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5툴 플레이어', 윌리 메이스 이야기
윌리 메이스 / 출처 - MLB.com
ㅡ레오 듀로셔 감독
윌리 메이스(Willie Mays)는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올라운드 플레이어이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스타입니다. 메이스는 1951년부터 1973년까지 통산 3005경기 2068득점 3293안타 660홈런 1909타점 339도루 타율 0.301 OPS 0.940 WAR 156.2승을 기록했고 올스타 24회(1959-62년 각각 2회씩), 신인왕, MVP 2회, 골드글러브 12회, 타격왕 1회, 홈런왕 4회, 도루왕 4회, 월드시리즈 우승 1회를 차지했는데요.
메이저리그 역사상 3000안타, 500홈런, 3할 타율을 동시에 달성한 타자는 행크 애런과 윌리 메이스뿐입니다. 하지만 오직 메이스만이 300도루를 달성했죠. 또한, 메이스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수비력을 지닌 외야수였습니다. 그는 골드글러브 제정 첫 해인 1957년부터 1968년까지 12년 연속 골드글러브(로베르토 클레멘테와 함께 외야수 역대 1위)를 수상했는데, 골드글러브가 3년만 일찍 생겼다면 15회 수상도 가능했을 겁니다.
대부분의 매체에선 메이스를 베이브 루스에 이어 역대 2위권 선수로 평가합니다. 하지만 메이스를 역대 최고로 꼽는 야구인 및 전문가도 생각보다 많은데요. 실제로 그와 동시대에 뛰었던 샌디 코팩스는 역대 최고의 선수로 메이스를 꼽으며 "루스는 메이스처럼 달리지도, 수비하지도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2020년 <디 애슬레틱> 역시 다재다능함을 근거로 '메이저리그 레전드 100인'에서 메이스를 1위로 선정했습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운동 재능

윌리 메이스 / 출처 - MLB.com
윌리 하워드 메이스 주니어(Willie Howard Mays Jr.)는 1931년 5월 6일, 미국 앨러배마주 웨스트필드에서 태어났습니다. 메이스의 아버지 윌리 하워드 메이스 시니어는 웨스트필드의 제철소에서 일했는데 '캣(Cat)'이라는 별명을 지닌 그는 지역 세미프로 야구리그에서 유명한 선수였고, 메이스의 어머니 애니 새틀화이트도 고등학교 시절 육상 선수이자, 농구 선수로서 팀을 3년 연속 주립 리그 우승으로 이끈 스타였죠.
하지만 메이스의 부모는 그가 세 살 때 헤어졌고, 이후 메이스는 아버지와 함께 지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기 때문에 메이스는 사실상 두 명의 고모인 사라와 어네스틴의 손에서 자랐는데요.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메이스가 태어나자마자, 그를 야구선수로 키우고 싶었던 아버지는 아들의 침대에 야구공을 넣어두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메이스는 아버지가 야구를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부모에게 운동 재능을 물려받은 메이스는 모든 스포츠 종목에서 천재성을 드러냈기 때문인데요. 고교 시절엔 미식축구에서 쿼터백을 맡았고, 농구에선 경기당 평균 20득점을 기록했을 정도였죠. 하지만 메이스는 어떤 종목보다 야구를 사랑했습니다. 메이스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캐치볼하는 시간을 기다렸고, 고교 시절 학교에 야구팀이 없었기 때문에 지역 세미프로팀에서 아버지와 함께 뛰었습니다.
메이스는 1947년 16세의 나이에 니그로-마이너리그팀인 채터누가 추추스에서 활약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듬해인 1948년 17세의 나이로 니그로리그의 명문 버밍햄 블랙바론스에 스카우트됩니다. 당연하게도 팀에서 최연소 선수였는데요. 학생 신분이었던 메이스는 주말 홈경기에만 출전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아버지의 친구이자, 블랙바론스의 감독 파이퍼 데이비스와의 만남은 메이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니그로리그의 천재 타자
윌리 메이스 / 출처 - MLB.com
17세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메이스는 1948년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와 플레이오프 시리즈 1차전 팀이 4-4로 맞선 11회말 2아웃 만루 상황에서 끝내기 안타를 터뜨리고, 2차전에는 9회말 2루타 후 동점 득점을 올리는 등 맹활약을 펼치며 소속팀 블랙바론스의 니그로리그 월드시리즈 진출을 이끌었습니다. 비록 홈스테드 그레이스에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지만, 메이스의 활약은 많은 메이저리그 팀들의 주목을 받았는데요.
