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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디마지오의 동생 젠틀맨 도미니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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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디마지오(DiMaggio)'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습니다.
꼭 야구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미국 역사를 좀 알거나 마릴린 먼로를 좋아하거나 혹은 역대급 듀엣 '사이먼과 가펑클'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디마지오'라는 이름은 익숙하거나 혹은 '아, 분명히 들어봤는데' 정도의 반응은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디마지오는 바로 '조 디마지오'입니다.
야구팬들에게는 영원한 영웅으로 남아있는 이름이고, 저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선수 중 하나입니다.
도저히 넘어서기 어려운 불멸의 기록에 가까운 56경기 연속 안타, 그리고 마릴린 먼로와의 영원한 사랑으로도 팬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선수였습니다. 마릴린 먼로와는 짧은 결혼 생활 끝에 이혼하고 말았지만, 그녀의 장례식을 도맡아 진행했고, 매주 그녀의 무덤에 장미꽃 다발을 빼놓지 않고 보냈습니다.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한 말이 "이제 마릴린을 만날 수 있겠네."라고 하지요.
사이먼&가펑클은 히트곡 'Mrs. Robinson'에는 '조 디마지오, 당신은 어디로 갔나요? 전국의 외로운 영혼들이 당신을 찾고 있는데요....'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많은 미국팬들에게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조 디마지오는 이탈리아 시칠리아계 이민자인 어부의 아들로 그의 본명은 '주세페 파올로 디마지오 주니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조 디마지오가 9남매 중의 8번째였다는 사실과 또한 그와 함께 3형제가 메이저리그에서 동시대에 뛰었다는 사실은 국내 팬들에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조 디마지오의 형 빈스 디마지오와 그리고 막내 돔 디마지오도 메이저리그를 풍미했던 선수들이었습니다.
그중에 오늘은 막내 돔 디마지오(Dominic Paul 'Dom' DiMaggio, 1917-2009)의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돔(Dom)이라는 애칭으로 보스턴 레드삭스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그는 1940년부터 1953년까지 14년간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는데 데뷔부터 은퇴까지 오직 레드삭스의 유니폼만 입고 뛰었습니다.
디마지오 3형제는 특이하게도 모두 중견수로 활약했습니다. 형 빈스 디마지오는 신시내티 레즈를 포함해 NL의 5개 팀에서 중견수로 활약했고, 조 디마지오는 AL 최강팀 양키즈의 전설적인 중견수였습니다..
그리고 막내 돔은 양키즈의 라이벌인 보스턴 레드삭스의 펜웨이파크 중원을 책임지며 뛰어난 1번 타자로 활약했던 선수였습니다.
형 조 디마지오가 워낙 전설적인 선수였기 때문에 그 그늘에 묻히는 경우가 많았지만, 돔 디마지오도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한 시즌이 4번에 득점왕 두 번, 그리고 3루타와 도루도 각각 한 번씩 리그 최고를 기록한 아주 빠르고 재능있는 타자였습니다.
7번이나 올스타에 선정됐을 정도로 당대에 인정받던 외야수이자 리드오프 타자였습니다.

 

그리고 특히 수비도 발군이어서 AL에서 3번이나 한 시즌 가장 많은 보살(assist)을 기록했고, 외야수 아웃과 병살도 두 번이나 리그 리더였습니다. 골드글러브가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트로피는 없었지만, 지금까지도 레드삭스 역대 최고의 중견수 논쟁을 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입니다.
특히 1948년에 기록한 526번의 기회에서 503 아웃을 기록한 것은 30년 가까이 AL 최고 기록이었습니다.
중견수로만 1,338경기를 뛴 것은 그가 은퇴할 당시 AL 8위의 기록이었습니다. 그리고 1949년 기록한 34경기 연속 안타는 아직도 레드삭스의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1912년에 트리스 스피커가 세운 30경기 연속 안타가 레드삭스 최고 기록이었는데, 돔이 이 기록을 1949년에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1997년에 노마 가르시아파라가 30경기 연속 안타를 치고는 행진이 중단됐습니다.
실은 참 대단한 기록인데 형 조가 56경기 연속 안타를 친 바람에 상대적으로 묻혀버린 기록이 됐습니다.

 

그런데 돔 디마지노는 키가 크고 건장한 형들과는 달리 외모로는 도저히 운동선수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단 키도 1m75에 불과했고 동그란 테의 안경을 낀 모습은 스포츠맨이라기보다는 학자풍이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별명은 '작은 교수님(The Little Professor)'이었습니다.
안경을 낀 운동선수가 극히 드물었던 당시여서 돔을 묘사하는 기사의 단골 문구는 '안경을 끼고도 저렇게 눈부신 수비를 할 수 있다니!!!'였습니다.

