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완투 머신', 퍼기 젠킨스 이야기
퍼기 젠킨스 / 출처 - MLB.com
퍼기 젠킨스는 가장 과소평가받는 에이스 중 한 명입니다. MLB 역사상 통산 탈삼진 3,000개 이상을 기록한 투수 중 볼넷이 1,000개 미만인 투수는 단 4명뿐인데요. 그중 세 명은 그렉 매덕스, 페드로 마르티네스, 커트 실링으로 이들은 타자들이 삼진을 감수하더라도 장타를 노리는 시대(1990년대 이후)에 활약한 투수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죠. 반면 나머지 한 명인 젠킨스는 타자들이 삼진을 당하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던 시대에 활약했습니다.
젠킨스는 1965년부터 1983년까지 통산 284승 226패 267완투 4,500.2이닝 997볼넷 3,192탈삼진 평균자책점(ERA) 3.34를 기록했고, 올스타 3회, NL 사이영상 1회, 다승왕 2회, 탈삼진왕 1회를 기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킨스의 이름을 기억하는 야구팬은 많지 않습니다. 젠킨스와 동시대에 활약한 투수들 중에는 워낙 개성 넘치는 에이스들이 즐비했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그는 강속구를 던졌지만, 놀란 라이언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젠킨스는 밥 깁슨이나 스티브 칼튼처럼 강력한 슬라이더를 던지거나, 짐 팔머처럼 위력적인 커브볼을 던지지도 못했습니다. 필 니크로처럼 신기한 공(너클볼)을 던지는 것도, 게일로드 페리처럼 반칙 투구(스핏볼)의 대명사도 아니었습니다. 젠킨스가 잘 하는 일은 단순했습니다. 강력한 패스트볼을 칠 테면 쳐보라는 식으로 스트라이크 존에 욱여넣는 것입니다. 이 단순한 방식 하나로 젠킨스는 당대 최고의 이닝이터로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의 야구 소년

퍼기 젠킨스 / 출처 - MLB.com
젠킨스의 본명은 퍼거슨 아서 '퍼기' 젠킨스(Ferguson Arthur "Fergie" Jenkins)로 1942년 12월 13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채텀에서 퍼거슨 젠킨스 시니어와 델로레스 젠킨스의 외동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젠킨스 시니어는 바하마계 캐나다인으로 직업은 요리사였고, 어머니인 델로레스는 미국 남부에서 탈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는데요. 젠킨스의 부모님은 모두 뛰어난 운동선수 출신으로 알려졌습니다.
젠킨스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복싱 선수이자 준 프로야구 선수였고, 어머니는 볼링 선수로 키가 당시 여성으로선 장신인 175cm에 달했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타고난 신체 조건(196cm 92kg)과 운동 신경을 물려받은 젠킨스 학창 시절 육상, 아이스하키, 농구 선수로도 활약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젠킨스가 가장 좋아하는 종목은 야구였습니다. 처음 야구를 시작했을 때, 그의 포지션은 1루수였습니다.
그러나 젠킨스는 집 근처의 석탄 야적장에서 석탄을 싣고 가는 기차의 틈새를 겨냥해 돌멩이를 던지는 방식으로 틈틈이 투구 기술을 연마했고, 어느 날 팀 동료가 팔을 다쳐 공을 던질 수 없게 되자 자원해서 대신 투수로 나섰습니다. 그날 젠킨스는 어린 시절부터 돌멩이 던지기 연습을 통해 갈고닦은 실력으로 인상적인 투구를 펼치면서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스카우트인 진 지아두라의 눈에 띄었습니다.
지아두라의 권유로 젠킨스는 본격적인 투구 훈련을 받기 시작했고, 둘의 훈련은 젠킨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 필라델피아와 계약을 맺을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젠킨스는 필라델피아와 계약을 맺은 첫해인 1962년 만 19세의 나이에 플로리다 리그(클래스 D)의 마이애미로 보내져 11경기 7승 2패 ERA 0.97을 기록했고, 이듬해인 1963년에는 싱글 A로 승격되어 12승 5패 ERA 3.41을 기록했습니다.
