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사람', 로베르토 클레멘테 이야기
로베르토 클레멘테 / 출처 - MLB.com
로베르토 클레멘테
로베르토 클레멘테는 푸에르토리코 출신 프로야구 선수로, 메이저리그 1세대 라틴 아메리카 출신 슈퍼스타이자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프랜차이즈 스타입니다. 클레멘테는 1955년부터 1972년까지 18시즌 동안 피츠버그에서만 활약하며 통산 2433경기 3000안타 240홈런 1305타점 타율 0.317 OPS 0.834 WAR 94.9승을 기록했고 올스타 15회, 골드글러브 12회, 타격왕 4회, MVP 1회, 월드시리즈 우승 2회, 월드시리즈 MVP 1회를 차지했습니다.
클레멘테는 그라운드 밖에서도 훌륭한 인품과 투철한 사회봉사 정신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는데요. 클레멘테는 1972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대지진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니카라과에 구호물자를 전해 주기 위해서 비행기를 타고 가던 중 38세의 나이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에 메이저리그는 클레멘테를 기리는 의미에서 매년 스포츠맨십과 사회봉사에서 모범적인 활동을 한 선수에게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수여하고 있죠.
몬테 어빙을 동경했던 푸에르토리코 소년

로베르토 클레멘테 / 출처 - MLB.com
클레멘테는 1934년 8월 18일 푸에르토리코의 수도 산후안 근교에 위치한 캐롤라이나에서 멜초르 클레멘테와 루이사 워커의 일곱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클레멘테의 아버지는 사탕수수 농장의 작업 감독관으로 일했습니다. 클레멘테와 형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도와 농장에서 트럭에 짐을 싣고 내리는 일을 했고, 그 외에도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우유를 배달하는 등 다양한 일을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어린 시절 클레멘테는 윈터리그에 참여하기 위해 푸에르토리코를 찾은 미국 본토의 메이저리그 스타들을 보며 야구 선수의 꿈을 키웠는데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몬테 어빙이었습니다. 니그로리그의 스타였던 어빙은 겨울에는 푸에르토리코 윈터리그의 산후안 세나도레스에서 뛰었습니다. 어빙의 강력한 어깨(송구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은 클레멘테는 훗날 "그처럼 던지기 위해 야구를 하기 시작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클레멘테는 동네 친구들과 매일 해가 지기 전까지 야구를 했는데요. 그러던 1948년 14세의 클레멘테는 인생의 은인을 만납니다. 로베르토 마린 감독에게 발탁되어 셀로로호 소프트볼 팀에 합류한 것이죠. 로베르토의 강력한 어깨를 눈여겨본 마린은 처음엔 그를 유격수로 기용했고, 이후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시켰습니다. 훗날 마린은 "클레멘테는 장타와 환상적인 수비로 곧 유명해졌습니다. 모두가 그를 주목했죠"라고 말했습니다.
클레멘테는 고교 시절 높이뛰기와 창던지기 선수로도 활약했는데요. 창던지기는 훗날 역대 최고란 평가를 받은 송구 능력을 기르는 데에도 도움이 됐죠. 클레멘테는 육상 선수로서도 푸에르토리코를 대표해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을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다재다능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야구에 집중하기로 결심한 그는 푸에르토리코 리그의 칸그레헤로스 데 산투르세와 계약을 맺으며 프로에 첫 발을 디뎠습니다.
다저스와 계약을 맺다

로베르토 클레멘테 / 출처 - MLB.com
1952년 칸그레헤로스에 입단했을 때, 클레멘테의 나이는 18세에 불과했습니다. 버즈 클락슨 감독은 클레멘테를 첫 시즌에는 벤치에서 출전시키며 경험을 쌓게 한 후 다음 시즌부터 서서히 선발 출전 빈도를 높였습니다. 클락슨 감독의 지도 아래 클레멘테는 1953-54시즌 올스타에 선정됐고, 시즌 타율 0.288로 리그 6위에 오릅니다. 이를 바탕으로 클레멘테는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금 1만 달러, 연봉 5천 달러에 계약을 맺습니다.
