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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홈런왕, 로저 매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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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매리스 / 출처 - MLB.com

"그들은 마치 내가 뭔가 잘못을 저지르고 기록을 더럽히는 것처럼 행동했어요. 61홈런을 치고 나서 내가 얻은 게 뭔지 아세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They acted as though I was doing something wrong, poisoning the record books or something. Do you know what I have to show for 61 home runs? Nothing. Exactly nothing.)"

로저 매리스는 1961시즌 61홈런을 기록하며 베이브 루스의 60홈런을 넘어 메이저리그 단일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한 타자다. 이는 2022시즌 팀 후배인 애런 저지(62홈런)가 경신하기 전까지 아메리칸리그(AL) 기록이자, 금지약물 복용 선수를 제외하면 메이저리그 역대 단일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었다. 하지만 이 기록은 그에게 영광이라기보단 저주에 가까웠다. 베이브 루스를 넘어섰다는 이유로 그는 수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고, 그의 커리어 전체가 '61'이라는 숫자에 가려져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매리스는 애슬레틱스 시절이었던 1959시즌 맹장 수술로 후반기 대부분을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율 0.273 16홈런 72타점 OPS 0.824을 기록하며 24세의 나이로 올스타에 선정된 '될 성 부른 나무'였다. 1950년대 후반 애슬레틱스는 팀내 최고의 유망주들을 헐값에 양키스로 자주 트레이드해서 '양키스의 메이저리그 팜(Farm)'이라고 불렸는데 매리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양키스는 1959년 12월 애슬레틱스와 3:4 트레이드를 통해 그를 영입했는데, 누구나 트레이드의 핵심이 매리스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영입 당시부터 매리스는 양키스의 전설 미키 맨틀과 함께 브롱스 폭격기(Bronx Bombers, 양키스의 별명)의 월드시리즈 제패를 이끌 것이란 기대를 받았다. 실제로 매리스는 이적 첫 해인 1960시즌 타율 0.283 39홈런 112타점 OPS 0.952으로 타점과 장타율(.581) 부문 리그 1위를 차지하며 리그 홈런왕이자 팀 동료인 미키 맨틀(타율 0.275 40홈런 94타점 OPS 0.957)를 제치고 MVP에 선정됐다. 또한, 2년 연속 AL 올스타 선정과 함께 뛰어난 수비력을 인정받아 생애 첫 골드글러브를 수상하기도 했다.

 

로저 매리스와 미키 맨틀 / 출처 - MLB.com

 

그리고 1961년, 메이저리그는 야구의 흥행을 위해 로스앤젤레스(에인절스)와 워싱턴(새너터스→텍사스 레인저스)에 새로운 구단을 창단하고, 경기수를 154경기에서 162경기로 늘렸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매리스는 팀 동료인 미키 맨틀과 함께 역사에 남을 홈런 레이스를 벌였다. 전반기가 끝난 가운데 매리스는 33홈런을 맨틀은 29을 기록 중이었고, 누구도 넘보지 못할 것 같았던 베이브 루스가 1927시즌에 세운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인 60홈런을 경신하는 것도 꿈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후반기에도 매리스의 방망이는 식을 줄을 몰랐고, 8월 말에는 50홈런을 돌파하면서 사실상 루스의 기록을 갈아치우는 분위기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론은 매리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양키스 선수로 활약하며 루스의 후계자로 공인받아온 '프랜차이즈 스타' 맨틀이 아닌, '굴러들어온 돌' 매리스가 신성불가침의 기록에 도전한다는 것에 대해 팬들과 기자들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낸 것이다. 실제로 매리스는 홈런을 칠 때마다 다른 팀도 아닌 소속팀 양키스 팬들에게 야유를 들어야 했다.

 

기자들은 M&M 보이즈(매리스와 맨틀)를 서로 경쟁 구도로 묘사하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라이벌 관계를 만들었다. 사실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이자 룸 메이트였다. 그러나 맨틀이 시즌 후반 고관절 감염으로 입원하게 되면서 매리스만이 루스의 기록을 깰 유일한 선수로 남게 됐다. 그러자 당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였던 포드 프릭은 기자 회견을 통해 루스의 기록이 시즌 첫 154경기 안에 깨지지 않으면 새 기록은 162경기 시즌에서 달성되었음을 나타내는 '특징적인 표시'가 붙어야한다고 발표했다.

 

심지어 루스의 기록에 근접하면서 매리스는 살해 협박까지 받았다. 이러한 악재 속에서도 매리스는 묵묵히 신기록에 한 걸음씩 다가갔다. 비록 커미셔너가 말했던 154경기 안에 신기록을 세우지 못했지만, 157번째 경기인 오리올스 전에서 60홈런 고지를 밟았고, 시즌 마지막 경기인 레드삭스 전에서 대망의 61번째 홈런을 때려내며 루스의 기록을 넘어섰다. 결국 매리스는 타율 0.269 61홈런 141타점 OPS 0.993으로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하고 2년 연속 MVP에 선정되면서 역사적인 시즌을 마무리했다.

 

로저 매리스의 61번째 홈런 / 출처 - MLB.com

 

정규시즌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매리스는 월드시리즈 타율 0.105에 그쳤지만, 1961시즌 양키스는 2년 만에 월드시리즈 왕좌를 탈환했다. 이는 매리스의 커리어에서 첫 번째 우승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신성불가침의 기록을 넘봤다는 이유로 야구계의 눈총과 야유를 한 몸에 받았던 매리스에게 이 해는 영광보다 상처를 더 많이 남긴 시즌이 되고 말았다. 이듬해인 1962년 매리스는 타율 0.256 33홈런 100타점 OPS 0.840으로 4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며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2연패에 기여했다.

 

그러나 매리스는 1963년 손 부상으로 단 90경기에 출전해 타율 0.269 23홈런 53타점 OPS 0.887에 그쳤다. 1964년에는 141경기에서 타율 0.281 26홈런 71타점 OPS 0.828을 기록하며 반등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1965년 부상이 재발하면서 46경기에 출전해 타율 0.239 8홈런 27타점 OPS 0.795에 머물렀다. 매리스는 비시즌 동안 손에 있는 뼈조각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지만,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1966년 타율 0.233 13홈런 43타점 OPS 0.689를 기록한 것을 마지막으로 카디널스로 트레이드됐다.

 

매리스는 1967년 정규시즌에는 타율 0.261 9홈런 55타점 OPS 0.751에 그쳤지만,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0.385 1홈런 7타점 OPS 0.972를 기록하며 카디널스의 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8년 타율 0.255 5홈런 45타점 OPS 0.681을 기록한 것을 마지막으로 33세란 이른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플로리다주 게인즈빌로 이사한 매리스는 마지막 소속팀이었던 카디널스의 구단주인 구시 부시의 배려로 그가 소유한 맥주 회사의 유통업체를 운영했고 인근 고교 야구팀의 코치를 맡았다.

 

그리고 1978년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올드타이머 데이(Old-Timers' Day, 현역 시절 해당 구단에서 활약했던 은퇴 선수를 기리는 행사)에 참석해 양키스와 소원한 관계를 풀었다. 맨틀의 소개를 받고 입장한 그는 양키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관중으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았다. 하지만 1983년 매리스는 비호지킨 림프종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984년 양키스는 그의 등번호 9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지만, 매리스는 1985년 12월 14일 휴스턴의 병원에서 향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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