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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홈런왕, 행크 애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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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크 애런 / 출처 - MLB.com


행크 애런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타자 중 한 명이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입니다. 애런은 1954년 빅리그에 데뷔해 1976년 은퇴할 때까지 23시즌 동안 통산 3298경기 2174득점 3771안타 755홈런 2297타점 240도루 타율 0.305 출루율 0.374 OPS 0.928 WAR 143.2승을 기록했고 올스타 25회, MVP 1회, 골드글러브 3회, 타격왕 2회, 홈런왕 4회, 타점왕 4회, 월드시리즈 우승 1회를 차지했습니다.

 

애런은 1974년 4월 8일 신성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베이브 루스의 714홈런을 넘어섰고, 통산 755홈런으로 2007년 배리 본즈(762홈런)가 경신하기 전까지 33년간 홈런 1위 자리를 지켰습니다. 하지만 본즈가 금지약물 복용이 적발됐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여전히 진정한 홈런왕은 애런이라는 의견이 많은데요. 더 대단한 점은 매주 수천 통에 달하는 협박 편지를 받는 엄청난 부담 속에서도 이와 같은 대기록을 달성했다는 것이죠.

 

애런은 홈런 타자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정확하게는 퓨어 히터(Pure Hitter)에 가까웠죠. 그는 14번의 3할 타율을 기록할 만큼 공을 정확하게 때려내는 타자였고, 홈런은 그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에 가까웠는데요. 실제로 애런은 600홈런 타자 중 유일하게 한번도 50홈런 이상을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23년간 꾸준한 활약을 펼친 끝에 755홈런(역대 2위), 2297타점(역대 1위), 6856루타(역대 1위)라는 금자탑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재키 로빈슨을 동경한 야구 소년

행크 애런 / 출처 - MLB.com

 

헨리 루이스 애런(Henry Louis Aaron)은 1934년 2월 5일, 미국 앨러배마주 모빌의 허버트 애런 시니어와 에스텔라 애런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애런에게는 7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는데, 그의 동생인 토미 애런(1939년생)도 훗날 메이저리그에서 7시즌 동안 활약했죠. 기록의 가치와는 별개로, 애런 형제는 통산 768홈런(행크 755개, 토미 13개)을 합작하며 지금까지도 메이저리그 형제 최다 홈런 기록을 보유 중입니다.

 

애런은 모빌의 '다운 더 베이(Down the Bay)'라는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났지만, 성장기 대부분을 인근 툴민빌에서 자랐습니다. 애런의 아버지는 선박 수리공 보조로 일하며 연간 900달러(현재 가치로 2500만 원)을 받았는데, 7남매를 부양하기에는 터무니 없이 적은 돈이었기에 가족 구성원 모두가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는데요. 애런도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텃밭을 가꾸는 일 외에도 트럭 운전사 등 여러 가지 일을 병행했습니다.

 

당연하게도 제대로 된 야구 장비를 살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애런은 거리에서 주운 재료로 직접 방망이와 공을 만들어서 연습했습니다. 누구에게도 야구를 배우지 못하고 혼자 연습한 결과, 애런은 프로 생활 초기까지 우타자임에도 불구하고 왼손을 오른손 위에 올려놓는 크로스핸드로 타격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교 시절 모빌 지역 흑인 고교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죠.

 

1949년 재키 로빈슨의 활약을 보고 감명을 받은 15세의 애런은 브루클린 다저스의 입단 테스트를 봤지만, 깡마른 몸매(몸무게 63kg)와 독특한 타격폼 때문에 계약을 제시받지 못했는데요. 입단 테스트에서 탈락한 애런은 앨러배마주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인 조세핀 앨런 연구소로 전학해 학업을 마쳤고, 1951년 11월 20일 니그로리그의 인디애나폴리스 크라운스와 월 200달러에 계약을 맺으며 프로 야구에 뛰어 들었습니다.


