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포수, 중견수 홈런왕이 되다
"블래스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우투수인 그는 투수판의 1루쪽 맨 끝에 가지런히 두 발을 모으고 있다가 대단히 독특한 투구폼으로 공을 던졌죠. 긴 팔과 다리가 제멋대로 흩날리는 가운데 공이 마치 스와스티카 모양(卍)을 하고 날아오곤 했어요."
1972년, 스티브 블래스는 32경기에 나서 11번을 완투했고 사이영상 2위를 했다(249.2이닝 19승8패 2.49). 블래스는 1위 표를 한 장도 얻지 못했는데, 스티브 칼튼의 역사적인 시즌이기 때문이었다(41경기 30완투, 346.1이닝 27승10패 1.97). 서른의 나이에도 계속 발전하고 있었고 데뷔 후 한 번도 어깨나 팔꿈치를 다치지 않았던 그는, 마흔살까지 던질 수 있는 투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1973년, 스프링캠프에서 나타난 블래스는 평소와 좀 달랐지만, 본인은 물론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날 갑자기 그에게 생긴 문제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없게 된 것이었다. 피츠버그의 개막전 선발이었던 블래스는 3승9패 9.85에 그쳤고 88.2이닝을 던지는 동안 84개의 볼넷을 내줬다. 마이너로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 블래스는 받을 수 있는 모든 검진을 받았다. 피츠버그는 피칭 장면을 이잡 듯이 뒤졌지만 문제를 찾아내지 못했다. 피츠버그는 블래스의 문제가 심리적인 부분에서 기인한다고 판단했다. 블래스는 심리학자는 물론 긍정 치료사, 명상 치료사 등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변화는 없었다. 1975년 스프링캠프에서 변화가 없음을 확인한 피츠버그는 결국 그를 방출했다. 서른 두 살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스티브 블래스 병'(Steve Blass Disease)은 <딕슨 야구 사전>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붙어 있다.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능력을 갑자기 상실하는 것. 볼넷을 엄청나게 내주며 홈 플레이트를 두려워하는 등 컨트롤을 완전히 잃어 버리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을 때를 말한다. 의학적으로는 국소성 이긴장증(focal dystonia)으로, 골프 선수나 피아니스트에게도 자주 발생한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홈런왕인 데일 머피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포수였던 머피를 괴롭힌 것은 황당하게도 투수에게 공을 되돌려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한 번은 투수를 정면으로 맞혀 투수가 쓰러진 적도 있었다. 애틀랜타는 포수로서 치명적인 결격 사유가 생긴 머피를 1루로 보냈다. 하지만 머피의 송구 문제는 여전했다.
이때 애틀랜타 구단은 놀라운 결정을 한다. 포수로서, 1루수로서 실패한 머피에게 중견수를 맡긴 것이었다. 머피는 거구(193cm)였지만 빠른 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송구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난 머피는, 중견수가 된 3년차부터 5년 연속으로 골드글러브를 따냈다. 골드글러브 5연패 이상을 한 12명의 중견수 중에서 처음부터 중견수가 아니었던 선수는 머피가 유일하다.
1980년대는 머피의 시대였다. 1982년과 1983년에는 2년 연속 MVP에 올라 브레이브스 선수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2회 수상자가 됐다(행크 애런 1회). 1980년대에 기록한 308홈런은 마이크 슈미트에 이어 2위, 929타점은 슈미트와 공동 1위였다. 1983년 머피는 30홈런 30도루를 달성했는데, 내셔널리그에서는 1973년 바비 본즈 이후 10년 만에 나온 대기록이었다.
머피는 32세 시즌까지의 성적이 명예의 전당 선수인 랄프 카이너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33세 시즌부터 급격한 하락세가 시작됐고 공갈포로 전락했다. 1993년 37세 시즌에 하나의 홈런도 치지 못한 그는 통산 400홈런에 두 개를 남기고 은퇴를 결정했다. 거구의 몸으로 인조잔디 구장들에서 중견수로 뛰어다닌 것도 빠른 노쇠화의 원인이 됐다(아니, 1981년에 파업이 일어나지만 않았더라도 400개는 충분히 달성했을 것이다).
머피의 이른 퇴조에는 그의 생활 방식도 영향을 미쳤다. 독실한 몰몬교 신자였던 그는 술, 담배, 욕설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원정에 가면 동료들의 식사 비용을 대신 내주곤 했는데, 술값을 내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부인과 사이에서 7남 1녀를 둔 그는 라커룸에 여성 기자가 있으면 절대로 옷을 벗지 않았다.
1980년대 많은 선수들이 스테로이드와 암페타민 등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청소년 선수들의 약물 사용을 막기 위해 iWontCheat 재단을 설립한 그는 약물과 거리가 가장 먼 선수였다. 깨끗한 선수에게 33세 시즌부터의 퇴조는 어찌보면 당연했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CWFI의 홍보대사였던 머피는 헬멧 뒤에 CWFI의 스티커를 붙였다. 머피는 어느 날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6살 소녀의 아버지로부터 딸을 위해 홈런을 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머피는 노력해보겠다고 했고, 그 날 두 개의 홈런을 날렸다. 그리고 병원을 찾아가 홈런 공을 선물했다.
베이브 루스는 아픈 어린이를 위해 '예고 홈런'을 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홈런을 치기에 앞서 방망이를 외야로 향한 건 홈런을 예고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자극한 투수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는 제스처를 한 거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루스는 어린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루스는 마지막 시즌(1935)을 보스턴 브레이브스에서 보냈다. 등번호는 3번이었다. 머피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15년을 보냈다. 등번호는 3번이었다. 현재 애틀랜타 구단의 3번은 머피의 영구결번이다.
명예의 전당에 인성이 반영됐다면, 머피는 두 번을 오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