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으로 완성된 위대함 - 로베르토 클레멘테
단어 단 3개로 이루어진 묘사지만, 로베르토 클레멘테 워커(Roberto Clemente Walker)라는 선수를 제대로 묘사한 수식어라고 여겨집니다. 이렇게 짧을수록 번역이 어렵기도 하지만, AI의 추천도 있고, '존엄으로 완성된 위대함'이라는 의역이 어울릴 거 같습니다.

"클레멘테는 야구로 유명해졌지만, 야구 때문에 위대해진 사람은 아니었다."라는 표현도 그에게 적절한 거 같습니다.
MLB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선수 중 하나이며, 외국 선수이면서도 지금까지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야구팬들이 연말이면 추모의 마음을 갖게 되는 '위대한 마음' 클레멘테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소개합니다.
우리가 '로베르토 클레멘테'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그는 1934년 8월 18일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의 캐롤라이나라는 곳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7남매 중 막내라는 기록도 나오는데, 어머니가 첫 번째 결혼에서 나은 3명의 아이도 함께 살았기 때문입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그는 형들과 사탕수수농장 반장이던 아버지를 도우며 컸습니다, 야구를 비롯한 운동은 모두 좋아했고, 고교 시절까지는 높이뛰기와 창던지기 학교 대표로도 뛰었습니다. 특히 잘 성장하면 창던지기 국가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던 기대주였습니다. 후에 클레멘테는 창던지기 훈련을 하면서 야구 선수로서의 강한 어깨를 키웠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나 야구에 빠진 클레멘테는 지역 소프트볼 팀에서 유격수로도 뛰다가 스카우트 눈에 띄어 18세에 지역 세미프로팀과 계약을 하게 됩니다.
야구 선수 클레멘테는 강력한 어깨와 빠른 발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수비와 그리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공 맞히는 재주가 있는 선수로 역사가 기억합니다.
60년대 최고의 좌완 투수이던 샌디 코팩스는 "클레멘테는 야구 선수 중에 가장 이상한 타자다. 그를 공략할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하면 또 전혀 다른 방법으로 결정타를 날리곤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MLB 역사상 최고의 좌완 투수로까지 꼽히는 코팩스에게서 그 이상의 찬사를 받은 타자가 있었을지.
클레멘테가 처음 빅리그 스카우트들의 눈에 띈 것은 1953년 푸에르토리코 윈터리그였습니다. 빅리그 스타로 떠오르던 뉴욕 자이언츠의 윌리 메이스와 함께 산트루세 크라베르스라는 팀에서 뛰던 만 18세의 클레멘테는 빨랫줄 같은 송구 능력이 눈에 확 띄었고, 게다가 3할5푼6리의 타력까지 뽐냈습니다.
당시 다저스 스카우트였던 알 캠퍼니스(후에 단장까지 올랐던 입지전적인 인물로 생방송 TV 토크쇼에서 흑인 차별적인 발언으로 단장에서 물러나야 했다.)는 1953년 말 사이닝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사이닝 보너스 1만 달러에 클레멘테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다저스에는 재키 로빈슨, 듀크 스나이더, 칼 퍼릴로 등 막강한 외야진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다저스는 고민 끝에 클레멘테를 일단 마이너리그 몬트리올 로열스로 배속했는데, 결국 그것이 그의 야구 인생을 바꿔놓게 됩니다.
당시 규정은 4,000달러 이상의 사이닝 보너스를 받은 신인 선수는 적어도 첫 2년간은 빅리그 로스터에서 뛰어야 했습니다. 부자 팀이 좋은 선수를 줄줄이 사 모으는 것을 방지하려는 일환이었습니다. 만약 1군에서 뛰지 않는다면 해당 선수는 시즌이 끝난 뒤 다른 팀의 '포스트시즌 드래프트'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즘의 룰5드래프트 유사한 규정입니다.
다저스는 클레멘테를 숨기기 위해 많은 수단을 동원했다고 하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법.
