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질투한 남자 ‘그랜트 힐’

신이 질투한 남자 ‘그랜트 힐’
다시 쓰는 ‘그랜트 힐’의 코트 위 스토리

2003년 봄. 미국의 TV 화면에는 코비 브라이언트(Kobe Bryant)가 이끄는 LA 레이커스의 4연패 달성 가능성과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대량살상무기(WMD)’를 명분으로 감행한 이라크 침공 소식이 연일 보도되고 있었다.

ⓒ Duke Surgery
같은 시각 ‘듀크 대학교 메디컬 센터(Duke University Medical Center)’의 병실에는 발목 재건 수술을 앞둔 한 남자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는 이번이 몇 번째 수술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누가 TV를 켜두었는지 연신 “코비!”를 외치는 해설자의 음성이 흐릿하게 들려올 뿐이다. 이윽고 그는 수술실로 옮겨졌다. 천장의 형광등 불빛이 번지듯 퍼지고 눈꺼풀은 무거워진다. 마취과 의사가 숫자를 세어보라고 말했지만, 셋쯤에서 이미 숫자를 놓친 것 같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 그 순간 코트 위에서 자신이 통제하던 모든 감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민첩한 스텝, 점프 타이밍, 착지의 감각까지.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떠오를 즈음 그는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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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괴롭히던 부상이라는 악마와의 전쟁. 국가 간의 패권 전쟁. 그리고 4연패를 향한 코트 위의 전쟁까지.
2003년의 봄은, 모두가 저마다의 전쟁을 치르던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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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대에 누워있던 남자의 이름은 그랜트 힐(Grant Hill).
그 시절 힐은 ‘잊혀진 계절’ 같은 존재였다.
고대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자랑하는 것을 금기시했다고 한다. 행복을 자신만의 특권이라고 여기는 신들이 인간을 보고 질투하거나 분노할까 봐. 자신들과 같아지려는 인간들을 벌할까 봐.
그런 신의 눈에는 그랜트 힐이 눈엣가시였나보다.

ⓒ Grant Hill
힐은 댈러스의 유복한 가정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를 졸업한 엘리트이자 NFL 슈퍼스타였던 캘빈 힐(Calvin Hill). 그의 어머니 자넷 힐(Janet Hill) 역시 명문 여대인 웰즐리 칼리지(Wellesley College)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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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듀크 대학교(Duke University)에 입학한 힐은 고교 올-아메리칸 출신답게 곧바로 최정상급 농구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 잡았다. 듀크 대학교 블루 데블스(Blue Devils)는 힐의 1·2학년 시즌에 NCAA(National Collegiate Athletic Association) 챔피언십 2연패를 달성했고, 4년 동안 118승 23패라는 학교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시니어 시즌에는 ACC(Atlantic Coast Conference)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며, 4시즌 중 세 번째 NCAA 파이널 포(Final Four) 진출을 이끌었다. 1994년 힐은 듀크 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사(B.A.)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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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스타의 자격을 갖춘 힐은 1994년 NBA 드래프트 전체 3순위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지명됐다. 루키 시즌에 경기당 19.9득점, 6.4리바운드, 5어시스트, 1.8스틸을 기록하며, 제이슨 키드(Jason Kidd)와 함께 NBA 신인왕(Rookie of the Year)을 공동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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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은 미국 4대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신인 시즌에 올스타 팬 투표 1위를 기록한 선수가 되기도 했다. 이듬해에도 그 기록은 반복됐다. 1995-96시즌 72승 10패의 시카고 불스를 이끌던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까지 누른 것이다.
