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 속 ‘명예의 전당’ 1호 헌액자 ‘박찬호’

‘첫’의 대명사 박찬호, ‘한국인 첫 명전 후보’가 아니었다고?
그리고 1997년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하여
지난달 추신수가 한국인 최초로 美 야구 명예의 전당(Hall of Fame)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야구팬들 사이에서 작은 물음표 하나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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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코리안 메이저리거 최초로 명예의 전당 후보에 올랐던 이는 박찬호가 아니냐는 것.
그도 그럴 것이, 우리 기억 속 메이저리그와 관련된 모든 첫 번째 순간에는 박찬호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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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박찬호는 1996년 감격적인 첫 빅리그 승리투수가 되었다. 2000년엔 한국인 최초로 타석에서 자신이 직접 홈런을 쏘아올리기도 했다.
그야말로 첫 키스, 첫사랑 빼고 (야구와 관련된) 모든 ‘첫’은 박찬호가 차지하던 시절이었다.

“명전 헌액까진 기대하지 않았지만 … 후보에도 못 들었다고?”
2010시즌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의 선수 생활을 끝으로 빅리그 무대에서 내려온 박찬호는 이후 NPB 오릭스 버팔로즈와 KBO 한화 이글스에서 현역 생활을 이어갔다.
美 야구 명예의 전당 후보에 오르기 위해서는 ▲은퇴 후 5년이 지나야 하고, ▲최소 10년간의 메이저리그 경력이 필요하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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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가 실제 프로(현역) 은퇴를 선언한 날은 2012년 11월 30일이지만, MLB 기준으로는 2010년이 마지막 시즌이었으므로 2016년엔 명예의 전당 입회 후보가 될 수 있었다.
‘MLB.com’의 최초 보도에서도 해당 후보 명단에 박찬호의 이름이 있었지만 이내 수정됐다. 전미야구기자협회(BBWAA) 홈페이지에도 박찬호의 이름은 없었다.
위 2가지 조건을 충족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명예의 전당 후보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입회 자격은 갖췄지만, 최종 후보 자격 위원회 심사에서 제외된 것이다.
당시엔 전미야구기자협회 소속 기자 6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2명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최종 후보에 오를 수 있었다. 즉 박찬호는 이 2차 관문을 넘지 못한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엄격한 후보 기준, 중요한 건 누적기록
1994년 빅리그에 데뷔한 박찬호는 17시즌 동안 124승 98패(1,993이닝), 방어율 4.36이라는 성적을 남겼다.
특히 국내 팬들 입장에서 박찬호는 ▲금지약물 복용 타자들이 판을 치던 1990년대 후반 구위만으로 타자들을 압도하는 강속구 투수였고, ▲아시아 역대 최다승(124승) 투수라는 상징성, ▲김병현·김선우·서재응 등 2세대 코리안 메이저리거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도운 선구자적인 이미지까지 더해져 있던 터라 그 아쉬움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당시 후보 자격을 갖춘 선수들의 네임 밸류(Name Value)가 너무 압도적이었다는 점도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통산 630홈런을 기록한 ▲켄 그리피 주니어(Ken Griffey Jr.)와 통산 601세이브를 기록한 ▲트레버 호프만(Trevor Hoffman), 그리고 ▲가렛 앤더슨, ▲브래드 오스머스, ▲루이스 카스티요, ▲데이빗 엑스타인, ▲짐 에드먼즈, ▲트로이 글라우스, ▲마크 그루질라넥, ▲마이크 햄튼, ▲제이슨 켄달, ▲마이크 로웰, ▲마이크 스위니, ▲빌리 와그너, ▲랜디 윈 등 15명만이 최종 후보에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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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는 ▲켄 그리피 주니어(득표율 99.3%)와 4수 끝에 입성에 성공한 ▲마이크 피아자(득표율 83%) 둘 뿐이었다.
우리 입장에서 박찬호가 MLB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선수이긴 하지만, 랜디 존슨·페드로 마르티네스·그렉 매덕스 등 동시대 탑 클래스 투수들에 비해 다소 아쉬운 누적기록과 전성기가 비교적 짧았다는 점, 2016년 첫 후보 자격을 갖게 된 선수들이 너무 쟁쟁했다는 점 등이 맞물린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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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항상 박찬호와 비교되던 일본의 노모 히데오(123승 109패, 방어율 4.24)는 2014년 명예의 전당 후보에 올랐었고, 전체 571표 중 6표(1.1%)를 받아냈기에 국내 팬들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더욱 컸을 것이다.