당시 최약팀이던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브랜치 리키 회장(바로 다저스에서 재키 로빈슨을 계약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이 포스트시즌 드래프트 1번으로 클레멘테를 지명했습니다. 피츠버그 스카우트가 다른 선수를 보러 갔다가 클레멘테를 보자마자 '보물을 발견했다'라고 곧바로 보고서를 올린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클레멘테는 다저스의 영웅이 아닌 파이어리츠의 영웅이 됩니다.
만약 다저스에 있었더라면 자신의 우상이던 재키 로빈슨과 함께 외야를 지킬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클레멘테는 1955년 곧바로 파이어리츠의 우익수 자리를 맡으며 빅리그에 뛰어들었습니다.
첫 시즌에는 마이너에서의 허리 부상 여파도 있었고 2할5푼5리-5홈런-47타점으로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2년차이던 1956년에 3할1푼1리로 리그 타격 3위에 오르면서 가파른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는 만 21세. 그리고 그 후 13시즌이나 타율 3할 이상을 기록하며 파이어리츠의 간판타자이자 팬들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스타로 활약했습니다.
그의 각종 기록은 참 화려합니다.
1961년 첫 골드글러브를 수상한 이래 1972년 마지막 시즌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최고의 외야 수비수로 선정됐습니다. 12번 올스타에 뽑혔고, 1966년에는 3할1푼7리-29홈런-119타점으로 NL MVP를 수상했습니다.
1960년과 1971년 월드시리즈(WS) 우승의 주역이었고, 1971년에는 WS MVP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클레멘테가 출전한 두 번의 WS에서 피츠버그는 계속 7차전의 혈전을 치렀는데 그는 14게임 연속 안타의 기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NL 타격왕도 네 차례나 차지한 클레멘테는 MLB 사상 11번째로 3,000안타를 돌파한 선수가 됐습니다. 은퇴 당시 클레멘테는 안타수(26위) 3루타(27위) 단타(27위) 고의 볼넷(25위)을 비롯해 타율(62위) 출전게임(62위) 타수(37위) 득점(72위) 총루타수(36위) 타점(89위) 출루율(66위) 등 홈런을 제외한 거의 전 부문에서 역대 50위 또는 100위권에 드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로베르토는 통산 240홈런을 쳤으니 펀치력도 상당했습니다.
그러나 한 시즌 최다가 29홈런이었으니 전형적인 슬러거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꾸준한 노력으로 펀치력을 키웠던 그는 극적인 홈런을 종종 때리며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만 19세에 첫 미국 마이너리그 생활을 했던 클레멘테는 첫 시즌에 홈런을 딱 2개 쳤습니다.
그런데 생애 첫 홈런은 경기 후반 대수비로 들어갔다가 연장전 끝내기 홈런이었고, 두 번째는 자신의 스무 번째 생일에 역전 홈런을 친 후 9회에 홈으로 달려들던 상대 주자를 끝내기 외야 어시스트로 잡아내며 1점차를 지킨 경기였습니다.
빅리그에서 로베르토의 가장 극적인 홈런은 1956년 7월 25일 시카고 컵스전에서 터졌습니다.
3점차로 뒤진 가운데 9회말 피츠버그는 만루의 기회를 잡았고, 클레멘테는 상대 투수 짐 브로스넌을 공략해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으로 경기를 끝냈습니다. 1900년 이후 MLB 야구에서 끝내기 만루 장내홈런을 친 유일한 선수가 클레멘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를 박애주의자이자 늘 사랑과 봉사를 실천한 인물로 더욱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클레멘테는 항상 없는 자들을 위해 마음을 다해 일했습니다. 어린이들을 몹시 아꼈고, 그들에게 운동과 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프시즌이면 아무리 바빠도 조국의 아이들을 위한 야구 교실을 빼놓지 않고 열었습니다. 그리고 휴식기 시간 대부분을 사회에서 외면당한 사람들을 위해서 자선 행사와 봉사활동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물론 조국 푸에르토리코의 윈터리그 역시 거의 빠지지 않고 참가했습니다.
당시는 프로 선수들의 봉사나 사회 환원 같은 개념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가정 교육의 영향도 컸습니다. 어려서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성실한 삶을 살았던 그의 부모님은 '가진 사람이 나누는 건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가치관을 아이들에게 심어줬고, 클레멘테는 누구보다 그것을 몸으로 마음으로 그리고 경제력을 써가며 실천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클레멘테가 아쉽게 짧은 생애를 마친 것도 1972년 12월 31일 지진이 난 니카라과에 구호물자를 싣고 가던 비행기 안이었습니다.
