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키 콜라비토의 저주와 짐 토미
밤비노의 저주(1919-2003), 블랙삭스의 저주(1917-2004), 염소의 저주(1909-2015)가 차례대로 깨진 이후, 우승 가뭄이 가장 길게 이어지고 있는 팀은 클리블랜드 가디언스다.
1915년부터 인디언스로 불리기 시작한 클리블랜드는 1946년에 와후 추장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리고 1948년에 차지한 월드시리즈 우승이 마지막이 됐다. 와후 추장은 실존 인물이 아닌 가상의 캐릭터였다.
하지만 이 캐릭터는 아메리칸 원주민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희화화하고 인종차별적인 편견을 조장하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와후 추장의 저주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저주라고 하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1948)이 캐릭터의 등장(1946)보다 나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클리블랜드는 2019년에 와후 추장 캐릭터를 없앴고, 2022년에는 팀 명도 가디언스로 바꿨지만 우승 가뭄은 계속되고 있다.
사실 클리블랜드의 저주는 로키 콜라비토의 저주다. 보스턴 레드삭스가 베이브 루스를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하고 밤비노의 저주에 시달린 것처럼, 클리블랜드도 팀 최고의 선수인 콜라비토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로 보낸 후 암흑기가 시작됐다. 프렝크 레인 클리블랜드 단장은 "햄버거(콜라비토)를 주고 스테이크(하비 킨)을 받았다"고 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간판 선수를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했다는 건 팀의 투자가 부족했다는 뜻이고, 투자 부족은 나쁜 성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저주가 탄생한다.
1954년 월드시리즈에서 더 캐치(윌리 메이스)에 당한 클리블랜드가 1960년에 콜라비토를 트레이드를 하고 나서, 다시 한 번 월드시리즈에 오른 것은 1995년이었다. 1995년 클리블랜드에는 우타자인 콜라비토와 똑 닮은 좌타자가 있었다. 짐 토미였다. 클리블랜드는 토미가 콜라비토 이후 최연소 40홈런을 달성한 1997년에도 월드시리즈 진출을 만들어냈다(하지만 1995년, 1997년, 2016년 월드시리즈를 모두 패했다).
토미는 오른손잡이였다. 토미를 반강제적으로 우투좌타 선수로 만든 사람은 역시 야구 선수였던 토미의 둘째 형이었다. 3대에 걸쳐 집안의 거의 모든 남자들이 메이저리거에 도전한 토미의 가족은, 토미를 통해 마침내 메이저리그 선수를 배출했다. 5남매의 막내인 토미는 10명에 달하는 조카들의 대학 수업료를 모두 책임졌다.
클리블랜드의 지명을 받은 토미는 마이너에서 만난 찰리 매뉴얼 코치의 지도를 받아 방망이로 투수를 가리키는 듯한 특유의 준비 자세를 가지게 됐다. 매뉴얼은 영화 <내추럴>에서 주인공 로이 홉스(로버트 레드포드)의 동작을 보고 이를 만들었다.
토미는 공격은 뛰어났지만 수비가 문제였다. 클리블랜드는 버디 벨 코치에게 토미의 수비를 맡겼다. 벨의 지도를 받아 수비가 크게 좋아진 토미는 1995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데이빗 벨을 제치고 주전 3루수가 됐다. 데이빗 벨은 버디 벨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의 임무를 너무 잘해낸 탓에, 아들은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됐다.
토미는 일리노이주 피오리아 출신이었고, 피오리아에는 시카고 컵스의 싱글A 팀이 있었다. 토미는 자연스럽게 컵스 팬이 됐다.
토미는 8살 생일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리글리필드를 방문했다. 토미의 우상은 '킹 콩'으로 불린 데이브 킹맨이었다. 토미는 킹맨에게 사인을 부탁했지만, 평소에도 사인을 잘 해주지 않았던 킹맨은 토미를 무시하고 지나갔다. 이 장면을 본 포수 배리 푸트는 토미에게 공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클럽하우스로 들어가 여러 선수의 사인을 받아왔다. 훗날 토미는 누구보다도 사인을 열심히 해주는 선수가 됐다.
토미는 2001년 49홈런 124타점, 2002년 52홈런 118타점을 기록하며 절정을 구가했다. 그러나 클리블랜드는 그를 잡을 여력이 없었다. 콜라비토처럼, 토미도 떠나보내야 했다.
컵스에 입단하고 싶었던 토미는 리글리필드를 방문해 짐 헨드리 컵스 단장을 만났다. 그러나 컵스는 196cm의 장신 1루수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최희섭이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입단한 토미는 첫 2년 동안 47개와 42개의 홈런을 날렸고, 토미의 자리는 라이언 하워드가 물려 받았다.
토미는 팬과 동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집안 형편이 좋지 못했던 토미는 흑인 밀집 지역에서 자랐다. 그리고 일부 백인 스타 선수와 달리 인종 차별과 가장 거리가 먼 선수가 됐다. 토미를 알고 있는 모두가, 토미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2003년 클리블랜드 팬들은 토미를 클리블랜드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뽑았다(르브론 제임스가 등장하기 전이었다).
프로그레시브필드에는 아메리칸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인 래리 도비,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 프랭크 로빈슨, 테드 윌리엄스 시프트로 유명한 선수 겸 감독 루 부드루, 전설의 에이스 밥 펠러와 함께 토미의 동상이 세워졌다.
토미가 떠난 후에도, 클리블랜드는 최고의 선수들을 잡지 못하고 있다. 사이영 투수인 CC 사바시아와 클리브 리를 수상 다음 시즌에 2년 연속으로 트레이드하는 진기한 장면도 있었다. 매니 라미레스와 짐 토미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된 프란시스코 린도어도 뉴욕 메츠로 보냈다.
어쩌면 와후 추장의 저주, 로키 콜라비토의 저주는, 제3의 콜라비토, 제2의 토미가 나타나고 그를 장기 계약으로 잡을 때까지는 풀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