당시 메이저리그는 1947년 4월 15일 재키 로빈슨의 데뷔로 인종 차별의 장벽이 허물어진 뒤였고, 젊은 흑인 선수 영입에 관심을 보이는 구단들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메이스는 고등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그가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죠. 메이스는 블랙바론스에서 뛰면서 1949년 타율 0.311, 1950년 타율 0.330을 기록했는데요. 이 시기 한가지 흥미로운 일화가 있습니다.
다저스의 포수 로이 캄파넬라(명예의 전당 헌액자)는 1949시즌 종료 후 윈터리그에서 뛰던 시기 블랙바론스와 경기에 출전했는데, 해당 경기에서 메이스가 중앙 담장 근처에서 뜬공을 잡은 후 엄청난 송구로 래리 도비(아메리칸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를 홈에서 아웃시키는 걸 지켜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자마자 다저스에 "스카우트를 보내 메이스와 당장 계약을 맺어야한다"고 전보를 날렸는데요.
하지만 다저스의 스카우트 위드 매튜스는 "그 아이는 커브를 제대로 치지 못한다"고 구단에 보고했습니다. 반면, 뉴욕 자이언츠의 스카우트 에디 몬태규의 생각은 달랐죠. 블랙바론스의 1루수 알론소 페리를 스카우트하던 중 메이스를 발견한 몬태규는 "메이스는 내 인생에서 본 가장 뛰어난 젊은 선수다. 그 아이는 거의 맨발로 뛰어다니는데, 당장 돈 보따리를 싸들고 아무나 보내서 잡아와야 한다"고 구단에 보고했습니다.
메이저리그의 부름을 받다

레오 듀로셔(왼쪽)과 윌리 메이스(오른쪽) / 출처 - MLB.com
메이스는 자서전 『세이 헤이(Say Hey)』에서 "몬태규는 페어필드에 있는 우리의 작은 집에 방문했고, 저는 처음으로 프로 계약서에 서명했습니다. 제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아버지도 서명하셨죠. 저는 계약금 4000달러, 월급 250달러의 급여를 받았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이후 메이스는 1950년 인터스테이트 리그(클래스B)의 트렌튼 자이언츠에 배정됐고, 그곳에서 타율 0.353 4홈런 55타점 OPS 0.947을 기록합니다.
인터스테이트 리그에서 뛴 최초의 흑인 선수였던 메이스는 경기마다 관중으로부터 온갖 욕설을 들어야 했습니다. 또한, 원정길에선 팀 동료들과 떨어져 흑인 전용 숙소에서 머물러야 했죠. 하지만 이 시기 따뜻했던 기억도 있었는데요. 백인 동료들이 메이스를 보러 숙소에 방문한 겁니다. 메이스는 "새벽 2시쯤, 선수 3명(허브 보에토, 에릭 로댕, 밥 이스터브룩)이 창문으로 들어와서 아침 6시까지 바닥에 누워있더라구요"라고 회상했습니다.
이듬해인 1951년 아메리칸 어소세이션(AAA)의 미니애폴리스 밀러스로 승격한 메이스는 첫 35경기에서 타율 0.477 8홈런 30타점 OPS 1.323을 기록했고, 5월 24일 메이저리그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메이저리그 투수와 맞붙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메이스는 콜업을 거부했는데요. 당황한 레오 듀로셔 감독은 메이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지금 타율이 얼마냐고 물었고, 메이스는 "0.477"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엔 달변가인 듀로셔조차도 순간 말문이 막혔고, 잠시 후 "구단에 손해끼치지 말고 당장 팀에 합류하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고 전해집니다. 메이스는 1951년 5월 25일 필라델피아와 경기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는데요. 듀로셔 감독은 20세의 메이스를 데뷔전부터 중견수 겸 3번 타자로 기용했고, 첫 12타석에서 안타가 없었던 메이스는 브레이브스전에서 워렌 스판을 상대로 홈런을 터뜨리며 빅리그 첫 안타를 기록했습니다.