힐은 그의 커리어 첫 6시즌 동안 9,393득점, 3,417리바운드, 2,720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NBA 역사를 다 뒤져봐도 첫 6시즌에서 이 기록을 넘어선 선수는 ▲오스카 로버트슨(Oscar Robertson), ▲래리 버드(Larry Bird), ▲르브론 제임스(LeBron James) 단 세 명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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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은 위대한 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궤도에 있었다. ▲NBA 올스타 7회(1995~1998, 2000~2001, 2005), ▲NBA 올해의 신인상(1995), ▲올-NBA 퍼스트 팀(1997), ▲올-NBA 세컨드 팀 4회(1996, 1998-2000), ▲NBA 올-루키 퍼스트 팀(1995), ▲NBA 스포츠맨십 어워드 3회(2005, 2008, 2010)의 수상 실적 등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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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드림팀(3기)의 일원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당시 마이클 조던은 빠졌지만, 찰스 바클리, 칼 말론, 스카티 피펜, 존 스탁턴, 데이비드 로빈슨 등 베테랑이 함께 했고, 힐을 비롯해 앤퍼니 하더웨이, 샤킬 오닐, 게리 페이튼, 레지 밀러, 하킴 올라주원, 미치 리치먼드가 새 얼굴로 합류했다.
힐은 등번호 5번을 달고 전체 8경기 중 6경기에 나와 총 58득점(평균 9.7점)을 기록했다. 그중 중국과의 경기에서는 19득점, 4리바운드, 5어시스트, 5스틸로 원맨쇼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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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표팀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아르헨티나(98:68), 앙골라(87:54), 리투아니아(104:82), 중국(133:70), 크로아티아(102:71), 브라질(98:75), 호주(101:73), 유고슬라이바(95:69)를 차례로 격파하며 손쉽게 금메달을 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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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은 상대 팀을 도발하거나, 덩크 후 카메라를 향해 근육을 과시하지도 않았다.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는 늘 온화한 미소를 띠었고, 언제나 차분했고 세련된 말만 골라했다. 그 흔한 스캔들도 없었다. 코트 안에서건 밖에서건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코트의 신사’라는 별명이 그냥 붙은 게 아니었다.
조던을 능가하는 인기에 실력이면 실력, 외모면 외모, 거기에 훌륭한 경기 매너까지.
신의 질투를 사기에 충분했다.
신의 미움을 산 힐은 선수 시절 내내 ‘부상’이라는 형벌을 받았다. 힐은 총 11번의 수술을 받았는데, 첫 수술은 1993년 대학 시절 발가락 수술이었다. 2000~2004년까지는 발목 수술만 다섯 번을 했다. 2006년엔 복부 수술, 2년 뒤 2008년엔 맹장 수술, 그리고 커리어 말미에는 무릎 수술까지 받았다. 마치 부상이라는 바이러스가 힐의 몸 안에서 엘리베이터라도 탄 듯 위로 올라갔다 다시 아래로 내려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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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커리어 측면에서 힐의 발목을 잡은 건 실제로 그의 발목이었다. 1999-00시즌이 끝나갈 무렵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의 경기에서 힐은 왼쪽 발목을 크게 다쳤는데, 그 이후로도 휴식 대신 출전을 감행했다. 아니,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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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부터 2000년까지 8시즌 동안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는 단 한 번도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지 못했고, 팀의 리더인 힐은 무언가 보여주어야 한다는 심적 압박을 느꼈다. 특히 FA를 앞둔 상황에서 디트로이트에서의 마지막 플레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팬들에게 제대로 된 보답을 하고 싶었다.

힐의 고군분투 덕에 팀은 플레이오프 티켓을 거머쥐었다. 이어 알론조 모닝(Alonzo Mourning)이 이끌던 마이애미 히트와 만났는데, 이미 힐의 발목 상태는 처참한 수준이었다. 2차전부터는 아예 서 있지 못할 정도로 발목 상태가 나빠졌다. 힐이 시리즈에 나서지 못한 디트로이트는 마이애미에 0:3으로 무릎을 꿇었고, 자신도 수술대에 올라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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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는 불행의 서막에 불과했다. 2000년 4월 클리블랜드 클리닉(Cleveland Clinic)의 존 버그펠드(John Bergfeld)는 힐의 발목 수술을 집도했다.
