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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크 애런이 밀워키에서 은퇴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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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시즌이 끝나고 CBS는 흥미로운 TV쇼를 기획한다. 미국의 홈런왕 행크 애런과 일본의 홈런왕 오 사다하루(왕정치)의 홈런 대결이었다.

 

마흔살의 애런은 그 해 48일에 베이브 루스의 714홈런을 넘어 역대 1위 선수가 됐다. 애런은 1973년에 93만 여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대통령인 리차드 닉슨 다음으로 많은 숫자였다. 대부분은 루스의 기록을 깨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협박 편지였다.

 

34살이었던 오 사다하루는 일본 최초의 600홈런과 2년 연속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9년 연속 일본시리즈 우승이 중단됐지만, 오는 7번째 센트럴리그 MVP에 올랐다(오는 통산 9번의 MVP를 차지했다).

 

112일 도쿄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대결은 예상대로 엄청난 화제를 불러왔다. 출연료는 애런 5만 달러, 오 사다하루 2만 달러였다.

 

사람들은 오 사다하루의 승리를 예상했다. 고라쿠엔은 오의 홈구장이었고, 오가 최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던 반면, 애런은 루스를 넘긴 했지만, 전년도 40개였던 홈런이 20개로 줄며 햐향세가 시작됐다. 애런은 102일에 시즌을 마친 후 한 달 동안 스윙을 하지 않았고, 17시간의 비행이 끝나자마자 경기장에 온 상황이었다.

 

먼저 배트를 잡은 오 사다하루는 20번의 스윙에서 9개의 홈런을 날렸다. 하지만 애런은 18번째 스윙에서 10번째 홈런을 날린 후 방망이를 내려놓았다. 애런의 승리였다. 둘은 10년 후인 1984년에도 50세와 44세의 나이로 두 번째 홈런 대결을 했고, 이번에도 애런이 승리했다.

 

홈런 대결 후 둘은 깊은 우정을 쌓았다. 일본의 커피 광고(Maxim)에 함께 출연했고, 1990년에는 세계 어린이 야구 재단을 공동으로 설립해 열심히 활동했다.

 

이후 배리 본즈는 762개를 날려 애런을 넘었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애런이 진정한 홈런왕이라고 생각한다. 고라쿠엔 구장이 매우 작긴 했지만, 마지막 40세 시즌에도 30개를 날린 오 사다하루는 868개를 기록하고 은퇴했다. 600개를 넘은 일본 선수는 지금까지도 오와 노무라 카츠야(657) 두 명뿐이다.

 

다시 1974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애런은 홈런 대결을 승리한 후 미국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밀워키 브루어스의 구단주 버드 셀릭의 전화였다(훗날 셀릭은 메이저리그 커미셔너가 된다). 셀릭은 애런에게 "축하합니다. 집으로 돌아오실 수 있게 됐습니다"라고 했다.

 

애런은 1934년 미국 남부 앨라바마주 모빌(Mobile)에서 출생했다. 원주민 부족인 모빌리언(Mobilian)에서 유래된 도시인 모빌은 애런뿐 아니라 세이첼 페이지, 윌리 매코비, 아지 스미스, 빌리 윌리엄스 5명이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애런은 가난했던 집안 사정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목화 농장에서 일을 했으며, 야구 장비를 살 수 없어 나무 막대기와 병뚜껑으로 연습했다. 또한 야구 팀이 있는 학교를 다녀보지 못했다. 하지만 낭중지추라고 했던가, 그의 날카로운 재능이 여러 불리한 여건들을 뚫어냈다.

 

1952년 니그로리그의 인디애나폴리스 클라운스에 입단한 애런은 첫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보스턴 브레이브스와 계약했다. 재키 로빈슨이 1947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인종의 벽을 허문 덕분이었다. 1954년 애런이 데뷔했을 때, 브레이브스는 보스턴이 아닌 밀워키에 있었다. 레드삭스의 인기에 밀린 브레이브스가, 애런이 입단하고 1년 후 밀워키로 연고지를 옮겼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밀워키는 애런의 도시가 됐다.

 

브레이브스는 밀워키에서 13시즌을 보내고 또 연고지를 옮겼다. 이번에는 애틀랜타였다. 루스를 넘어선 1974년은 애런이 밀워키에서 12년을 보내고, 애틀랜타에서 9년을 보낸 시점이었다. 시즌이 끝난 후 애런은 밀워키로 돌아가고 싶다며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밀워키 브루어스가 아니면 은퇴하겠다는 엄포도 놓았다.

 

애런은 자신을 가장 사랑해준 도시에서 마무리를 하고 싶어했다. 밀워키로 가고 싶었던 또 다른 이유는 지명타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메리칸리그 혼자 1973년에 지명타자를 도입했는데, 브루어스는 아메리칸리그 팀이었다. 애런은 더 이상 외야 수비를 하기가 힘들었다.

 

1975411, 밀워키 카운티 스타디움에는 10년 만에 돌아온 애런을 보기 위해 만원 관중이 운집했다. 팬들은 "Hello, Henry"를 외쳤다. 브루어스에서 2년 동안 애런의 기량은 빠르게 떨어졌다. 41, 42세 시즌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애런은 1975년 베이브 루스의 타점 기록을 경신했고, 그 해 밀워키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통산 25번째 출장을 했다. 1976103, 애런은 마지막 타석에서 통산 3771번째 안타와 2297번째 타점을 올리고 대주자로 교체됐다. 밀워키 팬들은 마지막 박수로 그의 퇴장을 축하했다.

 

애런은 브레이브스에서 21, 브루어스에서 2년을 뛰었고, 밀워키에서 14, 애틀랜타에서 9년을 뛰었다. 애런이 유일하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도시는 밀워키(1957)였다. 애런은 밀워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19살의 어린 나이에 이곳에 왔고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이 도시의 팬들은 야유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시카고나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뛰었다면 훨씬 더 큰 스타가 되고 돈도 더 많이 벌었을 거라고 합니다. 그랬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밀워키는 나에게 완벽한 곳이었습니다. 어떤 선수라도 이런 팬들 앞에서 경기할 수 있다면, 정말 행운일 것입니다."

 

20211, 애런이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오 사다하루(85)는 다음과 같은 추도사를 남겼다.

 

"그는 모든 선수들의 귀감이었습니다. 그리고 멋진 신사였습니다. 정말 훌륭한 야구 인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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