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9번 해고당한 빌리 마틴 감독
엄청 괴짜였고, 천부적 우승 청부사였습니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양키즈 감독직 이야기를 들면 금방 이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당대 최고 명문팀 감독이 된다는 것은 야구계의 인정을 받는 것이죠. 그런데 마틴은 양키즈 감독을 5번 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요? 양키즈 감독에서 5번이나 해고를 당했다가 다시 또 고용된 인물이었습니다.
구단주와 싸우고, 팀의 스타플레이어와 싸우고, 다른 선수와도 싸우고......
그러다 번번이 해고를 당하고도 결국 양키즈에서는 다시 그를 찾아 감독직을 맡겼습니다.

'제국 양키즈'로 유명하지만 이 팀도 전성기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1975년 막판 마틴이 친정팀 감독으로 임명됐을 당시 양키즈는 11년째 가을 야구를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시즌 마틴은 양키즈를 아메리칸리그(AL) 우승으로 이끌고 12년 만에 월드시리즈(WS)에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1977년 LA 다저스를 꺾고 15년 만에 WS 우승을 차지하며 천재 감독의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거포 레지 잭슨과 지독히 불화였지만, 프로답게 잭슨이 WS 3연타석 홈런을 친 시리즈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78년 시즌 중반 보스턴 레드삭스에 14경기차로 뒤지던 시점에 마틴이 양키즈에서 첫 해고를 당합니다.
사실 1977시즌부터 불안불안했습니다.
1977년 6월, 보스턴전 도중 마틴은 수비에서 태만한 모습을 보인 최고 스타 레지 잭슨을 경기 중에 교체해 버립니다.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잭슨과 마틴은 전국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는 초유의 사태를 빚었습니다.
그리고 78시즌 중반 마틴은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와 레지 잭슨을 '한 명은 타고난 거짓말쟁이(잭슨)고, 한 명은 범죄자(스타인브레너가 1972년 리처드 닉슨에게 불법 기부로 기소된 사실을 지칭))'라는 독설을 퍼부은 끝에 첫 번째 해고, 혹은 사임했습니다. 양측 주장이 다릅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해 스타인브레너는 팬들의 성화에 못 이긴다는 명문하에 마틴을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그런데 복귀 얼마 후 마쉬필드라는 한 술집에서 마틴은 야구 장비 외판원과 난투극을 벌였고, 이 사고를 이유로 시즌 종료 후 다시 해고됩니다.

1983년 스테인브레너 구단주는 마틴을 다시 찾았습니다.
캔자스시티 간판타자 조지 브레트의 파인타르 사건 (The Pine Tar Incident)이 벌어진 바로 그 해입니다. 마틴 감독의 야구에 대한 해박함과 집요함이 드러난 사건으로 유명한데
조지 브래트 대폭발 사건(Pine Tar Incident) - 이랜드 뮤지엄 스토리 게시판
팀 성적이 부진하자 시즌 후 다시 해고됐습니다.
2년 후인 1985시즌 마틴 감독과 애증 관계의 스타인브레더 구단주는 또 그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시즌 도중 볼티모어의 한 호텔 화장실에서 자기 팀 투수인 에드 윗슨(Ed Whitson)과 난투극을 벌여 팔이 부러졌습니다. 성적이 안 나니 핑계거리가 필요했던 구단주에게 적절한 4번째 해고 이유가 됐습니다.
그리고 1988년 다시 한 번 양키즈 감독에 임명됐지만 이미 구단주와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 왜 그런데도 다시 감독으로 고용했는지는, 그리고 감독 제안을 받아들였는지는 두 사람만 알겠지만, 결국 시즌 68경기만에 마틴은 또 해고됐습니다. 양키즈에서만 5번째.
두 사람의 관계는 참 설명하기 힘들었습니다.
당시 야구계에서는 "Can't live with him, can't live without him" - '절대 함께 살 수는 없지만, 없으면 못 사는 사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스타인브레너는 마틴의 승부사 기질을 사랑했고, 마틴은 친정팀 명문 양키즈를 지독하게 사랑했습니다. 오죽하면 당시 유명한 맥주 광고에서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해 "넌 해고야!", "아니, 나 사임하는 거야!"라며 자신들의 관계를 패러디할 정도였습니다.
첫 양키즈 감독이 되기 훨씬 전인 1969년 마틴은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감독 데뷔했습니다. 그리고 데뷔 첫해에 팀을 지구 우승으로 이끌며 천재 감독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술집 앞에서 자기 팀 투수 데이브 보스웰과 난투극을 벌였다는 이유로 시즌 종료 후 바로 잘렸습니다. 그의 해고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1971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감독을 맡은 마틴은 다음 해 역시 팀을 1위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런데 73시즌 상대 투수가 부정 투구(스핏볼)를 한다고 비난하며, 자기 투수들에게 상대 타자를 맞추라고 지시했다가 구단주와의 마찰로 시즌 중에 해고됐습니다.
그러나 그의 감독으로서 능력은 특히 하위권 구단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
만년 하위팀이던 텍사스 레인저스가 곧바로 그를 고용했습니다. 마틴은 최하위 팀을 2위까지 끌어올리며 '올해의 감독' 상까지 받았지만, 선수 트레이드를 두고 구단주와 다투다가 75시즌 중 경질됐습니다.
양키즈에서 두 번째 해고된 후에는 1980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그를 찾았습니다. 마틴은 이번에도 '빌리볼(Billyball)' 열풍을 일으켰지만, 투수들을 혹사시킨다는 논란과 성적 부진이 겹치며 1982년 해고됐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양키즈 감독으로 복귀했다가 계속된 해고와 재신임의 반복.