우리가 목격한 박찬호의 ‘첫 번째 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찬호의 위상과 커리어에 범접할 수 있는 선수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당시 명예의 전당 후보에까지 올랐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그건 ‘기준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세 번째 기억도 애틋하지만, 세상의 모든 ‘첫’은 더욱 특별하게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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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명예의 전당’은 아니지만, 우리 기억 속 ‘처음의 전당’에 헌액된 박찬호.
우리가 기억하는 박찬호의 첫 번째 순간들을 모아봤다.
■ ‘위대한 역사의 서막’ MLB 구단과의 ‘첫 계약’
박찬호는 1994년 1월 14일 LA 다저스와 계약금 120만 달러에 계약했다. 출국 당시 공항을 찾은 몇 안 되는 기자들에게 “100억원을 벌어오겠다”는 농담을 던진 박찬호. 기자들과 박찬호 자신도 깔깔대며 웃기 바빴다. 하지만 박찬호는 빅리그에서 17년을 뛰며 100억의 10배인 1,000억원을 벌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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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근두근… 얼마나 떨렸을까…’ 아찔했던 ‘첫 등판’
그해 4월 8일 박찬호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홈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0:4로 뒤진 9회 초 등판한 것. 2타자 연속 볼넷을 허용한 뒤 2타점 2루타를 허용했지만, 후속 타자를 삼진·내야땅볼·삼진으로 마무리했다.
Chan Ho Park records his first major league strikeout | 04/08/1994 | MLB.com
ⓒ 박찬호의 빅리그 첫 등판(mlb.com)
■ ‘감격적인 첫 승’ 국내 언론의 대서특필
첫 빅리그 등판 이후 2년간 마이너리그에서 담금질에 들어갔던 박찬호. 다행히 1996시즌 스프링캠프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개막 로스터에 진입할 수 있었다. 보직은 중간계투. 그리고 4월 6일 시카고 컵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선발이었던 라몬 마르티네즈의 뒤를 이어 등판해 4이닝 무실점 삼진 7개를 잡아냈다.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승리투수가 된 박찬호. 국내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첫 승 이후 5일 후엔 플로리다 말린스전에서 선발로 등판하더니 이번엔 5이닝 무실점 삼진 6개로 첫 선발승까지 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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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개막전 선발 투수’ 사실상 팀의 ‘1선발’
2001년 4월 1일 박찬호는 한국인 최초로 MLB 개막전 선발 투수에 이름을 올렸다. 7이닝 5피안타 삼진 7개를 기록하며, 시즌 첫 승을 기록했다. 당시 FA를 앞두고 있던 박찬호는 15승 11패 방어율 3.50이라는 성적표로 2001시즌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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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들의 잔치 ‘첫 MLB 올스타전’ 출전
박찬호는 2001년 7월 11일 ‘별들의 잔치’라 불리는 올스타전에 한국인 최초로 출전하는 영광도 안았다. 3회 말 내셔널리그의 2번째 투수로 등판한 것. 당시 은퇴를 앞두고 있던 칼 립켄 주니어에게 홈런을 내주었지만, 후속 타자인 이반 로드리게스, 스즈키 이치로를 땅볼로 처리했고, 알렉스 로드리게스마저 삼진으로 잡아내며 1이닝을 마쳤다. 특히 칼 립켄 주니어에게 내준 홈런을 두고 대선배에 대한 예우가 아니었냐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낭만의 시대’였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정작 본인은 부정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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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 첫 홈런 기록까지’ 원조 이도류는 박찬호?