그리고 2000년 7월, 힐은 올랜도 매직으로 팀을 옮겼다. 계약 규모는 7년 9,300만 달러. 재활 지침 역시 올랜도의 팀 주치의였던 제임스 바넷(James Barnett)에게 보내졌다.
그러나 그해 9월 팀 주치의인 바넷과 그의 아내가 탄 경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는 곧 힐의 재활 과정에 있어서 의료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을 의미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힐은 목발을 짚은 채 9,300만 달러짜리 계약서를 들고 올랜도로 향해야 했다. 힐의 발목 상태로 보아 그해 11월 말 혹은 12월 초까지는 뛰지 말아야 했다. 이는 수술을 집도한 버그펠드의 당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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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시 올랜도 매직 단장이었던 존 가브리엘(John Gabriel)은 NBA 간판스타의 합류에 잔뜩 들떠있었다. 아직 절뚝거리고 통증이 채 가시지도 않은 재활 중인 선수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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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은 고의적인 강요는 없었다고 밝혔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 역시 힐에게 참고 뛰어볼 것을 권유했다. 결국 힐은 트레이닝 캠프와 프리시즌 일정을 소화했다.
힐은 자신의 부상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별일 아닌 건가?”, “그냥 흉터일 뿐인 건가?” 스스로 의심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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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CT 촬영 결과, 발목 뼈가 붙지 않은 ‘불유합’ 상태임이 드러났다. 두 부분은 아물었지만 서로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를 바로잡는 데 3년의 시간이 더 소모됐다.
가브리엘 단장도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발목 전문의를 수소문했다. 힐은 수술 집도를 전적으로 구단에 맡겼다. 구단은 두 차례 수술을 더 진행했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힐은 결국 다시 듀크 대학교 메디컬 센터로 돌아갔다.
듀크 대학교 메디컬 센터의 정형외과 책임자였던 제임스 넌리(James Nunley)는 발 뒤꿈치 뼈 일부를 제거해 발목에 가해지는 압력을 줄였다. 그리고 한 시즌을 통째로 쉬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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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이후 올랜도에서 회복 중이던 힐은 어느날 몸이 쑤시고 기운이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4일째 되던 날, 그는 쇼크 상태에 빠져 경련을 일으켰다. 힐의 아내 타미아(Tamia)가 응급실로 차를 몰고 가는 동안 그는 좌석에서 고통에 몸부림쳤다.
의사들은 스태프(staph) 감염을 의심했다. 스태프의 정식 명칭은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 이 박테리아는 피부에 상처가 생기기 전까지는 무해하지만, 일단 작은 틈이라도 생기면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무서운 녀석으로 돌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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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MLB의 새미 소사(Sammy Sosa)와 알렉스 리오스(Alaex Rios), NBA의 샤킬 오닐(Shaquille O’Neal), 블레이크 그리핀(Blake Griffin) 등도 스태프에 감염된 적이 있다.
힐의 발목을 감싸고 있던 붕대를 풀어헤치자 절개 부위에는 커다란 구멍이 보였다. 힐은 상처 부위를 휴대전화로 찍어 주치의에게 보냈다. 그리고 즉시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일주일간 입원한 힐은 6주 동안 치료에 전념해야 했고, 팔에서 떼어낸 피부를 상처에 이식하기도 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힐은 또다시 병원에 실려 갈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은퇴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고 한다.
팀을 위한 선의에서 비롯된 잘못된 판단과 계속된 불운으로 힐의 발목은 빠르게 소모되었다.
힐은 애초에 약한 발목을 갖고 태어난 것일까? 찰스 바클리(Charles Barkley)의 생각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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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클리는 어느 TV 쇼에서 “힐이 나이키(NIKE)가 아닌 휠라(FILA) 농구화를 신었기 때문에 부상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휠라는 1994년 힐과 스폰서십을 체결했는데 이 계약은 2004년까지 계속됐다.
