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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타자 맨발의 조와 도박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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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반 MLB에는 조 잭슨(Joe Jackson)이라는 아주 평범한 이름의, 절대 평범하지 않은 타자가 있었습니다.

1887년생인 조는 1910년 만 22세 때 클리블랜드에서 MLB 데뷔, 20경기를 뛰었는데 3할8푼7리를 쳐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첫 풀타임으로 147경기를 뛰면서 4할8리의 엄청난 타율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타격왕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타이 콥이라는 불세출의 타자가 4할1푼9리를 쳤기 때문입니다.

 

잭슨은 클리블랜드에 이어 1915년에는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옮긴 후에도 당대 최고의 교타자로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1920시즌 잭슨은 146경기를 뛰며 3할8푼2리에 생애 최다 12홈런을 쳤습니다. 기록에서 알 수 있듯 거포 유형은 아니었지만, 2루타 42개에 리그 최다 20개의 3루타를 치며 121타점, 105득점에 OPS 1.033으로 생애 최고의 시즌을 장식했습니다.

 

그런데 그 화려한 시즌이 안타깝게도 잭슨의 마지막 시즌이 됐습니다.

전년도 월드시리즈에서 불거진 도박 스캔들이 잭슨의 커리어가 폭발하려는 시점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 최악의 빠른 결말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슈레즈 조의 희귀한 경기 질주 사진

당대 야구팬들을 그를 'Shoeless Joe(맨발의 조)'라는 애칭으로 불렀습니다.

그런 별명이 붙은 이유에 대해 몇 가지 설이 있지만, 그가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기 전인 1908년 마이너리그 스피너스 팀 시절에 있었던 일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 잭슨은 새로 산 스파이크를 신고 경기를 뛰다가 발에 심한 물집이 잡혔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 도저히 신발을 신을 수 없게 되자, 다음 날 경기에서 신발을 벗고 양말만 신은 채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그가 양말만 신고 3루타를 친 뒤 베이스에 서 있을 때, 상대 팀의 한 극성팬이 그 모습을 보고 "이 맨발의 자식아!(You shoeless son-of-a-gun!)"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지역 기자 스코프 필드가 이 말을 듣고 기사에 'Shoeless Joe'라는 표현을 쓰면서 이 별명이 평생을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정작 조 잭슨 본인은 이 별명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맨발로 야구를 한 것은 그 단 한 경기뿐이었는데, 마치 자신이 늘 맨발로 다니는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처럼 묘사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랍니다.

©️슈레스 조의 신발 광고

 

시각에 따라 낭만적으로 느낄 수도 있는 이 애칭을 그가 싫어한 이유는 어린 시절의 힘들었던 경험에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 잭슨은 1887년 미국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매우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만 6세 때부터 지역 방직공장에서 하루 12시간씩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학교는 전혀 다니지 못해 평생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으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13세부터 방직공장팀 주전 외야수로 뛸 정도로 야구는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지요.

 

조 잭슨은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탄로 나는 것을 극도로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래서 동료들과 식당에 가면 메뉴판을 전혀 읽지 못하니, 주문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가 동료들이 주문하는 메뉴를 귀로 듣고 똑같이 "나도 저걸로 주시오"라고 주문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빈티가 난다고 여긴 ‘맨발의 조’라는 별명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908년 결혼한 조 잭슨과 부인 케이티

조 잭슨은 1908년 케이티와 결혼했는데, 케이티는 정규 교육을 받은 여성이었고, 잭슨의 인생에서 절대적인 존재가 됩니다.

잭슨은 자신의 이름조차 쓸 줄 몰랐기 때문에, 구단 계약서나 공식 문서에 들어가는 'Joe Jackson'이라는 서명은 대부분 아내 케이티가 대신해주었습니다.