한국인 최초의 MLB 타자는 최희섭이다. 하지만 첫 홈런을 기록한 한국인 선수는 박찬호다. 2000년 8월 25일 몬트리올 엑스포스와의 경기에서 박찬호가 타석에서 첫 홈런을 신고한 것이다. 참고로 이날 경기에서 미국 국가를 부른 가수는 ‘양파’였다고 한다. 박찬호는 같은 해 9월 30일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원정경기에서 2호 홈런을 기록했고, 필라델피아 필리스 소속이던 2009년 4월 25일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경기에서는 통산 3호 홈런을 쏘아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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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우리 마음속 ‘최초’의 명예의 전당 헌액자
1936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헌액된 선수는 누구일까? 1호 헌액자는 1명이 아니라 5명이다. 물론 득표율로 따지면 1호 헌액자는 타이 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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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 콥(Ty Cobb, 98.2%)
- 베이브 루스(Babe Ruth, 95.1%)
- 호너스 와그너(Honus Wagner, 95.1%)
- 크리스티 매튜슨(Christy Mathewson, 90.7%)
- 월터 존슨(Walter Johnson, 83.6%)
혹자는 높은 ‘대체선수대비 승리기여도(WAR, Wins Above Replacement)’ 수치가 명예의 전당 입성을 보장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들 5명의 통산 ‘WAR’ 수치(Baseball-Reference 기준 bWA)를 다 더해보면, ‘736.1’이라는 수치가 나온다. 이들 선수가 (다른 대체 선수에 비해) 소속 팀에 각각 100승 이상의 승리를 안긴 것이다.
반면 박찬호의 MLB 통산 WAR 수치는 16~17 내외다.
물론 훌륭한 기록이지만, 박찬호의 존재감과 그 가치를 이 수치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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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놓였고, 대량 실업과 기업 도산으로 국민 정서 역시 극도로 위축된 상태였다.
외환위기로 인해 국가의 외환보유액이 거의 고갈됐고, 외채를 상환할 달러가 부족한 상황에 처했다.
이에 외화를 확보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금을 모아 외채 상환에 보태려는 ‘금 모으기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미처 종이를 준비 못한 미국 어느 팬이 박찬호를 보고 황급히 주머니에서 꺼내 내밀었을 2달러짜리 지폐 한 장.
당시 우리를 웃고 울렸던 달러 위에 박찬호가 사인을 했다. 굳이 또 한글 사인까지 추가했다.
박찬호는 이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눈물을 글썽이지 않았을까?
950원 정도였던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까지 치솟았을 때였으니 약 3,000원의 가치가 있는 지폐였다.
당시 국밥 한 그릇 가격이다. 식당 주인이 건네는 따뜻한 국밥 한 그릇에 나쁜 마음을 고쳐먹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2달러는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큰돈이었다.
달러와 박찬호. 1990년대 후반 대한민국을 압축해 놓은 것 같아 더 슬프게 느껴진다.
그런 국가적 위기 속에서 박찬호는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심어준 상징적인 존재였다. 국가 브랜드를 혼자 떠받친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박찬호 앞에서 ‘WAR’은 ‘그깟 WAR’이다. 1997년 통계청이 발표한 대한민국 인구수(추청치)는 약 4,590만 명이었다.
굳이 박찬호의 ‘WAR’을 다시 계산해보자면, ‘45,900,000’이라고 말하고 싶다.
박찬호 덕분에 45,900,000명의 작은 승리가 모여 그 시기를 이겨낼 수 있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박찬호는 우리 마음속의 ▲타이 콥이자 ▲베이브 루스, ▲호너스 와그너임과 동시에 ▲크리스티 매튜슨, ▲월터 존슨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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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제가 국가대표로서는, 선수로서 출전하는 거는 이젠 없을 거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국가대표 은퇴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데요.
좀 아쉽지만 여러분들께는 말씀을 드리고…
또 여러분들 통해서 팬들이나 국민들이나 WBC 출전을 희망하셨던 분들에게 사과를 드리고…
국가대표 선수 생활은 이제 끝이 날 것 같습니다.
제(필리스 입단) 기자회견이 캔슬(cancel)이 되면서, 내 위치가 그런가… 위치가…
그래서 좀 서운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사실 더 WBC에 출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었어요.
그래서 아쉽지만… 이걸 제가 달라고 해서… 한국에 갖고 와서…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통해서 한번 이 유니폼을 한번 보여주고…
이번에도 61번을 달았네요… 보여주고…
국가대표 태극마크는 달지 못하지만 이걸 입고 항상 그런 애정과… 죄송합니다…”
- 2009년 1월 13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박찬호 국가대표 은퇴 기자회견 中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을 앞두고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며, 많은 눈물을 쏟아내던 박찬호. 유독 ‘국가대표’라는 책임감과 긍지가 남달랐던 그였다.
아마 그동안 자신에게 보내준 국민들의 성원과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경기에 나섰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 뜨거운 눈물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박찬호가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게 한 가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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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는 언제까지나 우리들 마음속 명예의 전당 1호 선수로 헌액되어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