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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공격형 3루수', 에디 매튜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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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매튜스 / 출처 - MLB.com

전 그저 낡고 닳은 3루수입니다. 전 오늘날 미국의 위대한 부분을 이루는 야구라는 멋진 종목의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ㅡ에디 매튜스

에디 매튜스는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공격형 3루수 중 한 명이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입니다. 또한, 보스턴/밀워키/애틀랜타에서 브레이브스 소속으로 뛰었던 유일한 선수기도 하죠. 1952년 보스턴 브레이브스 소속으로 데뷔한 그는 팀이 밀워키로 연고지를 옮긴 첫해인 1953년 홈런 47개(1위)를 때려내며 21세의 나이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애틀랜타로 연고지를 옮긴 1966년에도 팀의 주전 3루수로 활약했습니다.

 

매튜스는 만 30세가 되기 전까지 370홈런(역대 3위)을 기록했는데, 많은 전문가는 베이브 루스의 통산 홈런 기록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매튜스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비록 30대 들어 부상으로 인해 페이스가 느려졌지만, 매튜스는 통산 2391경기 2315안타 512홈런 1453타점 타율 0.271 출루율 0.376 OPS 0.885 WAR 96.0승을 기록했고 올스타 12회, 홈런왕 2회, 월드시리즈 우승 2회를 차지하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야구계 최고의 타자 유망주

에디 매튜스 / 출처 - MLB.com

 

에디 매튜스의 본명은 '에드윈 리 매튜스 주니어(Edwin Lee Mathews Jr.)'로 1931년 10월 13일 미국 텍사스주의 텍사캐나에서 태어났고, 여섯 살 때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로 이사했습니다. 매튜스는 야구 재능을 전신 기사(telegraph operator, 모스부호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직업)이자, 세미프로 야구선수였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는데요. 하지만 매튜스의 어머니 역시 그가 야구에 대한 열정을 키우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훗날 매튜스는 "(어린 시절 타격 훈련을 할 때면) 어머니는 제게 공을 던지셨고, 아버지는 공을 받아줬습니다. 어머니가 있는 쪽(가운데)로 공을 치면 다음날 심부름이 더 많아졌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당겨치는 타자(pull hitter)가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죠"라고 회고했습니다. 매튜스는 산타바바라 고교 시절 야구뿐만 아니라 미식축구에서도 두각을 드러냈고, 유수의 미식축구 명문 대학들로부터 전액 장학금 제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매튜스는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야구 유망주 중 한 명이었고, 고교 졸업반 무렵 여러 메이저리그 팀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습니다. 다른 여러 팀에서 더 많은 계약금을 제시했지만, 매튜스는 보스턴 브레이브스와 6,000달러에 계약을 맺었는데요. 그의 아버지가 MLB 팀들의 로스터를 분석한 결과 베테랑 3루수인 밥 엘리엇이 있는 브레이브스가 조만간 3루수 자리에 공석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죠.

 

보스턴 브레이브스의 스카우트인 조니 무어는 매튜스의 고교 졸업식 날 자정까지 기다렸다가, 자정이 지나자마자 매튜스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당시 메이저리그는 선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계약을 맺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망주 시절 매튜스에 대한 기대치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죠. 그리고 매튜스는 브레이브스에 입단하자마자, 자신이 왜 야구계 최고의 유망주 타자로 꼽혔는지를 보여줬습니다.

 

조숙한 천재

에디 매튜스 / 출처 - MLB.com

 

1949년 브레이브스에 입단한 매튜스는 하이포인트-토마스빌(레벨D)에서 만 17세의 나이로 타율 0.363 17홈런 56타점 OPS 1.127을 기록했고, 이듬해인 1950년에는 더블A로 승격되어 타율 0.286 32홈런 106타점 OPS 0.899를 기록했습니다. 유망주 시절 매튜스의 활약은 그 자존심 강한 타이 콥조차도 감탄시킬 정도였는데요. 콥은 "제가 아는 완벽한 스윙을 지닌 선수는 고작 서너 명뿐입니다. 그 중 한 명이 이 친구죠"라고 말했습니다.