순탄치만은 않았던 마이너리그 생활

행크 애런 / 출처 - MLB.com

 

애런은 이듬해인 1952년 인디애나폴리스 소속으로 26경기에서 타율 0.366 5홈런 33타점 9도루를 기록하며 팀의 니그로리그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그 결과, 뉴욕 자이언츠와 보스턴 브레이브스 두 팀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습니다. 애런은 고민 끝에 월급을 50달러 더 제시한 브레이브스를 선택했는데요. 훗날 애런은 "월리 메이스와 내가 팀 동료가 되지 못한 유일한 이유는 고작 50달러 때문이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1952년 6월 12일 브레이브스와 계약을 맺은 애런은 노던 리그(클래스C) 오클레어 베이스에 배정됐고, 87경기에서 타율 0.336 9홈런 61타점을 기록하며 올스타와 신인왕에 선정됐습니다. 경기력 못지 않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라운드 안팎에서 보여준 침착한 모습이었는데요. 애런은 18세라고는 믿기 힘들만큼 성숙한 태도를 통해 불가피하게 마주하게 될지 모를 인종차별에도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줬습니다.

 

1953년 사우스 애틀랜틱리그(클래스A)의 잭슨빌 브레이브스로 배정된 애런은 스프링 캠프에서 벤 게라티 감독의 조언으로 마침내 크로스핸드 그립을 버리고 정석적인 그립으로 타격을 하면서 잠재력을 만개했습니다. 이해 애런은 137경기에서 타율 0.362 22홈런 125타점 13도루 OPS 0.988으로 득점(115)·안타(208)·2루타(36)·총루타(338)·타율·타점 부문 1위를 차지했고, 잭슨빌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면서 MVP에 선정됩니다.

 

애런의 마이너리그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는데요. 1947년 재키 로빈슨의 데뷔 이후에도 미국, 특히 남동부 지역에는 인종 차별이 여전히 만연해 있었습니다. 애런은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s, 19세기 후반 미국 남부에서 도입된 인종 분리를 강제하는 지방 법률) 때문에 팀 동료들과 떨어져 흑인 전용 숙소에서 지내야 했죠. 이에 대해 한 평론가는 "애런은 호텔 숙박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다"고 비판했습니다.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다

행크 애런 / 출처 - MLB.com

 

하지만 불행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953년 잭슨빌 시절 애런은 자신의 인생을 바꿔 놓을 두 명의 인연을 만나는데요. 한 명은 잭슨빌의 감독 벤 게라티입니다. 그는 경기장 안팎에서 애런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팀 동료였던 팻 조던은 "애런은 자신의 빠른 적응에 대한 공로를 늘 게라티에게 돌렸다"고 회고했습니다. 다른 한 명은 첫 아내인 바바라 루카스로, 경기장에서 만난 둘은 같은 해 10월 6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1953시즌 종료 후 애런은 푸에르토리코에서 열린 윈터리그에 참가했는데요. 그곳에서 애런은 팀의 감독인 미키 오웬과 함께 몇 달 전에 바꾼 타격 자세를 다듬으면서 당겨치기 일변도에서 밀어치기도 구사할 수 있는 '스프레이 히터'로 진화했습니다. 한편 내야수로서 수비를 잘하지 못했지만, 발빠른 그가 외야수로선 성장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아차린 오웬 감독의 제안으로 애런은 2루수에서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했습니다.

 

이듬해 브레이브스의 메이저리그 스프링 캠프에 참가한 애런은 1954년 3월 13일, 주전 좌익수 바비 톰슨이 2루로 슬라이딩하다 발목이 심하게 골절되는 부상을 당하면서 출전 기회를 잡습니다. 애런은 다음날, 브레이브스 소속으로 시범경기 첫 선발 출전한 경기에서 홈런을 터뜨리는 등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는데요. 그 결과 캠프 마지막 날, 애런은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고 등번호 5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받았습니다.

 

애런은 1954년 4월 13일, 개막전에서 좌익수 겸 5번 타자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렀지만 무안타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이틀 후 세인트루이스 투수 빅 라시를 상대로 2루타를 터뜨리며 첫 안타를 기록했고, 일주일 후 라시를 상대로 첫 홈런을 쏘아올렸습니다. 그는 9월 5일 슬라이딩하다 발목이 골절되면서 조기에 시즌을 마감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율 0.280 13홈런 69타점 OPS 0.769을 기록하며 신인왕 투표 4위에 올랐습니다.


