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의 사령관', 칼튼 피스크 이야기

칼튼 피스크 / 출처 - MLB.com
ㅡ 칼 야스트렘스키(명예의 전당 헌액자)
칼튼 피스크는 공·수·주를 모두 겸비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포수 중 한 명입니다. '퍼지(Pudge, 땅딸보)' 또는 '커맨더(Commander, 사령관)'란 별명을 지닌 그는 1975년 월드시리즈 6차전 연장 12회 말 극적인 결승 홈런의 주인공으로 유명하죠. 하지만 그가 은퇴 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수 있었던 것은 상대적으로 선수 생명이 짧은 포수였음에도 불구하고 45세까지 활약하는 놀라운 내구성을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피스크는 1969년부터 1993년까지 24시즌 통산 2,499경기 1,276득점 2,356안타 376홈런 1,330타점 128도루 타율 0.269 출루율 0.341 장타율 0.457 OPS 0.797을 기록했고 신인왕, 올스타 11회, 골드글러브 1회, 실버슬러거 3회를 수상했습니다. 은퇴 후에는 보스턴 레드삭스(27번)와 시카고 화이트삭스(72번)로부터 영구 결번으로 지정됐습니다. 또한, 2000년 두 번째 투표에서 79.6%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죠.
은퇴 시점에서 피스크는 통산 351홈런과 2,226경기 출전으로, 포수 역대 최다 홈런 기록 및 최다 출전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훗날 피스크의 포수 역대 최다 홈런 기록은 마이크 피아자(396홈런), 포수 최다 출전 기록은 그와 같은 별명(퍼지)으로 불린 이반 로드리게스(2,427경기)에 의해 깨졌습니다. 하지만 피스크는 여전히 아메리칸리그 기준으로 가장 오랜 기간(24시즌) 활약한 포수로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운동 재능
농구 유니폼을 입은 젊은 칼튼 피스크 / 출처 - MLB.com
칼튼 어니스트 피스크(Carlton Ernest Fisk)는 1947년 12월 26일, 미국 버몬트주 벨로우스폴스에서 세실과 레오나 피스크 부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고향은 코네티컷 강 건너편에 작은 마을인 뉴햄프셔주 찰스타운으로, 출생지가 벨로우스폴스인 것은 가장 가까운 병원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이 사실은 훗날 그가 명예의 전당 명판에 적힌 '버몬트 출신'이라는 문구를 수정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알려졌죠).
칼튼은 부모로부터 성실성과 운동 재능을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 세실은 공구 및 금형 업계의 엔지니어였을 뿐만 아니라 가족 대대로 이어받은 농장에서도 일했고, 지역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만큼 뛰어난 테니스 선수이자 농구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 레오나 역시 지역에서 유명한 볼링 선수였고, 소프트볼과 테니스에서도 두각을 드러냈죠. 피크스 가문의 자녀들이 모두 비범한 운동 능력을 보여준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칼튼은 처음부터 남매 중에서 가장 재능 있는 운동선수는 아니었는데요. 어린 시절 그는 키가 작고 통통한 아이였고, 이는 퍼지(Pudge, 땅딸보)라는 별명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찰스타운 고교 시절 그의 은사였던 랄프 실바 코치도 "당신이 8학년 때 칼튼을 봤다면 그가 이룬 걸 믿을 수 없을 겁니다"라고 회고했죠. 하지만 칼튼은 실바 코치와 함께 당시로선 드물게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실시하며 힘을 갈고닦았습니다.
칼튼은 형제(캘빈, 칼튼, 세드릭)들과 함께 찰스타운 고교에서 야구, 농구, 축구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칼튼이 가장 두각을 드러낸 종목은 농구였는데요. 뛰어난 농구 선수 출신인 아버지로부터 재능을 물려받은 칼튼은 고교 시절 지역 토너먼트 대회 준결승전에서 42득점 38리바운드를 기록했습니다. 비록 팀은 2점 차로 패했지만, 경기 종료 1분을 남기고 파울 아웃된 그는 관중으로부터 뜨거운 기립 박수를 받았습니다.
