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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매니아' 발렌수엘라의 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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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미국 메이저리그를 즐겨본 팬들은 '노모매니아(Nomomania)'라는 용어가 익숙할지 모릅니다.
1995년 LA 다저스에서 데뷔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일본인 우완 투수였습니다.
 
그런데 LA 다저스를 통해 외국인 투수 돌풍을 일으킨 원조 선수는 바로 1980년대 초,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멕시코의 페르난도 발렌수엘라(Fernando Valenzuela)였습니다.
'Fernandomania' - '페르난도열풍'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을 정도로 다저스와 MLB에 돌풍을 몰고 왔습니다. 특히 멕시코를 비롯해 히스패닉계 이민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주인공이었습니다. 
 
1990년대 노모 히데오의 '토네이도 와인드업' 역시 굉장한 이단이었지만, 1980년대 페르난도의 하늘을 쳐다보고 던지는 투구폼도 정말 독특했습니다.
그리고 노모에게 마구급의 포크볼이 있었다면, 페르난도는 당대에 이미 사라져가던 마구 스크루볼을 앞세워 만 20세의 젊은 나이에 미국 야구를 평정했습니다.
 
그가 데뷔한 1981년은 실은 사상 최악의 선수 파업으로 시즌이 중단되는 등 MLB로서는 악몽의 시즌이었습니다.
그러나 LA 다저스의 평균관중은 전 해보다 경기당 3,000명 정도가 늘어난 42,523 명이었고, 페르난도가 등판하는 경기는 홈은 물론 원정 경기 역시 늘 매진사례였습니다.
 
멕시칸리그 출신의 무명 페르난도의 데뷔는 너무도 극적이었습니다.
1981년 다저스의 토미 라소다 감독이 전격적으로 이 왼손잡이 멕시코 청년을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시켰을 때만 해도 대부분 팬들은 그가 누군지 전혀 몰랐습니다. 전문가들도 이 무명 투수의 성공을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죠.
 
당시 호적상 페르난도의 나이는 20세. (1960년 11월 1일생. 그러나 적어도 그보다 5살은 많을 것이라는 당시 소문도 ^^) 1979년 시즌 중반까지도 멕시코 리그에서 뛰던 무명 선수였습니다. 1980년 다저스와 계약했고, 마이너를 거쳐 9월 확대 로스터 때 처음 빅리그에 호출돼 구원 투수로 17.2이닝을 던지면서 2승 1세이브에 평균자책점(ERA) 0의 깜짝 활약을 펼쳤지만 그를 눈여겨보는 이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시즌, 이 젊은 왼손잡이 투수는 빅리그 무대를 순식간에 자신의 원맨쇼로 만들었습니다.
발렌수엘라는 8연승 가도로 루키 시즌을 시작했을 뿐 아니라 그중 4번이 완봉승이었고, ERA는 1.00이 채 안됐습니다. 그가 등판하는 날이면 다저스타디움은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영어를 전혀 못하는 온순해 보이는 이 청년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전 미국의 스포츠 섹션을 요란하게 장식했습니다. 그의 베이스볼 카드는 최고 인기 품목이 됐고, 그의 유니폼과 관련 상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습니다.
 
파업이 시작되면서 발렌주엘라의 루키 시즌도 일찍 끝났지만, 25경기 선발로 나서 13승 7패에 평균자책점 2.48, 리그 최다인 180개의 삼진을 잡아내면서 11번의 완투와 8번의 완봉승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MLB 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신인왕과 사이영상을 동시에 수상한 투수가 되는 최고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그는 또한 WS 3차전에서 양키즈를 상대로 완투승을 거두며 초반 2연패로 좌절에 빠졌던 팀을 기사회생시켜 역전 우승에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1982년부터 LA 인근에서 유학 생활을 했기 때문에 발렌수엘라의 등판 경기를 자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언뜻 보면 도저히 뛰어난 운동 신경을 지닌 빅리그 투수라고는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일단 상체도 비정상적으로 큰데다 전체적으로 살이 찌고 배도 약간 나온 모습이었습니다. 얼굴은 동그란데다 늘 웃는 모습으로 선한 인상이었고, 특히 큰 눈은 소나 사슴의 온순한 눈을 연상시켰습니다.
 