클레멘테가 다저스와 계약을 맺을 당시 메이저리그에는 한 선수와 4,000달러 이상의 계약을 맺을 경우, 구단은 해당 선수를 최소 두 시즌 동안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는데요. 만약 이 규정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구단은 해당 선수에 대한 권리를 상실하고, 해당 선수는 룰 5 드래프트 대상자가 됐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구단은 4,000달러 이상의 계약을 맺은 선수를 마이너리그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저스는 클레멘테를 산하 트리플 A 팀인 몬트리올 로열스에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훗날 클레멘테의 전기를 쓴 작가들은 "다저스가 룰 5 드래프트에서 지명되지 못하도록 클레멘테를 숨기려고 했다"라고 주장했는데요. 하지만 몬트리올 시절 그의 출전 기록을 살펴보면 이는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당시 몬트리올의 감독 맥스 메이컨 역시 클레멘테의 출전 시간을 제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메이컨은 클레멘테를 자주 기용하지 않은 이유를 "스트라이크 존에서 벗어난 공에 지나치게 배트가 따라나갔기 때문"이라 말했습니다. 프로야구 입단 첫해인 19세 선수에게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죠. 실제로 7월 초까지 그의 타율은 2할을 간신히 넘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클레멘테는 시즌을 치르면서 좌투수를 상대로 점차 많은 기회를 얻었고, 트리플A에서 보낸 첫 시즌에 87경기에서 타율 0.257을 기록했습니다.
해적단(파이리츠)의 약탈 대상이 되다

로베르토 클레멘테 / 출처 - MLB.com
하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은 숨길 수 없는 법. 피츠버그의 스카우트 클라이드 수크포스(다저스 시절 재키 로빈슨을 영입한 전설적인 명스카우트)는 타격 연습 중인 클레멘테를 보고 한눈에 그의 재능을 알아챘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클레멘테가 보호받지 못하는 보너스 베이비(4,000달러 이상의 계약을 맺은 선수)라는 것도 알게 됐죠. 이에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1954년 겨울 룰 5 드래프트 1순위로 클레멘테를 지명했습니다.
피츠버그에 지명될 당시 클레멘테는 푸에르토리코 겨울리그의 산투르세 칸그레헤로스에서 뛰며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있었는데요. 1954-55시즌 산투르세에는 뉴욕 자이언츠를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고 내셔널리그 MVP로 선정된 윌리 메이스가 합류했고, 클레멘테는 메이스와 함께 산투르세를 리그 1위에 이어 캐리비안 시리즈(쿠바, 베네수엘라, 파나마, 푸에르토리코 1위 팀들의 토너먼트)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캐리비안 시리즈를 마친 후 1955년 3월, 클레멘테가 스프링 캠프에 합류했을 때 피츠버그는 외야수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따라서 클레멘테는 외야 한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했는데요. 스프링 캠프 첫 주가 지나자, 피츠버그의 감독 프레드 헤이니는 "클레멘테는 달리고, 던지고, 때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그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피츠버그 최고의 외야수 프랭크 토마스가 연봉 협상에서 마찰을 빚으며 캠프 합류가 늦어지자, 클레멘테에게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는데요. 클레멘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합류했습니다. 클레멘테는 메이저리그 데뷔 초기 등번호 13번을 달았지만, 이후 21번으로 교체했고 은퇴할 때까지 유지했습니다. 21번인 이유는 본명(Roberto Clemente Walker)이 21글자이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피츠버그 팬들을 매료시킨 미완의 대기
로베르토 클레멘테 / 출처 - MLB.com
클레멘테는 1955년 4월 17일, 브루클린 다저스와 더블헤더 첫 경기에서 우익수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고, 메이저리그 첫 타석부터 내야 안타를 기록한 후 첫 득점까지 올렸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뉴욕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선 첫 홈런을 기록하는 등 데뷔 시즌 첫 한 달간 내셔널리그 타율 1위를 달렸습니다. 또한, 수비에서도 시즌이 1/3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10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피츠버그 팬들을 매료시켰죠.