 

매튜스는 1951년 한국 전쟁으로 해군에 입대했지만, 몇 달 후 아버지의 병환과 가족의 유일한 부양자라는 이유로 전역했습니다. 브레이브스로 복귀한 매튜스는 1951년 더블A와 트리플A 49경기에서 타율 0.292 7홈런 34타점 OPS 0.949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1952년 스프링 캠프에 초청을 받은 매튜스는 엘리엇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주전 3루수 자리를 차지하는데요. 이는 브레이브스 입단 전 그의 아버지가 예상한 대로였죠.

 

1952년 빅리그에 데뷔한 20세의 매튜스는 타율 0.242 25홈런 58타점 OPS 0.767을 기록하며 NL 신인왕 투표에서 3위에 오릅니다. 특히 9월 27일 브루클린 다저스와 시즌 최종전에서 한 경기에 홈런 3방을 터뜨리며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를 남겼는데요. 이듬해인 1953년 브레이브스는 연고지를 밀워키로 이전했고, 만 21세의 매튜스는 타율 0.302 47홈런 135타점 OPS 1.033으로 홈런왕을 차지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릅니다.

 

그리고 1954년 타율 0.290 40홈런 103타점 OPS 1.026을, 1955년 타율 0.289 41홈런 101타점 OPS 1.014를 기록하며 3시즌 연속 40홈런을 돌파했습니다. 브레이브스도 1954년 89승 65패(3위)에 이어 1955년 85승 69패(2위)에 오르며 서서히 강팀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는 매튜스와 함께 행크 애런(통산 755홈런)이라는 또 한 명의 위대한 타자가 브레이브스에 합류하면서 강력한 좌/우타자 듀오를 구축했기 때문이죠.


행크 애런과 함께 이끈 전성기

에디 매튜스와 행크 애런 / 출처 - MLB.com

 

1956년 매튜스는 타율 0.272 37홈런 95타점 OPS 0.892를 기록했고, 애런은 타율 0.328 26홈런 92타점 OPS 0.923을 기록하며 타격왕에 오릅니다. 이해 브레이브스는 92승 62패(0.597)를 기록했으나, 돈 뉴컴과 듀크 스나이더가 버티는 다저스에 밀려 한 경기 차이로 리그 2위에 그쳤는데요. 하지만 1957년 매튜스는 타율 0.292 32홈런 94타점 OPS 0.927을, 애런은 타율 0.322 44홈런 132타점 OPS 0.978로 성적이 향상됐습니다.

 

이에 힘입어 브레이브스는 95승 59패로 리그 1위에 올랐고, 뉴욕 양키스를 7차전 승부 끝에 꺾고 43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합니다. 매튜스는 이듬해인 1958년 타율 0.251 31홈런 77타점 OPS 0.807로 부진했지만, 브레이브스는 92승 62패로 리그 1위에 오르며 월드시리즈에서 양키스와 2년 연속 맞대결을 펼쳤는데요. 양팀은 또 한번 7차전까지 가는 혈투를 벌였으나, 이번엔 양키스가 우승컵을 들어 올렸습니다.

 

매튜스는 1959년 타율 0.306 46홈런 114타점 OPS 0.983으로 커리어 두 번째 홈런왕에 오르며 최고의 한 해를 보냈습니다. 브레이브스도 86승 68패(0.558)로 다저스와 함께 NL 공동 1위에 올랐지만, 월드시리즈 진출을 놓고 다저스와 펼친 3전 2선승제 플레이오프에서 2연패를 당하며 탈락합니다. 브레이브스는 1959년 이후 우승 경쟁권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3번 매튜스- 4번 애런' 듀오는 꾸준한 활약을 펼쳤죠.