시카고 컵스로 이적하다

퍼기 젠킨스 / 출처 - MLB.com
젠킨스는 1964년 더블 A와 트리플 A 32경기(29선발)에서 15승 11패 196이닝 198탈삼진 ERA 3.12를 기록하며 본격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65년에도 트리플 A 32경기(10선발)에서 8승 6패 122이닝 112탈삼진 ERA 2.95를 기록 중이던 젠킨스는 시즌 막판 메이저리그에 콜업되어 구원 투수로 7경기에 등판해 2승 1패 12.1이닝 10탈삼진 ERA 2.19을 기록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22세였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66년 젠킨스는 필라델피아에서 한 경기에만 등판한 후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됩니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유망주인 젠킨스(23세), 아돌포 필립스(24세), 존 헌스타인(28세)를 컵스로 보내는 대가로 베테랑인 래리 잭슨(35세)과 밥 불(38세)를 영입했는데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트레이드는 필라델피아 역사상 최악의 트레이드이자, 컵스 역사상 최고의 트레이드 중 하나가 됐습니다.
젠킨스는 컵스로 이적한 첫해 60경기(12선발)에서 6승 8패 182이닝 148탈삼진 ERA 3.31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풀타임 선발 첫해인 1967년 38경기에서 20승 13패 289.1이닝 236탈삼진 ERA 2.80으로 커리어 첫 올스타에 선정됐고, 사이영상 투표에서 2위, MVP 투표에서 12위를 차지하며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우뚝 섰습니다. 특히 20번의 완투는 NL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죠.
이해를 시작으로 젠킨스는 6년 연속 20승 이상을 달성하며 컵스의 레전드인 모데카이 브라운(통산 239승 130패 ERA 2.06)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놀라운 점은 젠킨스가 리글리 필드라는 '타자 친화적인 구장'에서 뛰면서 이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는 겁니다. 심지어 그의 소속팀인 컵스는 젠킨스가 활약한 1966년부터 1973년까지 8시즌 동안 한 번도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지 못한 약팀이었습니다.
캐나다 출신 최초의 사이영상
퍼기 젠킨스 / 출처 - MLB.com
젠킨스는 1968년 20승 15패 308이닝 260탈삼진 ERA 2.63으로 MVP 18위에 올랐고, 1969년 21승 15패 311.1이닝 273탈삼진 ERA 3.21로 탈삼진왕을 차지했습니다. 이어 1970년 22승 16패 313이닝 274탈삼진 ERA 3.39으로 완투 1위(24)를 기록했는데요. 그리고 1971년 24승 13패 325이닝 263탈삼진 ERA 2.77로 다승·이닝·완투(30) 부문 1위를 차지하며 올스타와 함께 생애 첫 NL 사이영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캐나다 출신 투수로서 최초이자, 컵스 투수로서도 최초로 사이영상을 수상한 기록이었죠. 해당 시즌 젠킨스는 볼넷 37개(9이닝당 1개)를 허용하는 동안 삼진 263개(9이닝당 7.3개)를 잡아내면서 삼진/볼넷 비율 7.11(1위)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젠킨스는 1982년에도 20승 12패 289.1이닝 184탈삼진 ERA 3.20으로 커리어 3번째 올스타에 선정됐고, 사이영상 투표 3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1973년 내내 무릎 통증과 어깨 건염에 시달리면서 14승 16패 271이닝 170탈삼진 ERA 3.89에 그쳤습니다. 수년간의 끊임없는 노력은 젠킨스를 지치게 만들었는데요. 심지어 1973시즌 중반에는 "더 이상 야구를 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을 정도였죠. 그러자 젠킨스가 만 30세의 나이로 조기 은퇴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소속팀 컵스는 시즌 종료 후 그를 텍사스 레인저스로 트레이드합니다.