테니스 코트를 주무대로 하던 휠라는 1994년 본격적으로 농구시장에 뛰어들었는데, 힐 외에 크리스 웨버(Chris Webber), 케빈 존슨(Kevin Johnson), 제리 스택하우스(Jerry Stackhouse) 등과도 스폰서십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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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의 인기 덕에 휠라는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휠라는 테니스·라이프스타일 브랜드였기에 나이키·아디다스·리복 등 기존 브랜드에 비해 기술적 한계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렇다고 힐의 부상에 대한 모든 책임을 휠라에 돌리기에도 무리가 있다.
신발과 부상 사이의 인과관계는 밝혀진 바 없고, 힐도 2018년 휠라와 다시 평생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NBA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함께한 브랜드라며, 다시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드러냈다.
힐은 자신의 부상을 일종의 연쇄 사고였다고 말한다. 운동선수들은 늘 ‘뛰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데, 그도 스스로에게 그 압박을 가했다는 것이다.
선수들에게 시즌을 치른다는 건 통증, 불편함, 근육통을 참거나 관리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힐은 “다친 거냐(hurt), 아니면 부상당한 거냐(injured)?”라는 질문을 계속 던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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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힐은 부상보다 올랜도에서의 생활이 더 괴로웠던 것 같다. 훗날 힐은 “그곳으로 매일 출근하며 자신을 실패자로 여기는 사람들 곁에 있는 게 더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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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에 갓 입성했을 때, 팀의 선배였던 오티스 소프(Otis Thorpe)가 힐에게 이런 충고를 했다고 한다.
네가 그걸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오티스 소프(Otis Thorpe)
힐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닫는 데 19년이 걸렸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가 아닌 전문가의 의견만 신뢰한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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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힐은 후배들에게 몸이 하는 말을 들으라고 강조한다.
쉬어도 되고, 앉아도 되고, 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선수는 귀중한 자원이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는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프랜차이즈 역사상 가장 암울한 3년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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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 보이즈(Bad Boys)’의 핵심 멤버였던 아이제이아 토마스(Isiah Thomas)는 기량이 다했고, 빌 레임비어(Bill Laimbeer)는 은퇴했으며, 데니스 로드맨(Dennis Rodman)은 제멋대로였다.
1993-94시즌 NBA 최하위 공동 2위였던 디트로이트는 1순위 지명권을 얻을 확률이 16.4%였다. 당시엔 플레이오프 탈락 팀을 대상으로 드래프트 우선순위를 추첨으로 정하던 시기였다.
디트로이트와 같은 성적을 거둔 밀워키 벅스가 1순위, 댈러스 매버릭스가 2순위, 디트로이트는 3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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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워키는 글렌 로빈슨(Glenn Robinson)을, 댈러스는 제이슨 키드(Jason Kidd)를 지명했고, 디트로이트는 예상대로 힐을 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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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1월 4일은 힐이 데뷔전을 치른 날이다. 이날 힐은 25득점·10리바운드·5어시스트·3블록을 기록하며 슈퍼스타의 탄생을 예고했다.
힐은 디트로이트의 구세주. 아니, 마이클 조던의 빈자리를 책임져줄 리그 전체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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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 안과 밖은 빠르게 ‘조던’에서 ‘힐’로 대체되었다.
힐은 불과 1년 만에 휠라(FILA)를 비롯해 스프라이트(Sprite), 켈로그(Kellogg’s Cereal), 쉬크(Schick) 면도기, 제너럴 모터스 GMC 트럭, 스팔딩(Spalding) 농구공 등 수많은 브랜드의 모델이 되었다.

ⓒ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스틸컷
힐의 인기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대만·일본 등 아시아권에서도 뜨거웠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대만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서도 힐의 인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당시 NBA 카드 수집이 큰 인기였는데, 친구들끼리 그랜트 힐의 카드를 뽑았다고 자랑하는 장면이 등장할 정도다.