또한 뭔가 균형이 잡히지 않아 불안해 보였던 이유는 그는 오른쪽 다리가 왼쪽 다리보다 아주 미세하게 짧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평소 걸을 때나 마운드로 걸어 올라갈 때 몸이 한쪽으로 살짝 기울면서 약간 쩔뚝거리는 걸음걸이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다리 길이의 불균형으로 인해 신체 중심이 독특하게 잡혔고, 이는 투구할 때 몸을 뒤틀며 하늘을 쳐다보는 특유의 와인드업 폼을 만드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필승 구종인 역회전 변화구인 스크루볼은 팔꿈치와 손목을 바깥쪽으로 강하게 비틀어야 하므로 신체에 엄청난 무리를 줍니다. 그런데 발렌수엘라는 남들과 다른 신체 밸런스와 하체 활용법 덕분에 그 강력한 스크루볼을 무시무시한 구속과 회전수로 던질 수 있었다는 분석과 소문도 돌 정도로 그는 당대 가장 신비한 투수였습니다.
 
그의 스크루볼은 특히 오른손 타자들에게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오른손 타자의 몸쪽(인코스)으로 꽉 차게 파고들면서, 막판에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궤적을 그렸는데, 밸런스를 완전히 흩어 놓았습니다.
게다가 독특한 투구폼에서 뿜어 나오는 생소함과 절묘한 제구력에 허를 찌르는 패스트볼 등 두둑한 배짱과 두뇌 피칭을 겸비한 그는 80년대 최고의 좌완 투수로 성장했습니다. 전성기 최고의 체인지업을 장착한 류현진과 비슷한 유형의 투수로 보시면 딱 맞습니다.
 
또한 비대해 보이는 몸집과는 달리 운동 신경이 뛰어났던 그는 타격도 대단한 재능을 보인 전천후 선수였습니다. 타격 WAR이 4.1이나 된 투수 발렌수엘라의 통산 타율은 2할이고, 홈런도 10개를 쳤습니다. 1990년 시즌에는 35게임에서 3할4리를 기록하기도 했기에, 라소다 감독은 급하면 그를 대타로 쓰기도 했습니다.
 
발렌수엘라는 1986년 생애 최고의 해를 보냅니다. 
NL 최다승인 21승 11패에 3.14의 평균자책점, 리그 최다인  20번의 완투, 최다 이닝 투구(269.1) 등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그 해 올스타전에서 발렌주엘라는 5타자 연속 삼진의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1934년 역시 스크루볼 투수였던 칼 허벨에 이어 두 번째로 세운 대기록이었습니다.
스플리터로 18승 10패를 거둔 마이크 스캇이 306K를 잡으며 사이영상 투표에서 앞섰지만, 많은 이들이 2위에 그친 페르난도의 21승과 20번의 완투를 더 쳐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말 없고 조용한 성격에 감독이 공을 넘겨주면 늘 끝까지 마운드를 지키던 페르난도는 라소다 감독 아래서 말도 못하게 혹사당했습니다.
1982년 285이닝을 던진 것을 시작으로 발렌주엘라는 6년 연속 250이닝 이상을 던졌습니다. 매 시즌 적게는 34번에서 많게는 37번 선발 마운드를 지켰고, 한 경기 투구수 150개를 넘기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그래서 '고무팔'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지만, 그 어떤 투수도 그런 혹사를 이겨낼 수는 없는 법입니다.
 