구호품을 독재 정권이 빼돌린다는 소식을 접한 클레멘테는 '그렇다면 내가 직접 가서 난민들에게 구호물자를 전달하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는 너무 낡았고, 구호품을 너무 많이 실었습니다.
1972시즌 결과적으로 자신의 마지막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정확히 3000번째 안타를 때려낸 로베르토는, 불행이 덮친 곳에 구원의 손길을 주기 위해 날아가다가 비행기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비행기가 산악 지대에 추락해 시신도 찾지 못했습니다.
푸에르토리코 선수들에게는 특히 영원한 영웅인 그는 야구계에 참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양키스의 스타였던 버니 윌리엄스는 "푸에르토리코에서 자라면서 클레멘테라는 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의 한 명이었음을 물론이고, 또한 정말 위대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1회 WBC 대회에서 푸에르토리코 대표팀은 거포 카를로스 델가도에게 21번 배번을 주었지만, 델가도는 '국가대표의 21번은 영원히 클레멘테의 번호'라고 이를 거절하기도 했습니다.
로베르토 클레멘테 워커의 스펠링이 스물 한자였기에 그 번호를 달았다는 21번은 MLB를 아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낭만과 아쉬움이 그득한, 늘 그리운 번호입니다.
MLB에서는 매년 한 선수에게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을 수상합니다.
MLB는 1971년에 시즌 동안 가장 활발하게 사회활동과 봉사활동을 펼친 한 선수에게 주어지는 상을 제정했는데, 1973년부터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으로 명명했습니다. MVP상 못지않게 선수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상입니다.

푸에르토리코의 산후안에 있는 가장 큰 운동장의 이름은 '로베르토 클레멘테 콜럿시움'입니다. 그의 고향인 캐롤라이나에는 '로베르토 클레멘테 스포츠시티' 라는 체육 시설이 있습니다. 평소 그의 소원대로 어린이들이 좋은 시설에서 마음껏 스포츠를 즐기고 배울 수 있는 곳입니다. 물론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그 도시에 있습니다.
미국 곳곳에도 그의 이름을 딴 공원이나 학교, 체육 시설들이 많습니다.
뉴욕 주는 클레멘테의 사망 직후 한 주립공원의 이름을 '클레멘테 파크'로 정했고, 마이애미에도 히스패닉 거주지역에 '클레멘테 공원'이 있습니다. 미국 내에 중남미계 주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빼놓지 않고 클레멘테를 기리는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다리가 많은 도시 피츠버그의 제6번 다리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고, 파이어리츠는 1973년 시즌 개막전에서 그의 배번 21번을 영구 은퇴시켰습니다.
명예의 전당 사상 은퇴 후 5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선정된 선수는 루 게릭에 이어 클레멘테가 두 번째였습니다. 사망한 바로 다음 해인 1973년에 클레멘테는 특별 후보 자격이 주어졌고, 92.7%의 고득표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습니다.
1999년 스포팅뉴스에서 선정한 역대 100명의 위대한 선수 중에 20위에 뽑힌 클레멘테의 등번호 21번도 재키 로빈슨의 42번처럼 빅리그 30개 구단에서 모두 은퇴 번호로 하자는 움직임도 활발히 진행됐지만, 아직 실행되지는 않았습니다.
2006년 7월 11일 피츠버그에서 벌어진 올스타전에서는 모든 출전선수가 'RCW'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노란색 손목 보호대를 착용하고 경기에 임했습니다. 로베르토 클레멘테 워커를 추모하기 위한 후배 선수들의 존경을 담은 마음이었습니다.
클레멘테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야구가 없었더라면 나도 없었을 것이다. 살아있는 한 나는 늘 야구를 떠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난에 빠진 사람들을 도우러 떠났다가 그렇게 너무도 일찍 야구계도 영영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클레멘테 같은 진정한 스포츠 영웅이 있다는 것은 푸에르토리코의 축복이자 야구계의 축복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