그러나 클레멘테의 타격 성적은 시즌이 진행될수록 하락하기 시작했는데요. 스트라이크 존에서 벗어난 공에 배트를 너무 많이 낸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죠. 결국 클레멘테는 데뷔 첫해를 124경기에서 121안타 4홈런 47타점 타율 0.255 출루율 0.284 OPS 0.666으로 마쳤지만, 주전 외야 한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클레멘테의 흥미진진한 플레이 스타일이 팬들로 하여금 그를 더 많이 보고 싶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클레멘테는 1956년 타율 0.311 7홈런 60타점 OPS 0.761을 기록합니다. 이해 클레멘테가 기록한 7개의 홈런 중 하나는 시카고 컵스전 9회 말 3점 차 상황에서 나온 끝내기 인사이드 더 파크 만루 홈런이었는데요. 이는 1900년 이후 MLB 역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인사이드 더 파크 만루 홈런 기록입니다. 당시 3루를 돌던 클레멘테는 코치의 정지 사인을 무시하고 홈을 파고들면서 진기록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후 클레멘테는 1957년부터 1959년까지 평균 타율 0.280 5홈런 43타점 OPS 0.698이란 실망스러운 성적을 기록합니다. 하지만 1958년 9월 미국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변곡점이 찾아왔죠. 엄격한 해병대 훈련 프로그램은 그에게 육체적으로 큰 도움이 됐는데요. 클레멘테는 훈련 과정에서 체중을 10파운드(약 4.5kg) 정도 늘리면서 근력이 강해졌고, 1954년 자동차 사고로 생겼던 고질적인 허리 통증도 사라졌습니다.
드디어 시작된 최전성기

로베르토 클레멘테 / 출처 - MLB.com
이런 변화는 곧 성적 향상으로 이어졌죠. 클레멘테는 1960년 타율 0.314 16홈런 94타점 OPS 0.815를 기록하며 올스타에 선정됩니다. 피츠버그도 정규시즌 95승 59패(0.617)로 NL 1위에 올랐고, 월드시리즈에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양키스를 꺾고 35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해당 월드시리즈에서 클레멘테는 7경기에서 모두 안타를 때려내는 등 타율 0.310을 기록하며 일약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클레멘테는 1960년부터 1972년까지 13년간 한 시즌(1968년)을 제외하면 모두 3할 타율을 돌파하며 올스타에 선정됐습니다. 또한, 1961년부터 1972년까지 12년 연속 골드글러브에 선정되는 놀라운 수비를 펼칩니다. 특히 1961년 타격코치 조지 시슬러의 조언에 따라 배트를 무거운 것으로 교체하면서 타율 0.351 23홈런 89타점 OPS 0.949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통산 타격왕 4번(1961, 1964-65, 1967년)을 차지합니다.
클레멘테의 최전성기는 일반적으로 1966-67년을 꼽는데요. 클레멘테는 1966년 타율 0.317 29홈런 119타점 OPS 0.896을 기록하면서 커리어 최초이자, 유일한 내셔널리그 MVP에 선정됩니다 그리고 1967년에는 타율 0.357 23홈런 110타점 OPS 0.954로 개인 통산 최고 타율을 경신하며 커리어 4번째이자, 마지막 타격왕을 차지합니다. 이 해는 클레멘테가 커리어 최초로 4할 출루율을 달성한 해이기도 합니다.
이듬해인 1968년 클레멘테는 타율 0.291 18홈런 57타점 OPS 0.838을 기록하며 3할 타율 달성에 실패합니다. 1968년 2월 푸에르토리코의 자택에서 넘어져 오른쪽 어깨를 다치면서 배트를 휘두르는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었죠. 어깨가 낫지 않으면 야구를 그만둘 수도 있을 만큼 심각한 부상이었는데요. 하지만 건강을 회복한 클레멘테는 1969년 타율 0.345 19홈런 91타점 OPS 0.955를 기록하며 재기에 성공합니다.
두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 그리고 3000안타
로베르토 클레멘테 / 출처 - MLB.com
클레멘테는 1970년 타율 0.352 14홈런 60타점 OPS 0.963을 기록합니다. 하지만 클레멘테는 9월부터 허리 부상으로 거의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NLCS에서도 타율 0.214 0홈런 1타점에 그쳤습니다. 소속팀 피츠버그 역시 정규시즌 NL 동부지구 1위를 차지했으나, NLCS에서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3연패를 당하며 월드시리즈 진출이 무산됩니다. 이 해는 피츠버그가 포브스 필드에서 치른 마지막 시즌이기도 했죠.