빌 러셀 같은 야구 선수를 꿈꾸다
칼튼 피스크의 우상이었던 빌 러셀 / 출처 - MLB.com
이러한 활약 덕분에 칼튼은 농구 선수로 전액 장학금을 받고 뉴햄프셔 대학교(UNH)에 입학했습니다. 대학 시절 칼튼은 농구와 야구를 병행했는데요. 그는 1965~66년 겨울 신입생 농구팀을 무패 시즌으로 이끌었고, 1966년 대학야구 여름 리그에서도 포수와 투수로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러던 1967년 칼튼은 뜻밖의 제안을 받습니다. 고향팀 보스턴 레드삭스로부터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4순위에 지명된 것이죠.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를 꿈꿨던 칼튼은 레드삭스의 제안을 받고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칼튼은 제안을 받은 후 처음에는 레드삭스가 지역 팬들을 달래기 위해 뉴잉글랜드 출신인 자신을 지명한 건 아닌지 의심했는데요. 하지만 고심 끝에 농구 선수의 꿈을 포기하고, 결국 레드삭스와 계약을 맺습니다. 훗날 칼튼은 이 선택을 "6피트 3인치(190cm)의 파워포워드가 보스턴 셀틱스에서 뛸 수는 없을 것 같았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칼튼은 야구 선수로서 자신이 존경하는 빌 러셀 같은 선수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러셀은 뛰어난 수비력과 이타적인 플레이로 NBA 최다 우승(11회)을 이끈 보스턴 셀틱스의 전설적인 센터였죠. 야구 선수인 칼튼의 롤 모델이 농구 선수인 러셀이라는 점은 다소 생소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칼튼의 플레이 스타일은 확실히 러셀과 유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러셀의 포지션은 골 밑에서 굳은 일을 도맡아 하는 '센터'였는데요.
칼튼의 야구 포지션 역시 홈 플레이트 뒤에서 굳은 일을 도맡아 하는 '포수'였습니다. 농구 선수 러셀의 특기는 상대의 슛을 블로킹하는 것이었고, 야구 선수 칼튼의 특기도 빠진 공을 블로킹하는 것이었습니다. 러셀은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팀 플레이어였고, 칼튼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투수와의 호흡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칼튼은 11번의 우승을 이끈 러셀처럼 소속팀 레드삭스를 우승으로 이끌기를 원했습니다.
남다른 승부욕과 투지 넘치는 플레이

마이너리그 시절 칼튼 피스크 / 출처 - MLB.com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점 때문에 칼튼의 야구 커리어는 마이너리그 풀타임 첫해부터 위기를 맞이합니다. 다만 위기는 그의 성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죠. 칼튼은 1968년 미드 웨스트 리그(싱글 A)의 워털루 호크스 소속으로 62경기에서 타율 0.338 12홈런 34타점 OPS 1.005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신인에겐 흔한 향수병도 겪지 않았고, 장거리 이동에 시달리지도 않았으며, 매일 야구를 해야 하는 고된 일정에도 불만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팀 성적이었는데요. 워털루는 1968년 53승 60패에 그쳤고, 칼튼은 이긴 경기보다 진 경기가 많다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했습니다. 마이너리그 소속팀의 승패가 유망주로서 그의 평가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도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죠. 이 시기 칼튼이 집으로 보낸 편지에는 팀의 패배로 인한 좌절 때문에 야구를 그만둘까 고민했다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는데요. 그만큼 그는 패배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승부욕은 칼튼을 위대한 선수로 만든 원천이었습니다. 그는 선수 생활 내내 투지 넘치는 플레이로 유명했는데요. 1974년 클리블랜드의 레론 리와 홈 플레이트에서 충돌하며 무릎 부상을 당했을 때, 그를 진단한 의사는 그가 다시 포수로 활약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하지만 9이닝을 소화한 후 바로 웨이트 트레이닝 룸으로 향할 정도로 성실했던 그는 힘든 재활을 이겨내고 복귀해 45세까지 포수로 19시즌을 더 뛰었죠.
마찬가지로 마이너리그 첫해에 겪었던 패배로 인한 좌절을 극복한 칼튼은 1969년 이스턴 리그(더블A)로 배정되어 97경기에서 타율 0.243 10홈런 41타점 OPS 0.746을 기록했고, 그해 9월 메이저리그로 승격되어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더블헤더 1차전에서 데뷔전을 치츱니다. 그러나 두 경기에서 5타수 무안타에 그친 후 이듬해인 1970년 다시 이스턴 리그(더블A)로 보내져 타율 .229 12홈런 44타점 OPS 0.763을 기록했습니다.
AL 역사상 만장일치 신인왕

신인 시절 칼튼 피스크 / 출처 - MLB.com
1971년 인터내셔널 리그(트리플 A) 루이빌 콜로넬스로 배정된 칼튼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은사를 만나게 되는데요. 훗날 칼튼은 루이빌 시절 감독이었던 대럴 존슨의 가르침에 대해 "존슨은 포수로서 중요한 역할인 투수를 도울 수 있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 줬습니다. 마스크를 착용했을 때 제 역할은 수비입니다. 하지만 장비를 벗으면 수비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공격에 집중해야 합니다"라고 회고한 바 있었습니다.
