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발굴된 테드 윌리엄스의 ‘집착’

테드 윌리엄스는 메이저리그 팬에게 익숙하다 못해 진부한 이름입니다. 수많은 수식어와 기록을 다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송구스러울 정도입니다. 역대 최고의 타자를 꼽을 때 예외 없이 거론되는 레전드 중의 레전드입니다. 흔히 ‘마지막 4할 타자’로 언급되고 당시로서는 시대를 앞서간 타격 철학을 정립해 은퇴 이후까지 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2002년 세상을 떠나면서 더 이상 윌리엄스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ESPN의 MLB 대표 기자 제프 파산이 윌리엄스 생전에 촬영된 미공개 영상을 소개한 겁니다. 파산에 따르면 윌리엄스의 보스턴 시절 동료였던 투수 데이브 페리스가 사망한 뒤 유품 정리 중 'Ted and Bobby'라고 적힌 VHS 테이프가 발견됐고, 이 테이프 안에 45분 분량의 윌리엄스 관련 영상이 녹화돼 있었다고 합니다.

해당 영상은 1987년에 촬영된 것입니다. 윌리엄스는 야구를 제외하면 어릴 때부터 낚시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이 영상의 배경도 1987년 10월, 윌리엄스가 여러 지인과 함께 낚시 여행을 간 미국 오리건주의 로그 강 인근입니다. 윌리엄스가 현역 시절 절친한 동료이자 훗날 명예의 전당에도 입성한 바비 도어와 타격법에 대해 논쟁을 벌인 것이 영상의 주된 내용입니다.
대화 도중 서로 이견이 생긴 모양입니다. 그러자 두 사람은 10분씩 각자의 주장을 발표한 뒤, 다른 일행을 상대로 5분간 질의응답 시간을 갖고 거수투표를 받아 최종 우열(?)을 가리기로 했습니다. 이럴 일인가 싶습니다만, 어쨌거나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상황입니다.
바비 도어는 공을 내리치듯 때려서 백스핀을 만들어야 좋은 타구가 나온다고 주장하고, 윌리엄스는 투수가 높은 마운드에서 낮은 쪽으로 던지므로 배트를 약간의 상승 궤적으로 휘둘러야 한다고 맞섭니다. 두 선수 모두 현역 시절 자신의 타격 스타일을 그대로 반영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윌리엄스는 유효 스윙 범위가 넓어야 한다며 막대를 들고 자신의 엉덩이를 돌려가며 직접 스윙을 시연하는 열정까지 불태웠습니다. 공교롭게 거수투표 결과는 3 대 3으로 마무리됐고, 윌리엄스는 “무승부가 어디 있냐”며 장난 섞인 항의를 했습니다.
이 영상에서 의미를 찾자면 2010년대부터 정립된 ‘발사각’ 이론을 윌리엄스가 일찌감치 깨우쳤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윌리엄스는 현역 시절에도 땅볼로 물러나느니 차라리 강하게 때리다 뜬공으로 아웃되는 게 낫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시대마다 표현이 다를 뿐, 야구라는 스포츠에서 강한 라인 드라이브 타구의 중요성은 항상 강조되어 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윌리엄스의 열정에 특히 눈길이 쏠렸습니다. 이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레전드가 자신의 타격 지론을 강조하기 위해 방망이를 들고 엉덩이를 씰룩이며 호통치는 모습은 참으로 윌리엄스다웠습니다.
윌리엄스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집착’이라고 생각합니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윌리엄스는 어린 시절부터 타격 원리를 스스로 깊이 탐구했고, 그 결과물을 ‘타격의 과학’이라는 책으로 정리했습니다. 윌리엄스의 타격론은 2000년대 이전까지 타격의 본질을 짚은 최고의 이론으로 통했습니다. 세이버메트릭스가 대세를 이루자 잠시 퇴색되는 듯했던 윌리엄스의 주장은 이후 스탯캐스트의 도입으로 타구 속도와 발사각이 주목받으면서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이번 영상물이 발굴된 것을 계기로 ‘타격의 과학’을 다시 들춰봤습니다. (국내에는 2011년 김은식 작가의 번역본으로 소개됐습니다.) 제프 파산이 언급한 것처럼 ‘타격의 과학’은 책의 제목과 달리 과학적인 내용은 아닙니다. 대신 타격이라는 행위가 몇 가지 통계와 숫자로 규정할 수 없는, 철학적인 고민의 흔적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레전드의 솔직한 경험담이 반영되다 보니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일반적인 이론서와 차별화되는 점입니다.
흥미로운 사례도 많습니다. 로저스 혼스비를 만나러 도박장까지 따라다닌 끝에 ‘위대한 타자는 타고나는 게 아니라 실수를 고쳐가며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조언을 받은 기억. 그 유명한 ‘루 부드로 시프트’를 극복하기 위해 타이 콥과 밀어치기에 관해 나누었던 무림고수들의 대화. 야구용품 제조사 대표가 지켜보는 앞에서 여러 개의 방망이를 손으로 만져가며 0.5온스(약 14.2그램)의 무게 차이를 알아챈 일화까지. 오직 타격을 잘하기 위해 고민한 윌리엄스의 여러 흔적은 다시 봐도 흥미롭습니다.
거침없는 주장도 가득합니다. 대여섯 개의 공만 지켜보면 투수를 파악할 수 있다거나, 평범한 투수는 대개 머리가 나쁘다며 실명까지 거론하는 패기는 아찔하기까지 합니다. 투수와 타자 사이의 승부를 놓고 자신만큼 고민한 사람은 없다고 장담하는 태도는 다소 무모해 보이지만 윌리엄스이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타석에서 제대로 승부하려면 기억력이 치밀해야 한다는 주장과 스트라이크존 가장자리 1인치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대목에서는 그렉 매덕스와 일맥상통하는 느낌도 받습니다. 윌리엄스는 ‘타격의 과학’에서 세 가지 원칙을 말합니다. ‘좋은 공을 골라서 쳐라. 적절한 생각을 해라. 배트 스피드를 빠르게 하라.’ 자신만의 선구안과 승부에 대한 고민, 그리고 완성된 스윙은 시대가 달라져도 흔들리지 않는 원칙일 것입니다.

