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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트레인, DC를 떠날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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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존슨의 별명은 빅 트레인(Big Train)이다. 타자 입장에서 보면, 날아오는 공이 큰 기관차가 돌진하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별명이 만들어진 1911년 당시는 기차가 '가장 빠른 것'의 대명사였다. 그렇다면 존슨은 얼마나 빠른 공을 던졌을까.

 

놀란 라이언 편에서 언급한대로, 존슨은 1917년 탄약 연구소 측정에서 83.2마일(134km/h)을 던졌다. 하지만 홈 플레이트를 지나서 측정됐기 때문에 지금의 기준으로 바꾸면 93.8마일(151km/h)이 된다. 하지만 이는 평균 구속이었고 같은 날 측정된 최고 구속은 91.36마일(147km/h)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지금의 기준으로 바꾸면 101.96마일(164km/h)이 된다.

 

지금은 100마일을 던질 수 있는 투수가 팀 당 한 명 이상이지만, 당시는 정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였다. 존슨과 함께 측정한 냅 루커(Nap Rucker)의 최고 구속은 77마일(124km/h), 91마일을 기록한 존슨과 14마일(22.5km/h) 차이였다.

 

캔자스주에서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존슨은 14살 때인 1902년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올린다(Olinda)로 이주했다. 올린다는 석유가 발견된 도시였다. 존슨은 유전에서 무거운 장비를 나르며 단단한 몸을 만들었다.

 

존슨은 고교 졸업 후 아이다호의 작은 마을에서 전화 회사 직원으로 일하며 야구를 했다. 워싱턴 세네터스의 스카우트는 다른 선수를 보러가던 길에 "공이 보이지 않는 투수가 아이다호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도박을 해보기로 했다. 그는 한 경기만 보고 존슨과 계약했다.

 

존슨은 190719살의 나이로 데뷔하자마자 리그 최고의 투수가 됐다. 1912년은 50경기에 나서 33121.39를 기록했고, 369이닝을 던지고 303개의 삼진을 잡았다. 승리기여도(bWAR) 14.3은 지난해 폴 스킨스(7.7)와 태릭 스쿠볼(6.5) 두 사이영 투수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시즌이 끝나고 클락 그리피스 감독은 존슨에게 조언을 했다. 그때까지 빠른공 하나만 던졌던 존슨에게 타이밍을 빼앗을 수 있는 변화구를 배워야 오래갈 수 있다고 한 것이었다. 사실 존슨도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렇게 존슨은 커브를 던지기 시작했다.

 

결과는 즉각적이었다. 25세 시즌이었던 1913년, 존슨은 11번의 완봉승을 달성했고, 346이닝 3671.14를 기록했다(bWAR 15.2). 최전성기는 1919년까지 이어졌다.

 

그의 커브는 다른 투수들의 커브와 달랐다낙차가 크지 않아 니클 커브(Nickel Curve)로 불렸다. 존슨은 사이드 암으로 던졌기 때문에, 2016PS를 지배했던 공인 앤드류 밀러의 커터성 슬라이더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타이 콥은 존슨의 커브에 대해 "그 녀석은 마치 총알처럼 날아오다가 마지막 순간에 아주 살짝 방향을 튼다. 변화는 작지만 패스트볼이 너무 빨라 미칠 지경이다"고 했다.

  

National Baseball Hall of Fame and Museum 

 

존슨은 1907년부터 1927년까지 21년을 워싱턴 한 팀에서만 뛰었고 4172792.17을 기록했다. 다승은 사이 영(511)에 이어 2위이지만, 110번의 완봉승은 독보적인 1위이고(2위 그로버 알렉산더 90완봉), 역대 첫 3000K 투수가 됐다. 존슨이 1923년에 처음 달성하고 두 번째 선수가 나온 건, 그로부터 51년이 지난 1974(밥 깁슨)이었다. 하지만 커브를 장착하고 최고의 시즌을 보낸 직후, 존슨은 이적 파동에 휘말린다.

 

1914년 페더럴리그라는 제3의 리그가 창설됐고, 모데카이 브라운, 조 팅커, 에디 플랭크, 치프 밴더 등이 특급 대우를 받고 이적했다. 브라운이 선수 겸 감독이었던 시카고 웨일스는 흥행을 이끌 만한 선수가 필요했고 존슨 영입에 사활을 걸었다. 웨일스가 제시한 조건은 세너터스에서 받는 연봉의 두 배가 넘었다. 존슨은 돈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가족의 미래를 위해 웨일스와 사인했다.

 

세너터스 그리고 리그 최고의 스타를 잃게 된 아메리칸리그는 발칵 뒤집혔다. 구단주 겸 감독인 그리피스는 고향에 있는 존슨에게 달려가 설득했고, 웨일스가 주겠다는 연봉과 같은 액수를 약속했다. 존슨은 남기로 했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웨일스는 존슨이 돌려주겠다는 계약금을 받을 수 없다면서 계약 이행을 요구했다. 법정까지 갈 기세였다. 결국 그리피스가 본인의 사비로 위약금을 내면서 존슨의 이적 소동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페더럴리그는 단 2년 만에 해체됐으니, 존슨이 가지 않은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존슨은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이적을 꿈꾸지 않았다.

 

사실 존슨을 가장 탐낸 팀은 뉴욕 양키스였다. 양키스 제이콥 루퍼트 구단주는 그리피스를 만날 때마다 존슨을 팔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그리피스의 대답은 "차라리 워싱턴에서 모튜먼트(Washington Monument)를 가져가라"였다. 1920년 양키스는 보스턴에서 다른 보물을 훔쳐왔다. 베이브 루스였다.

 

1926년에도 260이닝을 던지고 15163.63을 기록한 존슨은, 1927년 스프링 캠프에서 연습 경기 도중 타구에 맞아 다리 골절상을 입었다. 530일에 돌아온 그는 복귀전에서 110번째 완봉승을 달성했지만 기량은 돌아오지 않았고, 18경기 565.10에 그쳤다.

 

존슨이 마지막으로 출장한 경기는 930일 양키스전이었다. 통산 홈런이 24개일 정도로 방망이 실력이 출중했던 그는 9회초 2사에서 투수 대신 대타로 나서 우익수 뜬공으로 물러났다. 존슨의 타구를 잡아낸 건 루스였다.

 

루스는 그에 앞선 8회말 타석에서 2-2 균형을 허무튼 결승 투런을 터뜨렸는데, 이는 자신의 1921년 기록(59개)을 경신한 60호 홈런이었다. 그렇게 존슨은 퇴장했고, 루스는 존슨이 퇴장한 날 새로운 역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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