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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빅리그로- 론 르플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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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MLB) 150년 역사에 기인들은 꽤나 많았습니다.
그런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에 빌리 마틴이라는 감독이 있습니다.
명감독이었지만 너무도 특이한 야구 커리어를 보낸 마틴 감독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세히 소개할 기회를 잡겠습니다. 맛보기로 하나만 소개하면 마틴은 뉴욕 양키즈 감독을 무려 5번이나 맡았었는데, 5번 모두 해고당하는 믿기 어려운 야구 생애를 보냈습니다.

 

그런 빌리 마틴 감독이 1973년 미시간주 남쪽의 잭슨 교도소를 찾았습니다.

그 교도소에 야구를 아주 잘하는 선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당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감독을 하던 마틴은 직접 보고 싶어서 찾아간 것입니다.
 
론 르플로어 (Ron LeFlore)를 만난 마틴 감독은 대번 그의 스피드와 운동능력에 반합니다.
그리고 타이거즈 팀 관계자들을 설득해 르플로어에게 테스트 기회를 주도록 만들었습니다. 실형을 살고 있는 죄수를 입단 테스트한다는 것은 요즘에도 가능성이 거의 없을 텐데, 하물며 50년도 더 지난 그 시절에! 
마틴 감독이 아니면 당대 그 어떤 감독도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1948년 6월16일 디트로이트의 빈민촌에서 태어난 르플로어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알코올 중독에 실업자이던 아버지는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었고, 간호사이던 어머니가 집안을 꾸려갔습니다.
그의 자서전 '탈옥: 교도소에서 빅리그로(Breakout: From Prison to the Big Leagues)'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범죄에 발을 들여놓은 르플로어는 12세에 동네 창녀와 잠을 자고 마약의 일종인 헤로인을 상습적으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는 중퇴했고, 마약을 팔기도 했으며, 밤이면 동네 상점에서 술 등을 훔쳐 친구들과 취하도록 마시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결국 15세 되던 해 무장 강도 혐의로 체포된 르플로어는 최소 5년~ 최고 15년 형을 받고 잭슨 교도소에 수감되고 맙니다.

 

어린 나이에 학교를 중퇴한 르플로어는 야구나 다른 팀 스포츠를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얼굴도 가물가물한 아버지와 딱 한 번,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경기를 보러 간 것이 야구에 대한 그의 기억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그가 처음 야구를 접한 것은 교도소에서였습니다. 

교도소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마약과 술을 끊은 르플로어는 체격도 건장해졌고, 타고난 스피드와 파워를 과시하며 교도소 야구팀의 최고 스타가 됩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다른 죄수와 가까운 술집 주인을 통해 술집 단골인 마틴 감독에게 전해진 것이었습니다.

교도소를 방문해 르플로어의 플레이를 본 마틴 감독은 1973년 여름 딱 하루의 보석 허가를 받아내 르플로어를 타이거스타디움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재능에 강한 인상을 받은 타이거즈 구단은 그해 7월 정식 계약을 맺었고, 교도소에서는 프로야구 팀과 계약한 것을 보석 조건으로 인정했습니다. 르플로어는 20대 중반에 본격적으로 야구를 하게 됐습니다.
정말 극적이고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쉽게도 그를 찾아낸 마틴 감독은 그해 8월에 해고되고 말았습니다. 
타이거스 투수에게 고의로 상대 타자를 맞추라고 지시했다는 것이 해고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이건 핑계였을 테고,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요. 
마틴은 후에 뉴욕 양키즈를 정상으로 이끌며 스타 감독이 됐지만,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와의 반복된 충돌로 5번이나 해고되는 등 수많은 화재를 몰고 다녔습니다. 그는 정말 엉뚱하고 기발하며 또한 선수의 능력을 뚫어보는 천재적인 감독이었습니다.

 

마틴 감독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르플로어는 곧바로 더블A 팀에 배속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트리플A로 승격됐습니다.
그리고 1974년 시즌, 당시 27세의 루키 르플로어는 꿈의 빅리그 무대를 밟았고 1975년부터는 타이거스의 주전 중견수가 됩니다.

르플로어의 가장 큰 무기는 스피드였습니다. 
1978년 시즌에는 68개의 도루로 AL 도루왕에 올랐고, 준수한 타격과 함께 간간이 홈런 파워를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1977년에는 16개의 홈런을 치기도 했고, 1978년에는 126득점으로 리그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스피드도 당대 MLB 최상급이었지만 투수의 동작을 읽는 능력과 첫발 스타트 등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야구를 한 선수도 아닌데 그 정도였으니, 리틀리그부터 차근차근 야구를 체계적으로 배웠더라면 어떤 선수가 됐을까요?
 
1976년 타이거즈의 홈 관중수가 전년 대비 경기당 5,000명 이상이 늘었는데, 가장 인기를 끌던 선수가 바로 중견수 르플로어와 투수 마크 '더 버드' 피드리치였습니다. 
그 해에 루키였던 피드리치는 다른 투수가 독감에 걸려 갑자기 첫 선발로 나선 경기에서 2피안타 1실점으로 2-1 승리를 이끈 후 로테이션이 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무려 19승을 거두는 놀라운 활약으로 신인왕을 차지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투수였습니다. 바로 그 해에 르플로어는 처음 올스타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1979년 시즌이 끝나고 몬트리올로 트레이드된 르플로어는 1980년 시즌 생애 최다인 97도루를 기록해 NL 도루왕에 올랐고,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2년을 더 뛴 후 1982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습니다.

짧다면 짧은 9년간 빅리그에서 뛴 르플로어는 통산 455개의 도루와 2할8푼8리, 59홈런, 353타점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극적인 생애는 자서전 등 책으로 발간됐을 뿐 아니라 '백만 명 중에 한명(One in a Million)'이라는 TV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은퇴 후 그의 삶은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양육비 미지급 등 법적인 문제, 또 건강 악화로 다리 절단까지 겪는 등 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현재는 플로리다 주에서 조용한 생활을 이어가며, 간헐적으로 야구 행사나 인터뷰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다시 자서전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독히도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젊은 범죄자의 교도소 삶을 거쳐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불꽃 같은 인생의 시기를 보낼 기회를 잡았던 르플로어는 감히 행운아였다고 부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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