트리플 더블을 밥 먹듯 기록하는 올라운드 플레이어, 훌륭한 외모, 코트 안팎에서의 단정한 품행, 유창한 말솜씨 등 기존의 거친 NBA 캐릭터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중·고등학교 남학생들 사이에서 힐은 일상이 되었다.
ⓒ The New York Times
힐은 커리어의 첫 여섯 시즌을 디트로이트에서 보냈는데, 팀은 1996-97시즌부터 로고와 유니폼 디자인을 바꿨다. 불을 뿜는 말(horse) 머리가 유니폼의 중앙을 차지했다. 자동차 산업이 발달한 디트로이트의 ‘마력(horsepower)’을 상징하는 디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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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옷을 입은 디트로이트는 힐과 조 듀마스(Joe Dumars), 린제이 헌터(Lindsey Hunter)를 내세웠고, 테리 밀스(Terry Mills)와 오티스 소프(Otis Thorpe)는 골밑을 지탱했다. 마력 덕분이었을까? 그해 팀은 54승을 거뒀는데, 이는 배드 보이즈 시절 이후 최고 성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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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애틀랜타 호크스에 패했다. 2년 연속 1라운드 탈락이었다. 힐이 디트로이트에서 뛴 6시즌 동안 4번이나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매번 1라운드를 넘기지 못했다.
힐은 한계를 느꼈다. 힐의 올랜도 이적 결정은 당시로서는 충분히 이해되는 선택이었다. 올랜도 매직(Orlando Magic)에서는 무언가 마법(Magic) 같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Orlando Sentinel
하지만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자신이 쌓은 커리어에 ‘명복’을 빌어야 하는 일들만 일어났다.
부상으로 인해 유니폼이 아닌 양복을 입고 벤치에 앉아있는 모습이 더 많았다. 힐은 올랜도에서 보낸 첫 4시즌 동안 총 47경기밖에 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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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은 스태프 감염으로 목숨을 잃을 뻔한 후 2003-04시즌 전체를 결장했다. 반면 그해 디트로이트는 아이러니하게도 NBA 챔피언에 올랐다.
힐은 올랜도 시절 말미에 반등했으나, 이미 7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힐은 어릴 적부터 워싱턴 불리츠(現 위저즈)의 경기를 즐겨봤다. 커리어 초반에도 워싱턴과의 어웨이 경기를 특히 즐겼다. 언론은 힐의 다음 행선지로 워싱턴을 꼽았지만, 그의 선택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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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 이력이 있는 선수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던 피닉스 선즈였다. 피닉스의 의료진은 선수의 몸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봤고, 예방 의학의 개념이 강했다고 한다. 끊임없이 몸의 불균형을 점검했고, 발견 즉시 교정에 들어갔다.
예를 들어, 종아리가 아픈 경우 실제 원인은 반대편 엉덩이가 뻣뻣한 데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접근했다. 특히 사소한 잔부상이 큰 부상으로 이어지는 걸 미연에 방지하는 데 주력했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 스티브 내쉬(Steve Nash)와 샤킬 오닐(Shaquille O’Neal)도 피닉스 의료진 덕분에 제2의 농구 인생을 살 수 있었다.
힐은 ‘1년 190만 달러’라는 초라한 금액에 피닉스와 계약했다. 계약 당일 피닉스 의료진과 2시간 30분에 걸친 정밀 검진을 받았는데,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힐은 눈물을 터뜨릴 뻔했다고 한다. 마침내 제대로 된 케어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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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은 피닉스(Phoenix)라는 도시 이름에 걸맞게 불사조(Phoenix)처럼 부활에 성공했다. 기량이 회복된 힐을 보고, 그 다음 해엔 뉴욕 닉스와 보스턴 셀틱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힐은 피닉스의 의료진과 트레이너들 때문에라도 팀을 옮기지 않았다. 힐은 식단을 바꾸고 침술 치료를 받으며 매일 신체의 불균형을 점검하는 피닉스의 시스템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다른 선수들이 득점과 리바운드에 욕심낼 때 힐의 목표는 출전 시간에 있었다. 그저 코트에서 오래 뛰는 것. 힐은 2008-09시즌 82경기를 모두 소화했고, 2009-10시즌에는 81경기, 2010-11시즌에도 80경기를 뛰는 괴력을 선보였다. 3년간 평균 81경기를 소화한 힐.
