용했는데요. 실제로 이듬해 킬러브루는 타율 0.276 49홈런 140타점 OPS 1.011으로 홈런(49), 타점(140), 볼넷(145), 출루율(.427) 부문 리그 1위에 오르며 최고의 시즌을 보냅니다. 이해 MVP는 당연하게도 그의 차지였죠. 킬러브루의 활약에 힘입어 미네소타도 97승 65패(.599)로 AL 서부지구 1위를 차지했지만, ALCS에서 볼티모어에 3전 전패로 탈락하며 아쉬움을 삼켰습니다.

 

킬러브루는 MVP를 수상한 다음 해인 1970년 타율 0.271 41홈런 113타점 OPS 0.957으로 커리어 8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단일 시즌 40홈런을 돌파했습니다. 미네소타 역시 98승 64패(.605)로 2년 연속 AL 서부지구 1위를 차지하면서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았는데요. 킬러브루는 챔피언십시리즈(ALCS) 3경기에서 타율 0.273 2홈런 4타점 OPS 1.203으로 분전했지만, 미네소타는 이번에도 볼티모어에 3전 전패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커리어 후반기

하먼 킬러브루 Ⓒ MLB.com

 

킬러브루는 35세에도 타율 0.254 28홈런 119타점 OPS 0.850이라는 준수한 성적으로 타점(119), 볼넷(114) 부문 리그 1위를 차지했습니다. 또한 커리어 13번째이자 마지막 올스타전에 출전해 투런홈런을 터뜨렸고, 8월 10일에는 MLB 역사상 10번째로 500홈런 고지에 올랐죠. 하지만 28홈런으로 전년도 대비 홈런 수가 급감하며 우려를 모았는데요. 1972년 타율 0.231 26홈런 74타점 OPS 0.817으로 부진하면서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1972시즌 종료 후 오프시즌 동안 킬러브루는 고질적인 다리 부상을 해결하기 위해 두 차례나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3년 6월 왼쪽 무릎에 부상을 입었고 한 달 후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찢어진 연골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면서 9월 중순이 되어서야 라인업에 복귀했습니다. 이해 킬러브루는 단 69경기 출전에 그쳤고 결국 타율 0.242 5홈런 32타점 OPS 0.698이란 커리어 최악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치게 됩니다.

 

이듬해인 1974년 건강을 회복한 킬러브루는 5월 5일 디트로이트전에서 홈런 2방을 터뜨리며 통산 550홈런 고지를 밟습니다.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미네소타는 8월에 '하먼 킬러브루의 날'을 열었고, 그의 등번호(3번)를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하지만 킬러브루는 후반기 체력 저하로 타율 0.222 13홈런 54타점 OPS 0.672를 기록하는데 그쳤고, 시즌 종료 후 미네소타는 그에게 코치로 팀에 남거나 방출되는 선택지를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현역 생활 연장을 원했던 킬러브루는 미네소타의 코치 제안을 거절하고, 1975년 1월 24일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1년 계약을 맺습니다. 1975년 만 39세의 킬러브루는 타율 0.199 14홈런 44타점 OPS 0.692를 기록한 후 캔자스시티로부터 방출됐고 이듬해인 1976년 3월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면서 미네소타의 TV 중계 해설자가 될 것이라고 밝혔는데요. 은퇴 시점으로 킬러브루의 573홈런은 MLB 통산 홈런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습니다.

 

 

 

플레이 스타일

하먼 킬러브루 Ⓒ MLB.com

 

킬러브루는 키 5피트 11인치(180cm), 체중 213파운드(97kg)로, 거포치곤 작지만 단단한 체격을 지녔었습니다. 대학 시절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했던 아버지에게서 선천적으로 강한 힘을 물려받은 그는 어린 시절부터 농장에서 일하면서 95파운드(43kg)의 우유통을 양손으로 들고 나르는 괴력을 발휘했다고 전해지는데요. 타고난 근력 덕분에 간결한 스윙으로도 엄청난 파워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비거리와 관련한 여러 전설을 남겼습니다.

 

킬러브루는 1962년 8월 3일, 디트로이트의 과거 홈구장인 타이거 스타디움에서 좌익수 방면으로 장외 홈런을 때려낸 최초의 타자가 됐습니다. 1964년 5월 24일 볼티모어의 옛 홈구장인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비거리 471피트(144m) 홈런을 터뜨렸고, 1967년 6월 3일에는 미네소타의 과거 홈구장인 메트로폴리탄 스타디움에서 비거리 520피트(158m) 홈런을 쏘아 올리기도 했죠. 이는 지금까지도 미네소타 역사상 최장거리 홈런 기록입니다.

 

또한, 킬러브루는 '더 킬러'라는 별명과는 달리 조용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알려졌는데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흡연과 음주를 일절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취미가 무엇인지 질문을 받자 "설거지"라고 대답하기도 했을 정도였죠. 또한, 전직 심판인 론 루치아노가 자서전인 <심판의 역습>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설사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할지라도 심판의 판정을 존중하는 매너를 갖춘 신사이도 했습니다.

 

킬러브루는 1982년 네 번째 투표에서 83.1%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습니다. 그의 입성이 늦어진 것은 당시 선수 평가 기준에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기에는 적은 안타(2,086)와 낮은 타율(0.256) 그리고 많은 삼진(1,699)을 기록했기 때문이었는데요.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세이버매트릭스의 발달로 볼넷(1559)과 출루율(0.376)의 가치가 재평가되면서 킬러브루에 대한 평가(디 애슬레틱 기준 69위)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은퇴 이후의 삶

하먼 킬러브루 Ⓒ MLB.com

 

현역 은퇴 후 킬러브루는 미네소타(1976-78, 1984-88년), 애슬레틱스(1979-1982년), 에인절스(1983년)에서 TV 중계 해설 위원으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그는 사업 실패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고, 30년 이상 결혼 생활을 유지했던 첫 아내와도 결별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건강이 악화되면서 세 차례나 수술을 받았지만, 1990년 12월 다행히도 건강을 회복했고 지인들의 도움으로 재정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약 20년이 지난 2011년 5월 17일, 킬러브루는 미국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에 위치한 자택에서 향년 74세의 나이에 식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고향인 아이다호주 파예트에 있는 리버사이드 공동묘지에 안장됐습니다. 킬러브루를 기리기 위해 미네소타는 2011시즌 동안 홈에서 1960년대 복고풍 유니폼을 입었고, 워싱턴은 홈구장 내셔널스파크의 더그아웃에 킬러브루의 이름과 등번호 3번이 적힌 유니폼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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