절치부심한 젠킨스는 텍사스 이적 첫해인 1974년 25승 12패 328.1이닝 225탈삼진 ERA 2.82를 기록하며 올해의 컴백 플레이어에 선정됐고, 캣피시 헌터에 이어 AL 사이영상 투표 2위에 오릅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75년 17승 18패 270이닝 157탈삼진 ERA 3.93으로 부진을 겪자, 텍사스는 젠킨스를 보스턴 레드삭스로 트레이드합니다. 보스턴 시절 젠킨스는 이전처럼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커리어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퍼기 젠킨스 / 출처 - MLB.com
젠킨스는 보스턴 이적 첫해인 1976년 12승 11패 209이닝 142탈삼진 ERA 3.27을, 1977년 10승 10패 193이닝 105탈삼진 ERA 3.68을 기록했습니다. 그러자 보스턴은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고, 젠킨스는 전 소속팀인 텍사스로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또 한 번의 반전이 일어났는데요. 텍사스로 돌아온 직후였던 1978년, 젠킨스가 18승 8패 249이닝 157탈삼진 ERA 3.04으로 AL 사이영상 투표 6위에 이름을 올리며 부활에 성공한 겁니다.
이후에도 젠킨스는 텍사스 소속으로 1979년 16승 14패 259이닝 164탈삼진 ERA 4.07을, 1980년 12승 12패 198이닝 129탈삼진 ERA 3.77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1980년 5월 23일 애슬레틱스전에서는 9이닝 8K 1실점(0자책) 완투승으로 통산 250승을 달성했죠. 하지만 그해 젠킨스가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그의 투구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토론토에서 세관 수색을 받던 중 젠킨스의 짐에서 마약이 적발된겁니다.
이에 당시 MLB 커미셔너 보위 쿤은 젠킨스에게 무기한 출전 정지 처분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독립 중재인(Independent Arbiter)인 레이먼드 괴츠가 출전 정치 처분을 뒤집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하면서 그의 출전 정지 기간은 불과 2주밖에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열린 재판에서도 담당 판사가 증거 부족으로 그에게 무죄 처분을 내리면서, 젠킨스는 추가 징계 없이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듬해인 1981년 젠킨스는 5승 8패 106이닝 63탈삼진 ERA 4.50을 기록한 후 텍사스로부터 방출됐습니다. 이후 친정팀 컵스로 복귀한 젠킨스는 1982년 14승 15패 217.1이닝 134탈삼진 ERA 3.15의 성적을 올리는 저력을 발휘했고, 그해 5월 25일에는 대망의 통산 3,000탈삼진을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1983년 만 40세의 나이에 6승 9패 167.1이닝 96탈삼진 ERA 4.30을 기록한 것을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은퇴했습니다.
공격적인 투구의 대명사
퍼기 젠킨스 / 출처 - MLB.com
젠킨스는 현역 시절 공격적인 투구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는 훗날 인터뷰를 통해 '투수의 역할은 볼넷을 주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아웃시키는 것'이라고 자신의 투구 철학을 밝힌 바 있는데요. 젠킨스는 "젊은 투수들이 저에게 조언을 구하면 저는 '스트라이크를 던지세요'라고 말합니다. 타자를 상대로 스트라이크 3개를 잡으면 삼진이 됩니다. 타자가 그전에 치더라도 (수비수에 의해) 아웃될 가능성이 높습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젠킨스는 "하지만 볼넷을 내주면 타자를 아웃으로 잡을 가능성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포수는 실망하고, 감독은 화를 내고, 투수 코치는 불행해집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화가 나더군요. 하지만 요즘 투수들은 스트라이크를 충분히 던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는데요. 이러한 젠킨스의 투구 철학은 그가 남긴 통계 기록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젠킨스는 9이닝당 볼넷에서 리그 1위를 5번이나 차지했습니다.