힐의 기존 개인 최다 출전 기록은 1997-98시즌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서 25세의 나이로 기록한 ‘81경기’였다. 이 기록을 37세가 되어 다시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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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서부 콘퍼런스 파이널 무대에서는 2003년 자신이 누워 있던 병실 침대맡에서 들려오던 그 이름의 선수(코비 브라이언트)를 직접 전담 수비하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그간의 부상들은 힐을 젊게 만들었다. 부러진 발목으로 경기를 뛰지 못한 덕분에 관절과 인대는 오히려 더 싱싱(?)해진 것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격리되지 않았다면, 코비 브라이언트를 전담마크하는 힐의 모습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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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힐의 ‘81경기’ 출전은 코비의 한 경기 최다 득점인 ‘81득점’ 기록보다 더 위대한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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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피닉스의 감독 알빈 젠트리(Alvin Gentry)의 딸은 그런 힐에게 이런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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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Benjamin Button).
결국 힐은 시간을 거꾸로 되돌렸고, 마침내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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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만큼의 폭발적인 스피드는 잃었지만, 그래도 힐은 힐이었다. 얼굴도 그대로였다.
1997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서의 모습과 2009년 피닉스 선즈에서의 모습을 비교해 봐도 다른 점이라곤 유니폼 색깔뿐이다.
힐은 부상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힐은 한때 왼쪽 발목을 내려다보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그 발목은 힐의 젊음을 앗아갔고, 그의 전성기와 커리어까지 박살냈다. 한때 그를 분노케 했지만 미워할 수 없는 애증의 존재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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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은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을 목표로 플레이하지 않았다.
주연에서 조연으로, 피사체에서 배경으로. 그렇게 힐은 동료 선수들의 배경이 되는 기쁨을 택했다.
그의 이름(Hill)처럼 높은 산이 되기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작은 언덕(Hill)이 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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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의 팬이라면, 1997년 4월 7일 마이애미 히트와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경기를 기억할 것이다. 그날 힐은 알론조 모닝과 신경전을 벌였다.
두 선수는 몸싸움 끝에 함께 넘어졌고, 이어진 다음 플레이에서 힐은 자신을 수비하던 댄 멀리(Dan Majerle)를 가볍게 따돌리고 모닝에게 돌진해 그의 머리 위로 덩크를 내리꽂았다.
힐의 부상은 그만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 아니었다. 흐릿한 유튜브 영상으로 이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당시 팬들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는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더 이상 이런 힐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슬픔과 안타까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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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 조던’으로 불리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그랜트 힐은 더 이상 없었다.
신이 그의 모든 걸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 Grant Hill
하지만 신이 힐에게서 빼앗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농구를 향한 그의 순수한 열정.
힐은 코트 밖에 있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농구를 사랑하는지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힐은 이렇게 덧붙인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난 이 일이 일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힐은 마침내 자신의 발목과 화해한 듯 보였다.
다섯 차례의 발목 수술, 포도상구균 감염, 끝이 보이지 않던 긴 재활의 시간, 수많은 좌절과 자기 성찰의 순간들.
‘신의 질투’라고 여겨지던 이 모든 과정은 힐에게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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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심리적 장애물을 극복하고 기적에 가까운 복귀에 성공한 힐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더 이상 과거의 ‘그랜트 힐(Grant Hill)’이 될 수는 없었지만,
그 시련들은 그를 ‘그레이트 힐(Great Hill)’로 재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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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의 판정승. 우리는 고난을 마주하는 힐의 태도 앞에서 처음으로 신의 패배를 지켜봤다.