윌리엄스는 생전에 여러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타격 지론을 설파하곤 했습니다. 1980년대 어린이 프로그램인 ‘더 베이스볼 번치(The Baseball Bunch)’에 출연했던 장면은 지금도 온라인에서 회자됩니다. ‘타격의 과학’에서 논했던 스트라이크존 공략법을 입체 교구까지 동원해 아이들에게 설명하는 모습은 잊을 만하면 고전 야구 채널에 소환되곤 합니다.
다시 낚시 여행 영상으로 돌아가 봅니다. 영상의 내용은 활자로 남겨진 ‘타격의 과학’을 윌리엄스의 언어와 행동으로 재구성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정제되지 않은 거침없는 모습이라는 점이 더 매력적입니다.

윌리엄스는 언론이나 팬과의 관계에 다소 무심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좌충우돌하며 기록 외적으로는 평가절하된 면도 있습니다. 파격적인 언행도 종종 있었습니다. 1966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면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니그로 리그 선수의 재평가를 역설해 주위를 놀라게 했고, 워싱턴 세네터스 지휘봉을 잡아 올해의 감독에 선정되고도 구단이 텍사스로 연고지를 옮기자 미련없이 유니폼을 벗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타격에 대한 집착과 열정이라는 면에서는 가장 돋보인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테드 윌리엄스는 “길을 걸어갈 때 사람들이 ‘저기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타자가 지나간다’라고 말하게 만드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두 차례 군복무에 임하면서도 결국 윌리엄스는 가장 위대한 타자 중 한명으로 꼽힐 만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 정도면 자신이 말한 인생의 목표는 꽤 이뤄낸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