수비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타격에도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칼튼은 1971년 트리플 A에서 타율 0.263 10홈런 43타점 OPS 0.763을 기록했고, 시즌 후반 메이저리그에 콜업되어 14경기에서 타율 0.313 2홈런 6타점 OPS 0.847로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빅리그 풀타임 첫해인 1972년 타율 0.293 22홈런 61타점 OPS 0.909로 아메리칸리그 신인왕과 함께 포수 부문 골드글러브를 수상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됩니다.
AL 역사상 만장일치로 신인왕을 수상한 이는 칼튼이 최초였죠. 칼튼은 이듬해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습니다. 칼튼은 6월까지 타율 0.303을 기록했지만. 7월 타율 0.228, 8월 타율 0.198, 9월 타율 0.186을 기록했는데요. 이는 대부분의 경기(131경기)에서 포수로 나서면서 후반기 들어 체력이 고갈됐던 까닭으로 추정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73시즌을 타율 0.246 26홈런 71타점 OPS 0.750이란 준수한 성적으로 마쳤습니다.
승리를 향한 열망이 남달랐던 칼튼은 종종 투수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동기를 부여하거나, 상대 타자의 몸 쪽으로 공을 던지도록 독려하기도 했는데요. 에디 카스코 감독은 "칼튼과 맞붙는 팀들은 그를 싫어할 겁니다. 하지만 함께 뛰는 동료들은 그를 사랑합니다. 그는 마치 십자군 전쟁에 참전한 것처럼 플레이하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칼튼의 열정적인 플레이 스타일은, 때론 상대 팀과의 충돌을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양키스의 포수 셔먼 먼슨과 라이벌리

셔먼 먼슨과 칼튼 피스크의 난투극 / 출처 - MLB.com
특히 칼튼은 양키스의 포수 셔먼 먼슨과의 라이벌리로 유명합니다.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라이벌 구단인 양키스와 보스턴은 시대마다 양 팀의 간판스타들이 경쟁 구도를 형성했는데요. 1940년대에는 조 디마지오와 테드 윌리엄스가 있었고, 1960년대에는 미키 맨틀과 칼 야스트렘스키가 있다면, 1970년대에는 셔먼 먼슨과 칼튼 피스크가 있었죠. 하지만 칼튼과 먼슨의 관계는 선의의 경쟁자였던 앞선 세대와는 달랐습니다.
둘은 만나기만 하면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는데요. 대표적으로 1973년 8월 1일 9회 초 2-2로 맞선 상황에서 양키스 유격수 진 마이클이 수어사이드 스퀴즈 번트를 시도하자, 칼튼은 자신의 앞을 어슬렁거리던 마이클을 팔꿈치로 밀친 후 홈을 향해 돌진하던 먼슨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먼슨이 있는 힘껏 칼튼에게 부딪혔지만, 칼튼은 공을 지켰고 수비 방해를 유도하기 위해 자신의 위에 누운 먼슨을 발로 차서 밀어냈습니다.
마이클이 자신을 붙잡자 칼튼은 그를 내동댕이쳤고, 결국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졌죠. 당시 양키스의 감독 랄프 하우크는 "칼튼은 왼팔로 마이클의 목을 움켜쥐고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를 말리기 위해 선수들이 뭉쳐있는 더미 밑으로 기어가야 했죠. 그는 마이클을 꼼짝 못 하게 하는 동시에 먼슨을 주먹으로 때리고 있었습니다. 칼튼이 그렇게 강한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무서웠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거친 플레이 스타일로 인해 1974년 칼튼은 선수 생명의 심각한 위기를 겪습니다. 1974년 6월 28일 9회 말 2아웃 상황에서 조지 헨드릭의 안타 때 홈을 파고들던 클리블랜드의 레론 리와 홈 플레이트에서 충돌하면서 왼쪽 무릎 인대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것이죠. 무릎 수술을 받은 후 칼튼은 다시는 뛸 수 없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12개월간의 재활 훈련 끝에 기적적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부상
1975년 WS 6차전 칼튼 피스크의 홈런 / 출처 - MLB.com
선수 생명이 끝날 뻔했던 부상, 그리고 길고 외로웠던 재활은 칼튼에게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는데요. 그는 "무릎 부상은 오히려 축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전까지 겨울에 저는 농구 코트에서 신나게 뛰어놀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이제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야구를 준비하는 데 맞춰져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컨디셔닝에 대한 집착은 그가 포수로서 24년간(역대 1위) 2,226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했죠.