새 홈구장 스리 리버스 스타디움에서 첫해인 1971년 클레멘테는 타율 0.341 13홈런 86타점 OPS 0.871으로 여전한 활약을 펼쳤고, 피츠버그도 정규시즌 97승 65패(0.599)로 NL 동부 1위를 차지합니다. 클레멘테는 NLCS에서 타율 0.333을 기록하며 팀을 월드시리즈 무대에 올려놨고, 월드시리즈에서 볼티모어를 상대로 타율 0.414 2홈런 4타점 OPS 1.210을 기록하며 피츠버그의 우승을 이끌고 월드시리즈 MVP에 선정됩니다.
1972년 37세의 클레멘테는 바이러스성 장염과 발꿈치 염좌에 시달리면서도 102경기에서 타율 0.312 10홈런 60타점 OPS 0.835를 기록했고, 9월 30일 경기에서 통산 3,000번째 안타를 때려냈습니다. 이는 그의 정규시즌 마지막 안타이기도 했죠. 그리고 10월 3일 피츠버그의 마지막 정규 시즌 경기에서 9회 초 우익수로 교체 출전하면서 통산 2433경기로 호너스 와그너와 함께 피츠버그 구단 최다 출전 경기 공동 1위에 오릅니다.
클레멘테는 NLCS 5경기에서 타율 0.235 1홈런 2타점 OPS 0.821을 기록했고, 피츠버그는 2승 3패로 신시내티 레즈에 패했습니다. 시즌 종료 후 평소처럼 푸에르토리코로 돌아간 클레멘테는 선수로서 윈터리그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니카라과 아마추어 야구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푸에르토리코 대표팀의 감독을 맡으며 토너먼트 3위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니카라과에 강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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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클레멘테는 즉시 구호품을 모아 항공편으로 니카라과에 보냈는데요. 하지만 클레멘테는 자신이 보낸 구호품이 부패한 관리들 때문에 지진 피해자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따라서 클레멘테는 구호품을 실은 항공편에 직접 동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밤 9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출발한 비행기는 이륙 직후 엔진 고장으로 푸에르토리코 이슬라 베르데 해안에서 1마일 떨어진 대서양에 추락했습니다.
수색 및 구조 활동이 즉시 시작됐지만, 며칠 후 클레멘테를 포함한 탑승객 5명이 전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야구 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클레멘테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클레멘테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니카라과 지진 피해자들을 위한 구호 단체가 그의 이름으로 설립됐고,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기부에 동참하면서 기부금 35만 달러가 지진 피해자들에게 전달됐습니다.
클레멘테가 남긴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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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은 일반적으로 현역에서 은퇴 후 최소 5년이 지나야 투표 자격이 주어지지만 클레멘테는 예외였습니다. 1973년 3월 20일, 미국 야구기자 협회(BBWAA)는 명예의 전당 특별 투표를 실시했고, 클레멘테는 전체 424표 중 393표를 획득해 92.7%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죠. 이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 선수로서는 최초의 기록입니다. 피츠버그는 클레멘테의 등번호 2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1973년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매년 뛰어난 스포츠맨십을 발휘하고, 지역 사회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선수에게 주어지는 상인 커미셔너 특별상(Commissioner's Award)의 명칭을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으로 바꿨습니다. 클레멘테는 선수 생활 내내 자선 활동을 위해 많은 시간을 쏟았는데요. 그가 가장 많은 투자를 한 프로젝트 중 하나는 고국인 푸에르토리코의 소외 계층 청소년을 위해 스포츠 센터를 건립하는 것이었습니다.
클레멘테는 인터뷰에서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아이들을 위해 스포츠 센터를 만드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는데요. 그의 사망 이후엔 부인 베라 클레멘테가 프로젝트를 이어받았고, 이 센터는 많은 푸에르토리코의 프로야구 선수들을 배출했습니다. 클레멘테는 세상을 떠났지만, 야구계에 많은 유산을 남겼습니다. 피츠버그의 홈구장 PNC 파크에 있는 그의 동상 아래엔 ‘위대한 사람(The Great One)’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