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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고 유격수의 침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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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로드리게스는 역사상 가장 화려한 유격수였다. 유일한 50홈런 유격수이며, 696개의 통산 홈런은 배리 본즈(762) 행크 애런(755) 베이브 루스(714) 앨버트 푸홀스(703)에 이은 5위이다.

 

에이로드는 3루수보다 유격수로 더 많은 경기를 뛰었기 때문에 유격수로 분류된다. 에이로드를 제외하면 홈런 역대 1위부터 15위는 모두 1루수 또는 외야수이며(163루수 마이크 슈미트), 유격수보다 1루수로 더 많이 출전한 어니 뱅크스(512홈런 23)를 제외하면, 유격수 2위는 51위인 칼 립켄 주니어(431). 승리기여도(bWAR) 117.4는 투수와 야수를 합쳐 역대 16위이고, 테드 윌리엄스(121.8)와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에이로드는 지난해 발표된 네 번째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37.1%에 그쳤다. 지난해 막차를 탄 빌리 와그너의 4회차 득표율이 16.7%였던 걸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만, 첫 해 득표(34.3%)와 비교했을 때 거의 늘지 않는 것이 문제다. 4회차 득표율이 45.2%였던 로저 클레멘스는 10회차에 65.2%, 역시 4회차가 44.3%였던 배리 본즈는 10회차 득표율 66.0%로 현액 기준인 75.0%를 넘지 못했다.

 

2000년대 판타지 스타였던 에이로드는 왜 이렇게 된 것일까.

 

1996년 그는 1907년 타이 콥(20)1955년 알 칼라인(20)에 이어 세 번째로 어린 나이(21)로 타격왕에 올랐다. 1998년에는 역대 세 번째이자 최연소로 40홈런 40도루를 달성했고, 최초의 50홈런 유격수가 됐다. 1998년부터 2010년까지 기록한 13년 연속 30홈런 100타점은 루 게릭(11년 연속)을 넘어선 역대 최고 기록이었다.

 

200124세 시즌을 마치고 FA가 된 에이로드는 텍사스와 1025200만 달러 계약을 맺어 최초의 2000만 달러 연봉과 2억 달러 총액을 달성했다. 25200만 달러는 1998년 톰 힉스 구단주가 텍사스 구단과 구장을 산 가격보다 200만 달러가 많았다. 2008년에는 양키스와 1027500만 달러 계약을 맺어 자신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에이로드가 1994년 드래프트에 나왔을 때, 에이전트인 스캇 보라스는 입단 보너스로 200만 달러를 요구했다. 하지만 1순위 지명권을 가진 시애틀은 부자 구단이 아니었다. 시애틀이 간신히 100만 달러를 제시하자, 보라스는 대학 진학을 추천했다. 하지만 에이로드는 보라스의 조언을 물리치고 시애틀 유니폼을 입었다.

 

프로행을 택한 이유에는 집안 사정도 있었다. 에이로드는 뉴욕에서 도미니카공화국 출신 재혼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네 살 때 도미니카로 간 가족은 그곳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했고, 그가 8살 때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정착한 곳은 마이애미였다. 하지만 경제적인 능력이 없었던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사라졌다. 에이로드는 힘든 형편에도 칼 립켄 주니어를 보며 최고 유격수의 꿈을 키웠다.

 

최고의 선수가 된 그였지만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켄 그리피 주니어만큼 사랑 받지 못했고, 데릭 지터 같은 아이콘도 되지 못했다. 모범생의 가면을 벗고 즐긴 자유 연예도 지터를 따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텍사스 입단 후 유격수로서 52홈런 135타점, 57홈런 152타점, 47홈런 118타점을 기록한 3년은 충격적인 3년이었다. 하지만 팀이 꼴찌를 헤어나지 못하자 에이로드는 양키스로의 트레이드를 받아들였다. 양키스는 지터가 있기 때문에 유격수를 포기하고 3루수가 된다는 조건이었다. 에이로드는 지터보다 뛰어난 유격수였다. 양키스에서 그는 침범할 수 없는 지터의 존재감을 받아들이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200784일 에이로드는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경기에서 통산 500홈런을 달성했다. 지미 팍스가 가진 만 32338일의 기록을 330일이나 줄인 역대 최연소 500홈런이었다(328). 베이브 루스(714)를 넘을 것이 확실시됐던 에이로드는 2008년 기념 유니폼의 등번호에 ‘Thanks to the Bambino’라고 썼다. 에이로드는 3번이 루스의 영구결번인 양키스로 오면서, 등번호를 3번에서 13번으로 바꿨다. 에이로드에게 남은 건 딱 하나, 월드시리즈 우승이었다.

 

2009년 에이로드는 드디어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그동안의 가을 부진을 털어내고 포스트시즌 통합 MVP에 해당되는 베이브 루스 어워드도 수상했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그는, 명예와 거리가 멀어져 있었다.

 

2003년 사무국과 선수노조는 전수 조사를 해서 금지약물 양성 반응이 5% 이상 나오면 규제를 시작하기로 했다. 명단은 비공개에 부치기로 했다. 양성 반응 선수는 8.7%104명이었다. 그런데 20092SI는 에이로드가 104명 안에 있다는 폭로를 했다. 궁지에 몰린 에이로드는 2001년 텍사스 이적 후 성적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3년 동안 금지 약물을 사용했지만, 양키스 이적 후에는 손에 대지 않았다는 고백을 했다.

 

2013년 에이로드는 또 한 번 약물 파동의 주인공이 됐다. 양키스 이적 후 사용하지 않았다는 해명이 거짓으로 탄로 났기 때문에 첫 번째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마이애미에 위치한 안티에이징 클리닉 회사(바이오 제네시스)의 원장인 앤서니 보시는 자신이 직접 약물을 공급했으며, 에이로드는 12번이나 도핑 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했다는 고백을 했다.

 

두 번째 거짓말은 그를 회복 불가능의 영역으로 밀어 넣었다. 사람들은 2009SI의 폭로 기사에 쓰여져 있었지만 설마 그랬을까 했던, <그가 약물에 손을 댄 건 고등학교 때부터다>는 말을 믿기 시작했다. 본즈는 약물 논란의 시작이 2003년 발코 스캔들이었고, 클레멘스는 2007년 미첼 리포트였다. 구체적인 사용 정황이 확인됐지만 결백을 주장한 둘은, 공식적인 규정 위반으로 인한 징계는 받지 않았다. 반면 에이로드는 211경기 출장 정지를 받음으로써 약물 확정 선수가 됐다.

 

에이로드는 통산 700홈런에 네 개, 그토록 깨고 싶었던 루스의 기록에 18개를 남기고 은퇴를 선언했다. 각 기록을 달성할 때마다 600만 달러를 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양키스가 방출하지 않는 대신 이를 포기했다.

 

본즈가 약물에 손을 댄 건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에 대한 질투가 원인이었다. 1998년 본즈는 메이저리그 최초이자 지금도 유일한 기록인 400홈런 400도루를 달성했다(본즈는 500홈런 500홈런도 달성했다). 하지만 둘의 홈런 대결에 밀려 주목을 받지 못했다.

 

자신을 퇴물로 여긴 보스턴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클레멘스는 1997년 토론토에서 트리플 크라운과 만장일치 사이영상을 따내고 건재함을 증명했다. 하지만 1998년에 기량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약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에이로드가 약물에 손을 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정말로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약물을 했고, 1순위 지명을 받은 것도 그 덕분이었을까.

 

에이로드가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무척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최고의 선수들이 무너지는 고통을 이겨내고, 가장 강력한 약물 규제를 하는 프로 리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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