약관의 나이로 스타덤에 오르다

뉴욕 자이언츠의 홈구장 폴로 그라운드 / 출처 - MLB.com
홈런 이후 메이스는 다시 13타수 무안타에 그치면서 타율이 0.038(26타수 1안타)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메이스는 라커룸에 앉아 울음을 터뜨렸고,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공을 못치겠다고 말했다고 하죠. 하지만 듀로셔 감독은 "내가 감독으로 있는 한, 중견수는 무조건 자네야. 자네는 내가 본 중견수 중 최고거든"이라 격려했고, 이후 반등에 성공한 메이스는 타율 0.274 20홈런 68타점 OPS 0.828을 기록하며 신인왕에 선정됐습니다.
메이스는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의 월드시리즈 진출을 이끌었는데요. 당시 자이언츠의 홈구장 폴로 그라운드는 비교적 짧은 좌/우측 담장(약 79-85m)과는 달리, 홈 플레이트에서 중앙 담장까지 거리가 무려 147m에 달하는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구장에 비해 중견수의 수비 난이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스의 중견수 수비는 곧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의 신인 시즌 가장 뛰어난 수비 중 하나는 피츠버그 전에서 나왔는데요. 로키 넬슨이 중앙 담장 쪽으로 날린 타구를 쫓아갔지만, 글러브로 잡기 용이치 않자 어깨 너머로 날아오는 공을 '맨손'으로 잡아낸 겁니다. 피츠버그 단장 브랜치 리키는 이 장면을 "내가 본 최고의 캐치"라고 극찬했습니다. 비록 양키스와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0.182(22타수 4안타)로 부진하면서 우승을 내줬지만, 20세의 중견수는 이미 스타가 되어 있었죠.
메이스는 1952시즌 첫 34경기에서 타율 0.236 4홈런 23타점 OPS 0.736을 기록한 후 한국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육군에 입대했습니다. 그는 입대 전 마지막 경기에서 라이벌 다저스의 팬들로부터 환호를 받으며 모두를 놀라게 했는데요. 버지니아주 포트 유스티스에 배정된 메이스는 1953년 7월 28일 제대하기 전까지 체육 강사로 복무하면서 육군 소속 야구팀인 포스 유스티스 휠스 소속으로 많은 경기(180경기)를 치렀습니다.
본격적으로 맞이한 전성기
윌리 메이스의 더 캐치/ 출처 - MLB.com
제대 후 이듬해인 1954년 3월, 자이언츠의 스프링 캠프에 합류한 메이스는 군생활 동안 키가 1.5cm 자랐고, 몸무게가 5kg 늘어나면서 5피트 11인치(180cm)에 180파운드(86kg)로 건장한 체격을 갖추게 됐습니다. 또한, 타격 시 몸을 더 세우고 홈 플레이트에 가깝게 붙는 방식으로 타격폼 수정함으로써 정확도를 향상시킬 수 있었죠. 그 덕분에 메이스는 1954시즌 타율 0.345 41홈런 110타점 OPS 1.078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타율(0.345)·3루타(13)·장타율(0.667)·OPS(1.078)·WAR(10.5) 부문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고, 메이스는 생애 첫 올스타와 함께 MVP에 선정됩니다. 메이스의 활약에 힘입어 직전시즌 70승 84패(0.455)로 NL 5위였던 자이언츠는 1954시즌 97승 57패(0.630)로 NL 1위에 오르며 월드시리즈에 진출했고,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4연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 유명한 '더 캐치(The Catch)'도 이 시즌에 나왔죠.
메이스는 폴로 그라운드에서 열린 월드시리즈 1차전 2-2로 맞선 8회초 1, 2루 위기에서 상대 타자 빅워츠가 친 중앙 담장 방면 425피트(130m)짜리 타구를 쫓아가 어깨 너머로 날아오는 공을 잡아냈는데, 이 수비는 지금까지도 야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로 꼽힙니다. 메이스의 '더 캐치'로 동점을 유지한 자이언츠는 연장 10회말 러스티 로즈의 끝내기 홈런으로 승리했고, 결승 득점의 주인공은 메이스였습니다.