헨리에서 행크로...그리고 시작된 전성기

행크 애런 / 출처 - MLB.com

 

이듬해인 1955년 애런은 등번호를 44번으로 교체했고, 우익수로 포지션을 옮겼습니다. 한편, 브레이브스의 홍보 담당자 돈 데이비슨은 과묵한 선수인 애런을 더 친근하게 보이도록, 그를 가까운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인 '헨리' 대신 '행크'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요. 이 별명은 빠르게 널리 퍼졌지만, 이후에도 '헨리'와 '행크'는 혼용됐습니다. 동료들이 부르는 '해머링 행크'와 상대 투수들이 부르는 '나쁜 헨리'라는 별명도 이 시기에 나왔죠.

 

애런은 1955년 타율 0.314 27홈런 106타점 OPS 0.906을 기록하고 2루타(37) 부문 1위에 오르면서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됐는데, 이는 역대 최장 기록인 21년 연속 올스타 선정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1956년 타율 0.328 26홈런 92타점 OPS 0.923으로 안타(200)·2루타(34)·타율 부문 1위에 올랐는데요. 하지만 이는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1957년 타율 0.322 44홈런 132타점 OPS 0.978으로 홈런·타점 부문 1위를 차지한 겁니다.

 

특히 시즌 최종전에서 연장 11회 끝내기 홈런을 터뜨리며 팀의 리그 1위를 이끌었죠. 이해 브레이브스는 전년도 우승팀인 뉴욕 양키스를 4승 3패로 꺾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쥡니다. 애런은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0.393 3홈런 7타점 OPS 1.200을 기록하며 놀라운 시즌의 대미를 장식했는데요. 당연하게도 내셔널리그 MVP는 애런의 차지였습니다. 이는 애런의 커리어에서 유일한 월드시리즈 우승이자, MVP 수상이기도 합니다.

 

이후에도 애런은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애런은 1957년부터 1965년까지 9년간 평균 37홈런을 기록했고 타격왕 1회, 홈런왕 2회, 타점왕 3회, 골드글러브 3회를 차지했는데요. 특히 1959년 타율 0.355 39홈런 123타점 OPS 1.037으로 안타(223)·루타(400)·타율 부문 1위이자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고, 1963년 타율 0.319 44홈런 130타점 31도루 OPS 0.977으로 홈런·타점 부문 1위와 함께 역대 3번째 30-30 클럽에 가입했습니다.

 

애틀랜타 시대, 애런이 남긴 이정표들

행크 애런 / 출처 - MLB.com

 

브레이브스는 1965시즌 종료 후 밀워키에서 애틀랜타로 연고지를 변경했습니다. 애틀랜타는 당시 기준 메이저리그 팀들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곳이었는데요. 하지만 애런은 팀이 인종차별이 심한 남부로 이전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았습니다. 애런은 2014년 <애틀랜타 비즈니스 크로니클>과 인터뷰에서 "야구를 하는 것 자체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연고지가 밀워키에 있든 애틀랜타에 있든 상관이 없었습니다"고 회고했습니다.

 

애틀랜타 시절, 애런은 여러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애런은 연고지 이전 첫 해인 1966년 타율 0.279 44홈런 127타점 OPS 0.895으로 홈런·타점 부문 1위를 차지했고, 1967년 타율 0.307 39홈런 109타점 OPS 0.943으로 2년 연속 홈런왕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1968년 7월 14일에는 통산 500홈런, 1970년 5월 17일에는 통산 3000안타, 1971년 4월 27일에는 베이브 루스, 윌리 메이스에 이어 역대 3번째로 통산 600홈런 고지를 밟았습니다.

 

파업으로 단축된 1972년에는 661번째 홈런을 터뜨리며 메이스마저 제치고 역대 홈런 2위에 올랐고, 통산 2000타점을 달성했는데요. 1973년 39세의 애런은 타율 0.301 40홈런 96타점 OPS 1.045을 기록하며 루스의 기록(714홈런)까지 1개 만을 남겨둔 채로 시즌을 마쳤습니다. 그러자 애런은 1973시즌 종료 후 루스의 기록을 깨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로부터 무려 93만 통에 달하는 인종 차별과 살해 위협이 담긴 협박 편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애런은 아랑곳하지 않고 경기에 임했고, 1974년 4월 8일 애틀랜타에서 53,775명의 팬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저스의 투수 알 다우닝을 상대로 통산 715번째 홈런을 터뜨리며 마침내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1974시즌 종료 후 애틀랜타는 그를 밀워키로 트레이드했는데요. 애런은 1975년 5월 1일 루스의 2,213타점을 넘어 역대 타점 1위로 올라섰고, 1976년 통산 755번째 홈런을 때려낸 것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습니다.


