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바꾼 13개월의 군 복무
스탠 뮤지얼은 1943년 내셔널리그 MVP에 올랐고, 이듬해에도 대활약을 했다. 가족 부양 문제로 입대가 유예됐던 뮤지얼은 1945년 1월 입영 통지서를 받았고 해군에 입대했다.
요기 베라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하고, 밥 펠러가 전함을 타고 대서양과 태평양을 누빈 반면, 뮤지얼이 배치된 곳은 하와이 진주만의 선박 수리 부대였다.
뮤지얼의 공식 임무는 두 가지였다. 오전에 그는 수리를 위해 입항한 전투함에서 장병들을 데려오는 소형 수송정을 운전했다. 오후에는 위문 야구 경기 출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두 가지를 병행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고, 뮤지얼은 머지않아 야구 경기 출전에 집중하게 됐다. 이것이 뮤지얼의 인생과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바꿨다.
마이너리그에서 뮤지얼은 뛰어난 좌완 투수였다. 타격 실력도 출중해 외야수도 병행했다. 하지만 다이빙 캐치를 하다 왼쪽 어깨를 크게 다치는 바람에 투수를 포기했다.
뮤지얼은 1943년 타격왕(.357)이 됐고, 이듬해도 2위(.347)에 올랐을 만큼 정확한 타격을 자랑했다. 반면 홈런수는 13개와 12개로 파워가 뛰어나진 않았다.
하지만 위문 야구를 보는 장병들은 시원한 홈런을 기대했다. 이들을 위해 홈런을 쳐야겠다고 생각한 뮤지얼은 타석에 바짝 붙어 섰고, 강하게 당겨칠 수 있도록 웅크린 자세를 취했다. 뮤지얼을 상징하는 타격 자세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13개월의 군 복무가 끝났을 때, 뮤지얼의 파워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1948년 뮤지얼은 39개의 홈런을 날렸고, 은퇴할 때까지 30홈런 시즌을 6번이나 만들었다. 군 복무가 아니었어도 3630안타를 칠 수 있었겠지만, 475홈런은 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깨 부상 이후 뮤지얼의 포지션은 좌익수 또는 우익수였다. 그런데 위문 야구단에는 1루수를 맡아야 했다. 1루 경험이 없다 보니, 뮤지얼의 수비는 형편이 없었다. 어느날 상관으로부터 받은 핀잔이 큰 자극이 된 뮤지얼은 수비 훈련을 혹독하게 했고, 군을 제대할 즈음에는 1루 수비도 잘 할 수 있게 됐다.
준수한 1루 수비를 할 수 있게 된 건 뮤지얼의 커리어에 엄청난 도움이 됐다. 뮤지얼은 팀의 상황에 따라 외야와 1루를 오가거나, 어떤 시즌은 1루수만 하면서 체력 관리를 할 수 있었다. 이는 뮤지얼이 41세 시즌까지 3할을 치고, 42세 시즌까지 롱런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1946년 뮤지얼은 3월에 군에서 제대했고, 리그가 4월에 시작됨과 동시에 미친 활약을 했다. 결국 그 해 2번째 MVP를 차지했다.
시즌이 끝나가던 9월. 브루클린 에베츠필드 원정 경기에 참가한 뮤지얼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다저스 투수들을 흠씬 두들기고 있었다. 타석으로 걸어나오는 그를 본 한 다저스 팬이 이렇게 말했다.
"오, 저 녀석이 또 나온다!" (O-o-h, here comes the man again.)
이를 들은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의 밥 브로그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스탠리 프랭크 뮤지얼에게 선사된 최고의 별명은, 마지못해 인정하는 경의를 담아서, 야구에 미친 브루클린 자치구에서 나왔다. 브루클린의 광신적인 야구 팬들에게 뮤지얼은 더 맨(The Man)으로 불린다.
사과빛 뺨을 가진 카디널스 1루수가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에베츠필드 관중석 여러 곳에서 분명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사람이 또 나오네."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닌, 바로 그 사람 말이다. (Not that man, but THE man.)
이후 뮤지얼의 별명은 이름과 결합돼 '스탠 더 맨'이 됐다.
상대 팬들의 두려움과 존경심이 모두 들어 있는, 야구 역사상 가장 멋진 별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