빌리 마틴은 '나는 히틀러나 무솔리니도 감독할 수 있다.'고 떠벌렸을 정도로 자신감에 넘쳤고, 그의 장담처럼 팀의 전력을 극대화하는데 발군의 능력을 과시했습니다.
1968년 79승83패로 조 선두에 24게임이나 뒤져 조 7위이던 트윈스를 1969년 곧바로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1971년에는 전년도 AL 동부조 4위이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91승으로 이끌며 2위까지 끌어올렸고, 1979년에 54승을 거둔 오클랜드를 1980년에 83승의 팀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빅리그 역사상 한 시즌 만에 승수가 놀랍게 상승한 팀들의 기록을 보면 마틴 감독의 이름이 빠지지 않습니다.
양키즈에서 마틴은 통산 5할9푼9리의 승률을 기록했고, 약팀들을 돌면서도 통산 전적 1,253승 1,013패 (1무)로 통산 승률이 5할5푼3리였습니다. 다저스의 전설적인 명장인 토미 라소다(.526)보다 높고, 애틀란타의 명장 바비 콕스(.556)와 비슷한 수준입니다.

그러나 양키즈 현역 시절부터 불같은 성격에 물러설 줄 모르는 투지와 과격한 행동으로 유명했던 그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도 곧바로 해고되는 등 항상 구설수와 해프닝의 중앙에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빌리 마틴의 본명은 알프레드 마누엘 마틴으로 1928년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마누엘이라는 미들 네임에서 느낄 수 있지만 그의 아버지는 포르투갈 이민자의 후손이었고, 어머니는 이탈리아계였습니다.
어려서 부모가 이혼하자 어머니 조앤이 그를 키웠는데 늘 '벨로(bello)'라는 애칭으로 그를 불렀습니다. 이탈리아어로 아름답다(beautiful)는 의미였는데, 그의 애칭인 '빌리(Billy)'가 바로 벨로에서 생겨났다지요.
고등학교 때부터 오클랜드 옥스라는 세미프로팀 산하 주니어 팀에서 야구를 한 마틴은 고교 졸업 후 곧바로 옥스에서 뛰기 시작했는데, 당시 감독이 전설적인 케이시 스탠젤이었습니다. 마틴의 투지와 내야 수비 능력을 높이 산 스탠젤은 양키즈 감독으로 스카우트되면서 마틴을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1950년 양키스에서 2루수로 빅리그에 데뷔했습니다.
11년간 1,021게임을 뛰면서 통산 타율이 2할5푼7리, 64홈런에 333타점으로 눈에 띄지 않는 성적을 남긴 마틴이었지만 찬스에는 아주 강한 타자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마틴은 28번의 WS 경기에서는 3할3푼3리를 기록했고, 1953년 WS에서는 홈런 2개와 3루타 2개 등 12안타를 몰아치며 타율 5할에 8타점으로 MVP에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현역 시절에도 그는 성질 고약한 싸움꾼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180cm에 74kg으로 운동선수치고는 크지 않은 체구였지만 다혈질에 술을 워낙 좋아해 늘 사고를 몰고 다녔습니다.
1957년에는 29번째 생일에 동료들을 데리고 유명한 나이트클럽 코파카바나를 갔다가 또 패싸움을 벌였고, 조지 와이스 단장은 마틴의 밤 생활이 미키 맨틀이나 화이티 포드 등 동료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며 그를 캔자스시티로 트레이드해버렸습니다.
1960년 레즈에서 뛸 때는 시카고 커브스의 짐 브루어 투수가 위협구를 던졌다고 배트를 그에게 집어 던지고 달려가 주먹질을 해서 광대뼈를 부러뜨렸습니다.
브루어는 두 달간 병원 신세를 졌고, 커브스는 마틴에게 100만 달러 손해배상을 청구했다가 취하하기도 했는데, 마틴은 결국 브루어가 소송을 해 1만 달러를 보상하기도 했습니다.
감독이 된 후에도 마틴의 싸움의 역사는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앞서도 소개한 사건들 외에도 선수, 심판, 구단 직원, 팬, 술집 바텐더와 경비원 등 마틴과 싸움을 벌인 상대의 리스트는 끝이 없었습니다. 시카고에서는 야구보다 풋볼을 좋아한다고 말한 택시 기사와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마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감독으로서의 천재성은 누구나 인정을 했습니다.
단 장기적으로 팀을 성장시키기보다는 단기간에 팀을 최고의 성적으로 이끄는 능력이 사상 최고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반면 젊은 투수들을 혹사하고 노장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비평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틴은 1989년 크리스마스에 교통사고로 61세의 나이에 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친지인 윌리엄 리드가 운전하던 픽업트럭을 타고가다 차가 전복되면서 사망했는데 시트벨트를 하지 않았었고, 술에 취한 상태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마틴은 6번째로 양키즈 감독을 맡기로 해서 1990년 시즌을 준비하고 있었고, 코칭스태프들을 선임하던 단계였다고 합니다.
마틴은 뉴욕주 호손에 있는 '게이트 오브 헤븐'묘지에 묻혔습니다.
그곳은 베이브 루스가 묻힌 곳으로 두 인물이 45미터 떨어진 곳에 묻혀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나는 양키스 유니폼을 입었던 가장 위대한 사람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사람이었다.'고 적혀있습니다.
1986년 양키스가 그의 배번 1번을 영구 은퇴번호로 결정하면서 양키스 외야의 기념관에 그의 동판을 붙이는 행사를 벌였을 때 마틴이 한 말이었습니다.
방법이 약간 달랐을지는 모르지만 야구에 가장 정열적으로 임했고, 또 양키즈를 뜨겁게 사랑했던 빌리 마틴은 그렇게 떠났습니다. 그리고 많은 올드팬들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천재적인 괴짜 감독으로 남아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