251이닝을 던진 1987년, 14승 14패로 데뷔 후 가장 저조했던 발렌수엘라는 그 이듬해 5승 8패에 그치며 시즌의 많은 부분을 부상자 명단에서 보냈습니다. 팔에 무리를 주던 스크루볼은 위력이 떨어졌고, 89년에는 10승 13패, 90년에는 13승 13패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다저스에서 마지막 시즌이 됐던 1990년 6월 29일 발렌수엘라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며 다저스 팬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안겼습니다.
그날 경기에 앞서 발렌수엘라는 클럽하우스에서 오클랜드 선발 데이브 스튜어트가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하는 경기를 TV로 지켜봤습니다. 그 경기가 끝나자 발렌수엘라는 동료들에게 자신도 노히트 노런 경기를 해야겠다고 농담을 했다는데, 불과 서너 시간 후에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항상 선수들을 가족처럼 여긴다는 모토를 지닌 다저스는 그러나 명문 구단답지 않은 비정한 결정을 내립니다. 
1991년 스프링 캠프 막판에 그를 전격 방출한 것입니다. 페르난도는 다저스의 처사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시기적으로 다른 팀에 이적도 하기 힘든 시점의 그 전격 방출 사건은, 다저스가 발렌수엘라를 고의적으로 매장시키기 위한 계략이었다고 생각해도 탓할 수 없는 어이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발렌수엘라는 10년 넘게 다저스와는 완전히 인연을 끊고 지냈습니다. 
구단 행사에 수 차례 초대를 받았지만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다저스에서 그를 내보낼 생각이었더라면 90년 시즌이 끝나고 FA로 풀어주는 것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0년간 모든 것을 바친 팀에게서 스프링캠프 막판에 쓰레기처럼 버려졌다는 점에 대해 배신감과 함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고, 신뢰도 완전히 깨졌습니다.
 
그 배신감의 상처는 10년 넘게 치유되지 않다가 지난 2003년에야 다저스의 스패니시 방송 해설자로 일해 달라는 부탁을 페르난도가 받아들이면서 일단락되기는 했습니다.
다저스는 '발렌수엘라 데이'를 만들고, 그의 버블 인형을 만들어 팬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이 올드 스타의 심기를 달랬습니다.
 
91년 봄 다저스에서 방출되긴 했지만 야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시즌 당시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서 재기에 실패한 발렌주엘라는 멕시칸리그에서 뛰면서 와신상담 수 차례 빅리그를 다시 노크합니다. 
93년에는 볼티모어에서 뛰면서 8승 10패를 기록했고, 94년 필리스에서 재도전에 또 실패한 후 95년 시즌 중반에 샌디에이고로 복귀해 8승 3패를 거뒀습니다. 그리고 96년 시즌 13승 8패 3.62의 성적으로 마지막 불꽃을 태웠습니다.
97년 샌디에이고와 세인트루이스에서 2승 12패의 저조한 성적을 끝으로 빅리그를 떠난 발렌수엘라는 통산 173승 153패 3.54의 성적을 남겼습니다.
 
발렌수엘라는 2006년 WBC에서는 멕시코팀의 코치로 참가했고, 한국-멕시코 전에서 시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멕시코의 '에쵸와킬라(Etchohuaquila)'라는 인구 200명도 안 되는 아주 작고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12남매 중에 막내로 태어난 발렌주엘라는 야구공 하나로 아메리칸드림을 이뤘습니다.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는 2024년 10월 22일, 향년 63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침 다저스가 뉴욕 양키스와의 WS를 딱 사흘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그는 타계하기 직전인 2024년 9월까지도 다저스의 스페인어 라디오 해설자로 마이크를 잡았지만,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급히 병원에 입원했다가 끝내 마운드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다저스 구단은 2024년 월드시리즈 기간 내내 전 선수의 유니폼 소매에 그의 등번호 34번 패치를 붙이고 뛰며 그를 추모했고, 그해 우승 반지를 페르난도의 영전에 바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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