플레이 스타일

행크 애런 / 출처 - MLB.com

 

애런의 현역 시절 플레이스타일은 '올라운드 플레이어'에 가까웠는데요. 755홈런(역대 2위)이란 숫자에 가려져 있지만, 그는 역사상 가장 도루가 적었던 시대에 통산 240번의 도루를 기록할 만큼 발빠른 주자였습니다. 실제로 애런은 1959년부터 1968년까지 10년간 203도루로 같은 기간 MLB 전체 7위에 올랐는데, 이는 윌리 메이스보다도 앞서는 수치였죠. 더욱 놀라운 점은 도루 성공률(80.2%) 기준으로는 MLB 전체 1위였다는 겁니다.

 

외야수로서 수비력도 출중했는데요. 애런은 외야 아웃(PO)에서 5번의 1위를 포함해 매년 3위 안에 들 정도로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했습니다. 또한, 외야수로서 2번의 어시스트(A) 1위와 함께 통산 201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한 강견이기도 했죠. 이를 바탕으로 애런은 3번의 골드글러브를 수상했는데, 하필 역대 최고의 외야 수비수인 메이스, 클레멘테와 동시대에 뛰지 않았다면 애런의 수비는 더욱 높게 평가됐을 겁니다.

 

이는 타격에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애런의 통산 타율 0.305은 600홈런 달성자 9명 중에서 베이브 루스(0.342)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치입니다. 또한, 600홈런 달성자 9명 중에서 100삼진을 한번도 당하지 않은 유일한 타자이기도 하죠. 이러한 컨택트 능력과 파워의 결합은 애런의 가장 경이로운 기록인 총루타(Total Bases)에서도 드러납니다. 애런의 통산 6856루타는 2위 앨버트 푸홀스(6211개)보다 무려 645개나 많은 수치입니다.

 

한편, 애런은 4번의 타점왕과 함께 통산 2297타점으로 역대 1위에 오를 만큼 클러치에 강한 타자였는데요. 마지막으로 한가지 간과하는 점은 그가 역사상 최악의 투고타저 시대에 뛰면서 이와 같은 성적을 기록했다는 겁니다. 그는 동시대에 함께 뛰었던 메이스나 맨틀처럼 화려한 플레이를 펼치지도, 인기를 얻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대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역사상 누구보다 꾸준한 선수였기 때문이죠.


 은퇴 이후의 삶
행크 애런 / 출처 - MLB.com
 

은퇴 후, 애런은 애틀랜타로 돌아와 브레이브스의 선수 육성 부사장으로 취임함으로써 메이저리그 구단 고위 경영진에 임명된 최초의 흑인이 됐고, 1982년 첫 번째 투표에서 97.8%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이는 당시 기준 타이 콥(98.2%)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득표율이었는데요. 1999년 MLB 사무국은 매년 양대 리그 최고의 타자에게 수여하는 상을 제정하고 '행크 애런상(Hank Aaron Award)'으로 명명했습니다.

 

그리고 2007년 8월 7일 배리 본즈가 756번째 홈런을 쳤을 때, 샌프란시스코의 전광판에 깜짝 등장한 애런은 "배리 본즈의 야구 역사상 최다 홈런 기록 경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는 뛰어난 기량과 오랜 노력 그리고 강한 의지가 결합된 위대한 업적입니다. 지난 세기 홈런은 야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 왔으며, 저는 33년 동안 이 기록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후략)"이라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애런은 87번째 생일을 불과 2주 앞둔 2021년 1월 22일, 애틀랜타의 자택에서 잠자던 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수많은 야구계 및 정재계 인사가 그에게 애도를 표했는데요. 브레이브스는 2021시즌 동안 모자 뒷면에 애런의 등번호 44번과 필 니크로의 35번을 표기하며 그를 기렸습니다. '위엄', '자긍심', '용기'. 우리가 영웅을 묘사할 때 흔히 쓰이는 단어들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행크 애런이 어떤 선수였는지 설명하는 데에도 적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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