메이저리그 연봉 계약서 검토, 구단과의 편지 왕래, 은행 자산 관리 등 모든 공식 업무는 케이티가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조 잭슨은 팬들에게 사인할 때도 자격지심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내 케이티가 종이에 적어준 자신의 이름 철자를 마치 그림을 그리듯 조심스럽게 따라 베끼는 연습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훗날 팬들에게 보낸 팬레터 답장 중에는 케이티가 대신해준 사인이 대부분이었고, 그가 겨우 베껴 쓴 진짜 자필 사인은 야구 수집가들 사이에서 천문학적인 액수로 거래되니 아이러니입니다.

지난 2021년 10월 뉴욕 크리스티&헌트 경매에서는 그의 친필 사인이 담긴 1911년 루키 시절 흑백 사진이 147만 달러, 오늘 환율로 약 22억 원이 넘는 액수에 팔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맹이라는 점이 그의 커리어가 비극적으로 끝나는데 결정적 이유 중 하나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MLB 역사상 가장 큰 흑역사 중 하나인 ‘블랙삭스 스캔들’은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 발생했습니다.

막강 전력의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상대적 열세로 여겨진 NL 챔피언 신시내티 레즈에 3승 5패로 패하면서 도박꾼들과 선수가 연루된 승부 조작설이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화이트삭스 선수 8명이 돈을 받고 고의로 패배하며 승부를 조작했다는 '블랙삭스 스캔들'이 터졌고, 조 잭슨도 이 8명에 포함됐습니다.

 

하지만 그는 줄곧 자신은 도박사들과 짜고 경기 조작을 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고, 상당한 설득력의 기록적 근거들도 있었습니다.

월드시리즈에서 그는 승부조작을 모의한 타자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로 활약했습니다. 시리즈 타율 .375 (32타수 12안타)로 양 팀 통틀어 가장 많은 안타를 쳤고, 32번의 타석 동안 단 하나의 삼진도 당하지 않았습니다.

1919년 월드시리즈에서 나온 유일한 홈런의 주인공도 바로 잭슨이었고, 6타점- 5득점으로 팀 공격을 사실상 홀로 이끌었습니다.

실책은 0개에 홈 송구로 주자를 잡는 등 수비에서도 고의 패배를 의심할 만한 실책이나 본헤드 플레이가 전혀 없었습니다.

팀이 우승했더라면 시리즈 MVP급 활약을 펼쳤습니다.

©️블랙삭스 스캔들에연루된 화이트삭스 선수들, 가운데가 슈레스 조

그는 또한 처음에 조작 제안을 받았을 때 거절했고, 구단주였던 찰스 코미스키를 찾아가 자신을 월드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하고, 승부조작 음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악명 높았던 당시 코미스키 구단주는 잭슨의 면담 요청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잭슨이 사건의 주동자인 치크 간딜 등으로부터 5,000달러를 받은 사실 자체를 인정한 점은 확실히 불리한 정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사무국 공식 법정 대리인이 작성해 온 진술서에, 내용을 읽지도 못하면서 아내가 해준 서명 모양을 따라서 사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서명된 진술서가 결국 법적 근거가 되어 그는 영구 제명을 당하게 됩니다.

훗날 조 잭슨의 변호인단은 ‘그는 문맹이어서 자신이 어떤 문서에 사인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은 법정에서는 증거 불충분 등으로 최종 무죄로 판결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해결을 위해 야구계에 새로 부임한 초대 커미셔너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는 완고했습니다. 법원 판결과 상관없이 야구계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도박사와 음모를 꾸몄거나, 돈을 받았거나, 이를 알고도 보고하지 않은 자는 무조건 아웃’이라며 8명 전원을 영구 제명해 버렸습니다.

 

100년이 지난 요즘까지도 슈레스 조의 복권을 요청하는 팬들이나 관계자들이 꾸준히 있었지만 요지부동이던 MLB는 작년에야 사면의 길을 열어줬습니다.

승부조작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강한 메시지는 변함없습니다.

 

베이브 루스가 타격폼을 따라 배웠다는 타자, 통산 3할5푼6리로 역대 4위의 고타율을 기록한 타자, ‘맨발의 잭슨’을 보는 야구 역사의 시선은 애증이 엇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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