 

매튜스는 1960년 타율 0.277 39홈런 124타점 OPS 0.948, 1961년 타율 0.306 32홈런 91타점 OPS 0.937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1962년 무리하게 높은 공을 치려다가 오른쪽 어깨의 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했는데요. 뛰어난 근성을 지녔던 매튜스는 어깨 통증을 견디며 152경기에 출전했고 타율 0.265 29홈런 90타점 OPS 0.877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홈런 한 개 차이로 10년 연속 30홈런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진 못했습니다.

 

역대 7번째 500홈런, 그 후

에디 매튜스 / 출처 - MLB.com

 

부상을 참고 뛴 여파는 이듬해부터 찾아왔습니다. 1963년 매튜스의 첫 홈런은 통산 400번째 홈런이었는데요. 하지만 그해 매튜스는 타율 0.263 23홈런 83타점 OPS 0.852로 이전보다 확연히 떨어진 성적을 기록했고, 설상가상으로 1964년에는 타율 0.233 23홈런 74타점 OPS 0.756으로 데뷔 후 최악의 성적을 거둡니다. 하지만 절치부심한 매튜스는 1965년 타율 0.251 32홈런 95타점 OPS 0.810으로 4년 만에 30홈런을 기록하며 반등했죠.

 

특히 1965년 8월 20일 피츠버그전에서 기록한 매튜스의 시즌 28호 홈런은 '매튜스 & 애런' 듀오가 합작한 773번째 홈런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이 홈런으로 '베이브 루스 & 루 게릭' 듀오가 양키스에서 합작한 772홈런을 넘어섰습니다. 이후에도 '매튜스 & 애런' 듀오는 1966년까지 863홈런을 합작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메이저리그 역사상 같은 시기에 한 팀에서 뛴 두 명의 타자가 합작한 최다 홈런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매튜스는 브레이브스가 애틀랜타로 연고지를 옮긴 1966년 타율 0.250 16홈런 53타점 OPS 0.761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홈런이 절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러자 브레이브스는 매튜스를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트레이드합니다. 이듬해인 1967년 7월 14일, 매튜스는 샌프란시스코전에서 후안 마리칼을 상대로 홈런을 터뜨리며 MLB 역사상 7번째 500홈런 클럽에 가입했는데요. 하지만 휴스턴은 그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트레이드했습니다.

 

매튜스는 디트로이트 입단 첫날부터 리더십을 발휘했는데요. 디트로이트 클럽 하우스에 처음 들어섰을 때, 매튜스는 "메이요(감독)가 있더라도 우리는 이길 것이다"라고 쓴 칠판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낙서를 지우고 팀원들에게 감독을 지지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훈계했죠. 디트로이트의 단장 짐 캠벨은 훗날 "에디는 팀을 이끌어갈 자질을 지니고 있었고, 우린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리더로서 팀을 성장시켰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디트로이트 시대

에디 매튜스 / 출처 - MLB.com

 

디트로이트에서 매튜스는 9월 초에 기존 3루수 돈 워트가 부상에서 복귀할 때까지 3루수를 맡았고, 이후에는 놈 캐시와 함께 1루수로 번갈아 출전했습니다. 1967년 매튜스는 타율 0.236 16홈런 57타점 OPS 0.725로 시즌을 마칩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68년 매튜스는 6월 초 허리 디스크로 부상자 명단에 등재됐고, 휴식 후에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자 7월 5일 디트로이트의 한 병원에서 문제의 디스크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야구인은 매튜스의 커리어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수술 후 피나는 재활 끝에 9월 초 디트로이트에 복귀했고, 1968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월드시리즈 로스터에 포함될 수 있었는데요. 매튜스는 그해 월드시리즈 7경기 중 2경기에 출전해 세인트루이스의 에이스 밥 깁슨을 상대했는데 1차전에서는 8회 초 대타로 나서 삼진을 당했지만, 4차전에선 3루수로 선발 출전해 안타와 볼넷을 하나씩 기록했죠.