이후 메이스는 1966년까지 13시즌 동안 평균 타율 0.315 40홈런 109타점 21도루 OPS 0.992 WAR 9.5승을 기록하며 전성기를 보냅니다. 다른 타자들이 평생 한번이라도 기록하길 꿈꾸는 성적을 13년간 기록한 것이죠. 같은 기간 그는 홈런왕 4회, 도루왕 4회를 기록했고 공·수·주를 종합한 WAR에서 무려 10차례나 1위에 올랐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그가 활약한 1950-60년대는 MLB 역사상 최악의 투고타저 시대였다는 겁니다.
샌프란시스코로 이전, 그리고 커리어 말년
윌리 메이스 / 출처 - MLB.com
그사이 자이언츠와 메이스에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선수 생활 초기부터 그를 지지해줬던 은사 듀로셔가 1955시즌을 끝으로 자이언츠를 떠난 후 메이스는 1956시즌 부임한 신임 감독 빌 리그니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하지만 메이스와 리그니의 관계는 1957시즌부터 개선됐고, 메이스는 이해부터 제정된 골드글러브를 12년 연속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자이언츠는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를 옮깁니다.
샌프란시스코로 이전한 자이언츠는 실스 스타디움에서 첫 2년을 보낸 후 1960년부터 새로운 홈구장인 캔들스틱 파크를 사용했는데요. 홈구장 캔들스틱 파크의 강한 바닷바람은 메이스의 홈런과 수비에 악영향을 끼쳤습니다(1960년 29홈런+8실책). 하지만 동물적인 감각으로 빠르게 새 구장에 적응한 메이스는 이듬해부터 예년 같은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고, 1961년 4월 30일에는 한 경기에 홈런 4방을 때려내기도 했죠.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뉴욕 시절 최고의 스타였던 메이스가 샌프란시스코로 온 후에도 계속해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첫 4시즌 동안 팬들의 야유를 견뎌야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메이스가 1962년 홈런왕(49개)에 오르면서 자이언츠의 월드시리즈 진출을 이끌자, 야유는 환호로 바뀌었습니다. 1965년 34세의 메이스는 커리어 하이 52홈런을 기록하며 1954년 이후 11년 만에 두 번째 MVP를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1966년 타율 0.288 37홈런 103타점 OPS 0.924를 기록한 것을 마지막으로 하락세에 접어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스는 1967년부터 1971년까지 5년간 평균 타율 0.280 21홈런 70타점 10도루 OPS 0.851 WAR 5승으로 엘리트급 성적을 남깁니다. 하지만 자이언츠는 1972년 그를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했고, 메이스는 메츠에서 2년간 타율 0.232 14홈런 47타점 OPS 0.733을 기록한 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은퇴 후의 삶
오라클 파크 앞에 위치한 윌리 메이스의 동상 / 출처 - MLB.com
메이스의 660홈런은 은퇴 시점 기준 베이브 루스(714홈런), 행크 애런(755홈런)에 이어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습니다. 그리고 1972시즌 중반 애런이 추월하기 전까진 루스에 이은 역대 2위이자, 1970시즌까진 유이한 600홈런 타자이기도 했죠. 이는 그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하면서도 꾸준한 선수였기에 가능했던 기록입니다. 한편, 메이스에겐 다른 슈퍼스타에게선 보기 힘든 '6번째 툴'이 있었는데요.
바로 소탈한 인품입니다. 메이스의 별명인 '세이 헤이 키드(Say Hey Kid)'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이봐'라고 말하며 스스럼없이 다가갔기 때문에 생긴 별명입니다. 실제로 메이스는 최고의 스타가 된 후에도 시간만 나면 할렘 거리에 나가 나무 막대기를 들고 아이들과 야구를 즐겼고, 뛰어난 야구 실력과 함께 이러한 소탈한 면모는 메이스가 현역 시절뿐만 아니라 은퇴 후에도 많은 야구 팬들로부터 사랑받는 비결이었습니다.
메이스는 1979년 첫 번째 투표에서 94.7%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뉴욕 메츠는 그의 등번호 24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은퇴 후 메이스는 1979년까지 메츠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활동했고, 1986년 단장 특별 보좌로 복귀한 뒤 2024년 6월 18일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의 요양원에서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이언츠의 파트타임 컨설턴트로 일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