이러한 공격적인 투구는 그가 통산 4번이나 완투 부문에서 리그 1위에 오를 수 있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젠킨스는 전성기였던 1967년부터 1974년까지 8시즌 동안 평균 21승 14패 22완투 304이닝 236탈삼진 ERA 3.07이라는 엄청난 이닝 소화력을 발휘했는데요. 반면, 승부를 피하지 않는 투구 스타일에서 오는 필연적인 약점도 있었습니다. 바로 통산 7번이나 리그 최다 홈런을 허용한 것이죠. 하지만 젠킨스는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젠킨스는 커브볼도 거의 던지지 않았고, 체인지업도 던진 적이 없었습니다. 포크볼을 던지긴 했지만 경기당 한두 번 정도에 그쳤죠. 그저 한 구, 한 구 던질 때마다 "이게 내가 가진 최고의 무기야. 칠 테면 쳐봐" 하는 식으로 자신의 주무기인 강속구를 스트라이크 존에 꽂아 넣었을 뿐입니다. 놀라운 점은 젠킨스가 타자들을 속이려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면 승부 만으로 통산 3,000개 이상의 탈삼진을 잡아냈다는 겁니다.
다재다능함에 감춰진 비극적인 개안사
퍼기 젠킨스 / 출처 - MLB.com
한편, 젠킨스는 뛰어난 운동 능력을 바탕으로 타격에도 재능을 발휘했는데요. 젠킨스는 1971년 사이영상을 수상할 당시 타자로서도 39경기에서 타율 0.243 6홈런 20타점 OPS 0.761을 기록했습니다. 이에 대해 젠킨스는 "투구는 야구의 일부일 뿐입니다. 타석에 서는 순간 투수도 타자가 됩니다. 그냥 서 있기만 하면 안 됩니다. 팀의 일원으로서 투수도 베이스를 어떻게 달리고, 어떻게 진루시킬지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그의 커리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아쉬운 점은 포스트시즌에 한차례도 등판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젠킨스는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약팀에서 뛰었고, 이는 그가 저평가 받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죠. 또한, 자서전의 제목인
젠킨스는 27살이란 젊은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47살에는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냈습니다. 심지어 그로부터 2년 후에는 젊은 약혼녀와 세 살배기 어린 딸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젠킨스는 정신적인 어려움을 선행으로 극복했습니다. 젠킨스는 미국과 고국 캐나다에서 여러 자선 단체를 지원했고, 2000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자선 재단을 설립하는 등 수많은 자선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1983년 메이저리그에서 은퇴한 젠킨스는 고국인 캐나다로 돌아가 준 프로야구 팀인 런던 메이저스에서 두 시즌을 더 뛰었습니다. 이후로도 젠킨스는 캐나다에서 가장 유명한 메이저리그 선수로서 현재는 사라진 캐나다 야구 리그의 커미셔너를 맡는 등 꾸준히 캐나다의 야구 발전에 힘쓴 공로로 2007년 캐나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고, 2011년에는 캐나다 우정국이 그의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게임은 쉽고, 인생은 어렵다
퍼기 젠킨스 / 출처 - MLB.com
젠킨스는 1991년 세 번째 투표에서 75.4%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는데요. 이는 캐나다 출신으로서 최초의 기록입니다. 이룬 업적에 비해 입성이 늦춰진 것은 1980년 마약 소지 적발이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시카고 컵스는 2009년 5월 3일, 그의 등번호 31번을 그렉 매덕스와 함께 공동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리고 2022년 5월 20일, 컵스의 홈구장 리글리 필드에는 젠킨스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2020년 미국 스포츠 전문 매체 <디 애슬레틱스>는 메이저리그 레전드 TOP 100에서 젠킨스를 81위로 선정했습니다. 젠킨스의 자서전인 『게임은 쉽고, 인생은 어렵다(The Game Is Easy, Life Is Hard)』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이 스포츠(야구)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이기거나, 지는 것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 어떻게 헤쳐나가느냐가 결정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