 

이후 5, 6, 7차전에서 매튜스는 벤치에 앉아 있었지만 디트로이트는 3연승을 거두며 1945년 이후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매튜스는 자신을 '클럽 하우스의 치어리더'라고 겸손하게 지칭했는데요. 이어 "제가 프로 입문 첫해에 (클래스D 하이포인트-토마스빌) 우승했고, 마지막 해에도 (디트로이트에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야구 선수가 이보다 바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현역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플레이 스타일

에디 매튜스 / 출처 - MLB.com

 

매튜스는 당대 최고의 파워 히터 중 한 명으로 여겨졌으며, 동시대 아메리칸리그 선수인 미키 맨틀과 자주 비교됐습니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투수 워렌 스판은 두 선수에 대해 "매튜스는 맨틀만큼 파워가 강하지만 타격 스타일은 조금 다릅니다. 맨틀은 모든 체중을 실어서 스윙을 하는 반면, 매튜스는 손목을 더 많이 사용합니다"라고 회고했는데요. 실제로 다수의 야구인은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스윙 중 하나로 매튜스의 스윙을 꼽습니다.

 

근면 성실한 야구 선수였던 매튜스는 타격뿐만 아니라 수비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오랜 동료였던 조니 로건은 "에디는 초창기에는 평균 이하의 수비수였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훌륭한 3루수로 성장했습니다. 코니 라이언 코치는 스프링 트레이닝 때 매일 에디에게 50~100개의 펑고를 쳐줬습니다. 에디는 가슴으로 땅볼을 막아낸 후 처리하곤 했습니다. 수비 과정에서 코가 세 번이나 부러졌는데도요"라고 회고했습니다.

 

또한 매튜스는 타격만큼이나 뛰어난 싸움 실력으로도 주목을 받았는데요. 팀 동료인 루 버뎃은 "에디는 강력한 경쟁자이자, 강인한 남자였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물러서지 않았죠. 에디와 함께라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경기 중에 누군가가 마운드에 돌진하면 그가 지켜줄 거라는 걸 믿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항상 팀 동료를 보호하려는 의지는 매튜스를 1950년대 가장 리더십이 있는 선수 중 한 명으로 만들었죠.

 

단, 매튜스는 벤치 클리어링 상황을 제외하면 경기장에서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매튜스는 인터뷰에서 "타자가 삼진을 당하고 배트를 던지는 건 웃긴 일이라고 생각해요. 팬들에게 제가 화가 났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배트를 던지거나, 워터 쿨러를 발로 차는 건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저에게 허슬은 장타를 치고, 병살타를 막고, 누군가의 송구를 백업하고, 항상 경기에 집중하는 걸 의미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은퇴 후의 삶

에디 매튜스 / 출처 - MLB.com

 

은퇴 후 디트로이트 구단은 스카우트 자리를 제안했지만, 매튜스는 야구계를 떠나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는데요. 하지만 사업은 실패로 끝났죠. 1971년 그는 친정팀인 브레이브스의 코치로 야구계에 복귀했고, 1972년 8월 초에는 감독으로 임명됐습니다. 하지만 1974년 브레이브스가 부진하자 매튜스는 그해 7월 감독에서 경질됐습니다. 이후 그는 몇 년간 텍사스 레인저스, 밀워키 브루어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서 코치와 스카우트로 활동했습니다.

 

매튜스는 1969년 브레이브스에서 영구 결번(41번)으로 지정됐고, 1978년 다섯 번째 투표에서 79.4%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그는 "저는 그저 낡고 닳은 3루수입니다. 저는 오늘날 미국의 위대한 부분을 이루는 야구라는 멋진 종목의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그 이후 세월이 흘러 2001년 2월 18일, 매튜스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향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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