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승 투수 클레멘스의 영광과 몰락
로저 클레멘스(Roger Clemens, 63)라는 걸출한 우완 투수가 있었습니다.
위력적인 강속구와 불같은 승부욕으로 보스턴의 에이스로 시작해 토론토를 거쳐 뉴욕 양키즈의 선발 마운드를 책임졌고, 선수 말년에는 고향 텍사스의 휴스턴에서는 만 41세에 18승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MLB 통산 354승 184패, 평균자책점 3.12에 탈삼진 4,672개의 대단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역대 다승 9위에 탈삼진 3위입니다. 거기에 사이영상(Cy Young) 7회 수상, 아메리칸리그(AL) MVP 1회, 올스타 11회 등 각종 수상으로 크게 인정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게 새겨져 있는 클레멘스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역시 현장 취재를 떠났던 2003년 월드시리즈에서 그를 보내는 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만 40세였던 클레멘스의 마지막 시즌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결과적으로는 휴스턴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10월 하순 뉴욕의 양키스타디움은 꽤나 쌀쌀해 외야 기자실에서 외투를 입었었고, 반면 마이애미는 반팔 티셔츠의 여름 날씨였던 시리즈.
미국시간 10월 22일 마이애미 프로플레이어 스타디움에서 열린 4차전에 선발 등판한 마흔의 클레멘스는 7회까지 탈삼진 5개를 잡으며 3실점으로 역투했습니다.
그리고 클레멘스가 마운드를 내려오는 순간 제가 취재 현장에서 목격한 것 중에 첫 손에 뽑을 정도로 감동적인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그날 입장한 6만5934명의 팬들이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며 노장의 떠나는 길에 갈채를 보냈습니다. 물론 대부분 말린스 팬들이었지요. 워낙 승부욕이 강하고, 강속구 빈볼을 마다않는 투구로 상대팀 팬들에게 가장 미움받던 승부사였는데.......
그리고 이어서 말린스 더그아웃 앞으로 전 선수들과 코치들이 줄지어 나와서 박수치며 베테랑의 대단한 커리어에 대한 존중과 그리고 이별을 축복했습니다. 양키즈 선수들도 도열한 것은 물론이었습니다.
상대팀과 팬들에게 늘 증오의 대상이 되던 무서운 투수였지만, 야구에 대한, 대투수에 대한 팬들의 존중은 취재석에 앉아있던 기자의 가슴을 뜨겁게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클레멘스의 명예의 전당 입성은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그것도 후보 자격을 얻은 첫해에 무난히 선정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2004년부터 금지약물 관련 'BALCO 스캔들'이 터지면서 양상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배리 본즈, 제이슨 지암비 등의 타자들이 주로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 투수인 클레멘스는 무관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2007년 12월 긴 조사 끝에 '미첼리포트 (Mitchell Report)'가 발표되면서 클레멘스의 이름이 명시되면서 팬들과 언론의 시선은 존경에서 비난으로 싸늘하게 식어갔습니다. 특히 그의 개인 트레이너였던 브라이언 맥네이미가 클레멘스에게 금지약물 PED를 주사했다는 증언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 2월 13일 미 하원에서의 'MLB 약물 청문회'에 출석해 클레멘스는 약물 사용을 강하게 부인하면서 거짓 증언 논란과 함께 불에 기름을 끼얹은 셈이 됐습니다. 같은 청문회에 나선 맥네이미는 분명히 투약했다고 진술했고, 정황상 약물 투약은 너무도 명확해 보였던 겁니다.

'뉴욕 데일리뉴스'의 스포츠 취재팀이 각종 문헌과 관련자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로저 클레멘스의 몰락과 빅리그에서 스테로이드의 실상'이라는 책을 발간한 것입니다.
이 책은 본인은 물론 그의 부인인 데비 클레멘스도 금지약물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클레멘스가 부인을 부추겨 약물을 투입했다는 충격 증언을 실었습니다. 그 외에도 클레멘스의 감춰져 있던 여성 스캔들이 폭로되는 등 영웅 클레멘스의 추락은 이어졌습니다. 2010년 미 의회는 클레멘스를 위증 및 사법방해 혐의로 기소하기도 했습니다. 2012년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내려지기는 햤지만, 더이상 클레멘스의 진정성를 믿는 이는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리고 2013년 클레멘스는 은퇴 후 5년이 되면서 명예의 전당 후보 자격을 얻습니다.
약물 사건 전이었다면 거의 100% 첫해에 선정이 확실시되던 그였지만 투표인단 37.6%의 득표에 그쳤습니다. 필요한 75%의 딱 절반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0년간 조금씩 득표율이 오르긴 했지만 2022년 65.2%를 마지막으로 그는 후보 자격을 잃었습니다.
그러던 올해 MLB 명예의 전당 '야구 현시대 위원회(Contemporary Baseball Era Committee)'에서는 명예의 과거 전당 후보 자격을 잃은 선수 중에 재검토 8인의 후보를 선정했습니다. 과거에 탈락했더다고 기록이나 자격 등이 있다고 여겨지는 선수들에게 재기회를 주는 기회로, 클레멘스와 역대 최다 홈런의 배리 본즈도 이번에 후보였습니다.그러나 지난주 투표에서 8명 후보 중에 16명의 위원 중 75%인 12표 이상을 얻은 선수는 클레멘스의 휴스턴 동료이던 2루수 제프 켄트가 유일했습니다. 켄트는 후보 자격을 회복해 다시 명예의 전당 본투표 도전에 나섭니다.

그러나 클레멘스는 본즈와 함께 16명 위원 중 5표도 얻지 못해 HOF 후보 자격 재획득 실패는 물론, 규정에 따라 '5표 미만 득표'한 후보는 향후 5년간 현시대위원회에서 후보 자격을 잃게 됩니다. 즉, 클레멘스는 최소 2031년까지 다음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그리고 만약 2031년에 다시 '야구 현시대 위원회'의 후보 자격을 얻지 못하거나, 혹은 후보가 돼도 또 5표 이상을 얻지 못한다면 명예의 전당 재도전의 기회는 영원히 사라지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