1975년 6월 23일, 펜웨이 파크에 운집한 관중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복귀한 칼튼은 남은 시즌 79경기에서 타율 0.331 10홈런 52타점 OPS 0.923을 기록하며 레드삭스를 지구 1위로 이끌었고, 애슬레틱스와 ALCS에서도 타율 0.417(12타수 5안타)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신시내티와 월드시리즈 6차전에서 6-6으로 팽팽하게 맞선 연장 12회 말 좌측 폴대에 맞는 끝내기 홈런을 터뜨리며 승부를 7차전까지 끌고 갔습니다.
칼튼이 타구가 페어로 유지되길 바라며 간절히 손을 흔드는 장면은 지금까지도 포스트시즌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로 남아있는데요. 하지만 레드삭스는 7차전에서 경기 초반 3-0 리드를 유지하지 못하고 4-3 역전패를 당하며 1918년 이후 57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기회를 놓쳤습니다(이후로도 86년간 이어진 '밤비노의 저주'는 보스턴이 2004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면서 비로소 깨졌습니다).
칼튼은 이후에도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칼튼은 레드삭스에서 1969년부터 11시즌 동안 뛰면서 1,078경기 1,097안타 162홈런 568타점 61도루 타율 0.284 OPS 0.837 WAR 39.5를 기록했고 신인왕, 올스타 7회, 골드글러브 1회를 수상했습니다. 특히 1977년 타율 0.315 26홈런 102타점 OPS 0.922를 기록하는 등 최고의 시즌을 보냈죠. 하지만 1980시즌 종료 후 레드삭스는 칼튼과 재계약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레드삭스를 떠나 화이트삭스로
화이트삭스 시절 칼튼 피스크 / 출처 - MLB.com
실제로 당시 레드삭스의 단장인 헤이우드 설리번은 칼튼에게 우편으로 새 계약서를 보냈지만, 계약서가 계약 마감일 하루 후에 도착하면서 칼튼은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었습니다. 한편, 레드삭스는 FA 협상에서도 칼튼에게 4년 200만 달러를 제안하는데 그쳤는데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레드삭스의 프런트 오피스가 자신을 소홀히 대한다고 느낀 칼튼은 5년 350만 달러를 제안한 화이트삭스와 계약을 맺습니다.
칼튼은 레드삭스에서 27번을 달았지만, 화이트삭스의 27번은 이미 켄 크라벡이 달고 있었기 때문에 이적 후 72번으로 등번호를 고쳤는데요. 언뜻 앞뒤만 바꾼 듯하지만, 칼튼이 72번을 달기로 한 이유는 또 있었죠. 1972년에 신인왕을 수상했고, 아들 카슨도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화이트삭스에 입단한 칼튼은 1983년 타율 0.289 26홈런 86타점 9도루 OPS 0.874를 기록하며 팀을 24년 만의 가을야구 진출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1985년에는 타율 0.238 37홈런 107타점 17도루 OPS 0.808로 37세의 나이에 홈런·타점·도루 부문 커리어 하이를 경신했습니다. 이는 2021년 살바도르 페레즈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AL 단일 시즌 포수 최다 홈런 기록이기도 합니다. 1990년 8월 17일, 칼튼은 포수로서 통산 328번째 홈런을 터뜨리며 자니 벤치의 포수 통산 홈런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1991년에는 올스타전 최고령(43세) 안타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칼튼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3년 6월 22일, 그는 포수 마스크를 쓰고 2,226번째 경기에 출전하며 밥 분의 포수 최다 출전 경기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그 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칼튼은 45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방출 통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칼튼과 린다 피스크 부부는 펜웨이 파크와 코미스키 파크의 상공에 비행기를 띄워 현수막으로 레드삭스와 화이트삭스의 팬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은퇴 후의 삶
명예의 전당 헌액식 칼튼 피스크 / 출처 - MLB.com
칼튼 피스크의 등번호는 은퇴 후 레드삭스(27번)와 화이트삭스(72번)에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됐고, 2000년 두 번째 투표에서 79.6%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칼튼은 화이트삭스(13년)에서 더 오래 뛰었지만, 친정팀 레드삭스(11년)의 모자를 쓰고 입성했는데요. 여기에는 화이트삭스 구단주 제리 라인스도프와의 불화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둘은 화해했고, 칼튼은 2008년 홍보대사로 화이트삭스에 복귀했죠.
칼튼은 2004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레드삭스로부터 명예 월드시리즈 반지를 받으며 현역 시절 그토록 원했던 우승 반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5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화이트삭스로부터도 명예 월드시리즈 반지를 받으며 양손에 반지를 끼웠습니다. 화이트삭스는 2005년 그의 실물 크기 동상을 제막했습니다. 지금도 개런티드레이트 필드의 중앙홀에는 피스크의 동상이 우뚝 서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