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폼을 바꿔 입을 뻔한 윌리엄스와 디마지오
1941년 테드 윌리엄스는 마지막 4할을 달성했다.
마지막 날 더블헤더를 앞두고 .39955를 기록 중이었기 때문에 이대로 마치면 4할 타율로 인정 받을 수 있었다. 감독도 휴식을 권유했다.
하지만 윌리엄스는 두 경기에 모두 나서 8타수6안타를 기록하고 .406로 마쳤다. 당당한 4할이었다.
1941년의 아메리칸리그 MVP는 테드 윌리엄스가 아닌 조 디마지오였다. 같은 해 디마지오는 56경기 연속 안타를 달성했다. 기자들은 디마지오를 더 좋아했고, 무엇보다도 아메리칸리그 우승 팀이 뉴욕 양키스였던 것이 투표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윌리엄스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4할보다 56경기 연속 안타가 더 위대한 기록이다. 4할 타율은 볼넷을 골라내면서 유지하는 게 가능하지만, 조는 매일 밤 안타를 쳐야 했다. 그런 압박감은 나로서도 상상할 수 없다."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저기 위대한 타자가 지나간다'라고 말하길 바랐다. 하지만 조를 보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기 조 디마지오가 지나간다' 그는 존재는 야구 그 이상이었다."
상대방을 존경한 건 디마지오도 마찬가지였다. 디마지오는 윌리엄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우리 모두와 차원이 다른 타자다. 야구 역사상 그 어떤 누구도 그만큼 공을 정확하게 보고 때려내지 못했다. 펜웨이파크가 홈구장이라는 게 너무나 아쉬울 뿐이다."

사실 둘은, 홈구장이 바뀌었어야 했다.
'루스가 지은 집'으로 불린 양키스타디움은 루스를 위해 지어져 좌타자에 특화된 구장이었다.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로저 매리스, 레지 잭슨은 모두 좌타자였고, 양키스타디움의 짧은 우측 펜스가 큰 도움이 됐다. 스위치히터인 미키 맨틀은 우타석에서 더 강한 타자였지만, '양키스타디움의 좌타석'을 포기하지 못해 양손타자를 유지했다.
반면 우타자인 디마지오가 날린 타구는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이라 불리는 깊은 우중간에서 번번히 잡혔다.
보스턴 펜웨이파크의 오른쪽 파울 폴은 '페스키 폴'로 불린다. 페스키 폴은 홈 플레이트에서의 거리가 92미터로 메이저리그 구장 중 가장 짧다. 10시즌을 뛰면서 통산 홈런이 17개에 불과한 자니 페스키가 파울 폴에 붙어서 넘어간 홈런을 몇 개 때려내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펜웨이파크는 페스키 폴 때문에 좌타자가 홈런을 치기 쉬운 구장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하지만 이는 오라클파크 개장 당시 배리 본즈가 스플래시 홈런을 펑펑 때려내면서 좌타자에게 유리한 구장이라고 오해를 받은 것과 같았다.
펜웨이파크는 페스키 폴의 왼쪽부터 펜스가 급격하게 깊어지는데다 우중간이 데스 밸리이기 때문에 오히려 좌타자가 홈런을 치기에 극악의 구장이었다. 나중에 윌리엄스를 위해 불펜을 집어 넣고 우측 펜스를 앞으로 당기지만 달라진 건 크게 없었다. 윌리엄스는 오른쪽으로 당겨치는 좌타자였지만, 윌리엄스가 날린 공은 대부분 우측 폴에 붙는 대신 깊은 우중간으로 향했다.
디마지오는 윌리엄스가 양키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썼다면 매년 60홈런을 쳤을 것이라고 했다. 디마지오도 펜웨이파크 타자였다면 그린몬스터를 활용하는 타격으로 매년 타격왕을 했을 수 있다.
1947년의 어느 날 맨해튼의 사교 클럽에서, 보스턴 구단주 톰 요키와 양키스 구단주 댄 토핑은 위스키를 주고받으며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화는 홈구장으로 인해 손해를 보고 있는 윌리엄스와 디마지오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술을 진탕 마신 둘은, 디마지오와 윌리엄스를 1대1로 바꾸자는 경천동지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메이저리그의 세계선이 달라지게 될 순간이었다.
하지만 트레이드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 둘은 비서들로부터 기억나지 않는 약속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아연실색했다. 더 크게 당황한 쪽은 보스턴 요키 구단주였다.
당시 28살인 윌리엄스가 2차 대전 참전 후에도 최고의 활약을 이어가고 있던 반면, 윌리엄스보다 네 살이 많은 디마지오는 한 풀 꺾인 모습이었다. 1대1로 바꾸면 더 손해라고 생각한 요키는 토핑에게 막 데뷔한 22살짜리 포수 한 명을 끼워 달라고 했다. 훗날 양키스에서 10번의 우승을 차지하는 요기 베라였다.
트레이드가 미칠 여파를 생각하면, 토핑도 요키가 그런 요구를 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트레이드는 일어나지 않았고, 메이저리그의 역사도 바뀌지 않았다.
정말로 트레이드가 일어났다면? 윌리엄스는 양키스타디움에서 홈런을 펑펑 때려내며 600홈런, 아니 700홈런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윌리엄스는 한국전쟁 참전 후인 30세 이후부터 홈런이 크게 줄며 521개로 은퇴했다). 활동 기간은 더 짧았겠지만, 디마지오의 타격왕 숫자도 두 번이 아니라 네 번이었을 수 있다. 통산 타율도 .325에서 더 높아졌을 것이다.
디마지오와 윌리엄스는 은퇴 후 더 돈독하게 지냈다. 1999년 디마지오가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윌리엄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와 함께 뛰었던 날들은 내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런 순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2002년, 윌리엄스가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디마지오도 하늘 나라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