그게 아니라면, 그의 발목 부상은 ‘신의 질투’가 아닌 ‘신의 시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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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마지막으로 몸담은 팀은 LA 클리퍼스. 힐은 40세까지 코트를 누볐고, 원한다면 더 뛸 수도 있었다. 하지만 2013년 6월 1일 힐은 스스로 19년 코트 인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힐은 은퇴 후 마음속으로 이런 말을 자주 되뇌었다고 한다.
나는 내가 무엇을 이겨냈는지 안다.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위해 무엇과 싸웠는지 알고 있다.
그게 나에게 더 중요하다.”
그리고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발신인은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Naismith Memorial Basketball Hall of Fame) 회장인 존 돌레바(John Doleva)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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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신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2018년 4월 1일 힐을 명예의 전당에 입성시켰다.
참고로 힐은 2016년 모교인 듀크 대학교의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된 바 있다(2003년 : 33번 영구결번).
NBA에서 ‘만약’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소환되는 선수 그랜트 힐.

ⓒ NBA.com
힐은 은퇴 후 NBA TV의
그리고 힐은 두 딸 마일라(Myla), 레일(Lael)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어느 날 마일라가 유튜브에서 힐의 전성기 시절 하이라이트 영상을 찾아보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Oh dad, you weren’t always a scrub.”
그의 플레이를, 그의 이름을, 그의 등번호를 기억하는 팬들이 줄어드는 건 슬픈 일이다.

ⓒ Earvin Magic Johnson
힐은 매직 존슨(Magic Johnson)을 좋아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까지 존슨의 등번호인 ‘32번’을 달았다. 하지만 대학에 가니 크리스찬 레이트너(Christian Laettner)가 이미 ‘32번’을 선점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선수 시절 등번호였던 ‘35번’을 달려고 했지만, 그 번호 역시 이미 대니 페리(Danny Ferry)의 영구결번이었다. 그래서 힐은 그 중간 숫자인 ‘33번’을 선택했다.
그때부터 ‘33번’과의 동행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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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피닉스로 팀을 옮기고 힐은 다시 한번 고민에 빠졌다. 1988년 피닉스 구단이 이미 알반 애덤스(Alvan Adams)가 쓰던 ‘33번’을 영구결번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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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애덤스는 힐이 피닉스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꺼이 ‘33번’을 내어주기로 했다.
<33번>은 저보다 구단과 팬들, 그리고 피닉스 선즈의 역사에 더 속한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힐이 피닉스 선즈에 잘 적응하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전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 알반 애덤스(Alvan Adams)

ⓒ NBA
카림 압둘자바부터 래리 버드, 패트릭 유잉, 스카티 피펜까지 수많은 별들이 NBA에서 ‘33번’을 달고 뛰었지만 누가 뭐래도 ‘33번’은 ‘그랜트 힐’의 등번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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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힐의 커리어를 아쉬워하는 팬들이 많다. 등번호 33번을 달았던, 휠라 농구화를 신었던, 발목 부상을 당했던, 추억의 ’90년대 스타 정도로만 기억하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힐을 ‘패배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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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가 코트 위에서 보낸 19년은 우리가 기억하는 디트로이트에서의 6년보다 훨씬 더 치열하고 애틋했으며 감동적이었다.
ⓒ Grant Hill
한때 그 역시 “만약 그때 X-Ray를 찍어봤더라면…”, “만약 그때 무리하지 않았더라면…” 등과 같은 생각에 사로잡힌 때가 있었다.
‘만약’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하다. 자신을 과거의 영광에 머물게 하며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다행히 힐은 오래전에 ‘만약에(what if)’라는 질문을 멈췄다. ‘마약’보다 더 지독한 ‘만약’을 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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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그랜트 힐’을 떠올릴 때 ‘만약(what if)’이라는 가정법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despite)’라는 전치사가 따라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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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랜트 힐이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훌륭한 커리어를 쌓았을 것이다.”라는 말보다 “그랜트 힐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19년간 코트를 누비며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우리가 알던 ‘그랜트 힐’을 이렇게 다시 써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