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 포수, 2226경기를 출전하다
1946년 월드시리즈 7차전 패배와 1967년 월드시리즈 7차전 패배.
1903년부터 1918년까지 5번을 우승하고 최고의 팀이 됐지만, 1920년 베이브 루스를 양키스로 보낸 이후 더 이상 우승하지 못하게 된 보스턴 레드삭스는 1975년에도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상대는 '빅 레드 머신'으로 불린 당대 최고의 팀 신시내티 레즈였다.
2승3패로 탈락 위기에 몰린 6차전. 보스턴은 버니 카보가 8회말 2사 1,2루에서 대타로 등장해 믿을 수 없는 동점 스리런을 날렸다(6-6). 하지만 9회말 무사 만루에서 프레드 린과 리코 페트로셀리가 경기를 끝내지 못했다.
칼튼 피스크는 연장 12회말 선두타자로 들어서기 전 대기 타석의 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담장을 맞히는 안타를 치고 나갈테니, 나를 홈으로 불러들이는 건 너의 몫이다."
하지만 린은 피스크를 불러들이지 못했다. 피스크가 끝내기 홈런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피스크가 친 타구는 그린몬스터 쪽으로 날아갔는데 밖으로 휘어져 나갈 것 같았다. 피스크는 손짓으로 다급하게 'Stay fair!'를 외쳤고, 야구의 신은 피스크의 바람을 들어줬다. 월드시리즈 역사상 가장 극적인 홈런 중 하나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관중들이 기쁨을 참지 못하고 그라운드로 쏟아져 들어왔을 때, 피스크는 해냈다는 기쁨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제이 심슨처럼 달려서 홈 플레이트를 제대로 밟아야 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자비는 거기까지였다. 야구의 신은 루스를 팔아먹은 보스턴을 아직 용서할 생각이 없었고, 피스크의 홈런으로 6차전 승리를 가져간 보스턴은 최총 7차전을 패했다. 보스턴은 2004년에 밤비노의 저주가 풀리기 전까지, 1986년 6차전의 빌 버크너 사건과 7차전 패배를 또 견뎌야 했다.
10개의 골드글러브와 389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포수로 꼽히는 자니 벤치는 34살 때 포수를 포기했다. 10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한 요기 베라가 외야수로 출전하기 시작한 건 33살 때 일이었다. 반면 피스크는 21살에 데뷔해 45살에 은퇴할 때까지 포수로 뛰었고, 97%의 경기를 포수로 소화했다.
포수 2226경기 출장은 이반 로드리게스가 2427경기로 경신하기 전까지 포수 최고기록이었고, 포수로 24시즌을 소화한 것은 21시즌인 로드리게스보다 3년이 많은 포수 역대 1위였다.

칼 립켄 주니어의 포수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피스크는 1978년에는 154경기에 포수로 출장했다. 25회 연장전을 완주한 적도 있었다. 피스크는 감독이 교체를 제안하자 "내가 시작한 경기는 내가 끝낼 것"이라고 했다.
두 번의 큰 은퇴 위기를 넘긴 피스크가 40세 생일이 지난 후 기록한 70개의 홈런은 지금도 포지션 통합 최고기록으로 남아 있다. 포수로 친 351개의 홈런은 마이크 피아자(396개)에 의해 경신됐지만, 포수로서 기록한 149개의 완봉승은 요기 베라에 이은 2위이자,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피스크는 레드삭스의 27번과 화이트삭스의 72번을 영구결번으로 가지고 있는데, 포수가 두 팀에서 영구결번을 가진 건 실질적으로 피스크뿐이다(개리 카터는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뉴욕 메츠에서 영구결번이 됐지만, 엑스포스의 뒤를 이은 워싱턴 내셔널스는 몬트리올 시절의 영구결번을 계승하지 않고 있다. 이에 라이언 짐머맨의 11번이 유일한 팀 영구결번이다).
피스크는 뛰어난 실력, 강철 체력과 함께 다혈질로도 유명했다. 양키스 포수 서먼 먼슨과는 원수 지간으로 지냈고, 다저스의 감독이자 대선배인 토미 라소다가 항의하러 나오자 덕아웃으로 꺼지라며 욕을 한 적도 있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디온 샌더스와의 충돌이었다. 1989년 드래프트에서 애틀랜타 팰컨스에 전체 5순위로 지명된 샌더스는 천재 코너백으로 불렸다. 같은 해 야구선수로 양키스에서도 데뷔를 한 샌더슨은, 홈런을 치고 나서 며칠 후 데뷔전의 첫 펀트 리턴에서 터치다운을 만들어내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입담도 뛰어났던 샌더슨은 스스로 '프라임 타임'이라는 별명을 지었고 단숨에 슈퍼스타가 됐다.
샌더스가 풋볼에서 스타가 되고 나서인 1990년 5월22일. 피스크는 샌더스를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타자들은 타석에 들어서기 전 십자가를 긋거나 부모님의 이니셜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샌더스가 방망이로 바닥에 새긴 건, 놀랍게도 달러 표시였다.
샌더스는 팝 플라이를 친 후 1루로 뛰지 않았다. 그러자 피스크는 "끝까지 뛰란 말이야. 이 더러운 놈아"라고 외쳤다. 샌더스는 상대 팀이었기 때문에 뛰든 말든 상관이 없었지만, 풋볼의 슈퍼 루키가 야구를 모욕하는 걸 참을 수 없었던 피스크였다. 다음 타석에서 샌더스는 피스크를 바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보쇼. 지금이 노예시대인 줄 아쇼? (the days of slavery are over.)"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피스크는 이렇게 대꾸했다.
"이 경기(야구)를 하는 데는 올바른 방식과 잘못된 방식이 있어. 그런데 너는 잘못된 방식으로 하고 있어. 그리고 우리 중 누구도 그걸 좋아하지 않아. 언젠가 넌 이 야구판에서 아주 호되게 당하게 될 거야."
피스크의 충고에도 샌더스는 달라지지 않았다. 샌더스는 월드시리즈와 슈퍼볼에 모두 출전한 유일한 선수가 됐지만, 역대 최고의 코너백이 된 풋볼과 달리, 39호런 186도루를 기록한 야구 커리어는 그만큼 화려하지 않았다. 야구는 인내와 자기 관리의 스포츠였다.
"나는 지금까지 퍼지(피스크는)보다 노력하는 선수를 본 적이 없다. 그는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끝까지 완수해 낸다. 나는 그가 궁극의 프로페셔널(ultimate professional)이라고 생각한다."
— 짐 프레고시 시카고 화이트삭스 감독
피스크는 가장 먼저 철저한 근력 위주의 웨이트 트레이닝 루틴을 도입하고, 탄수화물을 줄이며 단백질 중심의 엄격한 식단을 유지한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젊은 선수들이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피스크는 근력 훈련을 끝내고 땀으로 젖어있기 일쑤였다. 그가 45세까지 포수를 볼 수 있었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부상은 핑계일 뿐이다. 내 유니폼이 더러워지지 않았다면, 그날 나는 경기를 제대로 뛰지 않은 것이다."
— 칼튼 피스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