돔 디마지오는 형 조와 마찬가지로 마이너리그인 샌프란시스코 실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39년 3할6푼1리의 맹활약을 펼치자 레드삭스가 그를 사들였습니다. 그리고 돔은 루키 시즌에 3할1리를 기록하며 곧바로 레드삭스의 1번 타자로 자리를 굳혔습니다.
레드삭스의 전설인 우익수 테드 윌리엄스, 좌익수 덕 클레이머와 함께 세 명이 모두 3할을 치는 막강 외야진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1941년과 1942년에는 각각 100득점 이상을 올렸고 도루와 2루타도 모두 톱 10에 들면서 연속으로 올스타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까칠하고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했던 테드 윌리엄스는 '내가 함께했던 최고의 팀메이트'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하기도 했습니다. 연습부터 경기까지 둘은 늘 한 몸처럼 움직였다고 합니다.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까지 '테드와 돔'은 레드삭스의 상징이었습니다.

앞서 돔이 레드삭스에 14년간 몸담았다고 설명했지만 실제로 뛴 기간은 11년이었습니다.
1943년 해군으로 입대해 2차대전에 참전한 돔은 3년을 전장에서 보냈지만, 제대 후 복귀한 첫 시즌에 더욱 뛰어난 모습을 보이며 레드삭스 팬들을 열광시켰습니다.
3년간의 공백을 딛고 다시 녹색 다이아몬드로 돌아온 1946년 돔 디마지오는 3할1푼6리의 활약으로 레드삭스를 28년 만에 첫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세인트루이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돔은 최고의 영웅으로 탄생할 뻔했습니다.

 

3승3패에서 만난 최종 7차전 8회초 투아웃에 돔 디마지오는 2타점 적시타를 터뜨리며 3-3으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나 2루로 달리던 그는 햄스트링 부상으로 대주자로 교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9회말 카디널스의 해리 워커가 중견수 쪽에 결승 2루타를 치면서 에노스 슬러터가 홈을 밟아 레드삭스는 또 한 번 밤비노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만약 돔이 있었더라면....'이라며 레드삭스 팬들은 탄식했지만, 돔은 더그아웃에서 뼈아픈 패배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돔은 11년간 1680안타를 쳤는데, 20대 후반의 전성기 3년을 뛰었더라면 2000안타는 훌쩍 넘었을 것이라고 모두 입을 모읍니다.
통산 출루율 3할8푼3리를 기록한 돔은 1952년에도 올스타에 선정될 정도로 좋은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만 36세가 되던 1953년 시즌 초반 돔은 돌연 은퇴를 선언해 레드삭스 팬들에게 충격을 안겼습니다. 
돔은 스프링캠프 때부터 시력, 타구 판단, 몸 반응 속도에서 미세한 저하를 느꼈다고 했습니다. 팀메이트들도 못 느낄 정도로 티가 잘 안 났지만, 자신은 '내 플레이가 예전 같지 않다.'라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다가 결국 전격 은퇴를 선언한 것입니다.
테드 윌리엄스가 늘 '돔은 자기 자신에게 너무 엄격한 선수'라고 말하곤 했는데, 스스로의 기준으로 볼 때 팬들과 동료들에게 조금이라도 폐가 되는 플레이를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습니다. '넌 여전히 우리 팀의 최고 CF야!!'라는 테드 윌리엄스의 설득도 그의 마음을 돌리진 못했습니다. 100% 자발적인 은퇴라니.

 

은퇴 후 돔은 사업가로도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담요, 섬유 제조 회사 운영했고, 수입, 유통 회사 경영에 참여했으며, 해운업 및 물류 관련 비즈니스로도 확대했습니다. 뉴잉글랜드 지역의 여러 중소기업 투자자로 활동하면서 MLB 은퇴 선수 중 가장 성공한 사업가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또한 보스턴 지역 사회에서 교육, 청소년, 보훈 활동에 꾸준히 참여했습니다.
지역 학교 장학 기금을 꾸준히 기부하고, 레드삭스팀 행사 등에도 최대한 많이 참석했습니다. 지역 언론을 돔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절대 외면하지 않는 신사'로 묘사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돔 디마지오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레드삭스 맨'이었습니다.
2009년 92세이던 돔은 말년에 폐렴으로 고생했지만, 레드삭스 경기라면 녹화를 해서라도 놓치지 않고 봤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 매리온에 있던 자택에서 5월 9일 타계하던 순간에도 돔은 아들 도미니크 폴 디마지오 주니어와 함께 전날 벌어진 레드삭스와 인디언스의 경기 녹화 방송을 보고 있었습니다. 6회에 레드삭스가 12점을 올리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돔은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돔 디마지오는 뛰어난 야구 선수였고 성공적인 사업가였으며, 또 더욱 위대한 아버지이자 가장으로 주위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의 딸인 에밀리 디마지오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들려주었습니다. 돔 디마지오의 집은 항상 동네 아이들로 북적였다고 합니다. 야구를 비롯한 운동 기구도 아주 많았고 아이들의 친구들이 몰려와 노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야구 경기를 하다가 공을 잃어버린 아이들은 돔의 장식장 안에 있는 야구공을 발견했습니다. 유명 선수들의 사인이 잔뜩 담겨있는 소중한 공이었지만, 아이들은 야구를 할 공이 필요했습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돔은 늘 하던 대로 자신이 아끼던 장식장의 기념품들을 둘러보는데, 소중한 사인공이 녹색 잔디 물과 진흙 등으로 잔뜩 더럽혀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이들이 사실대로 이야기하자 돔의 첫 반응은 "그래서 경기는 이겼니?"였습니다.
그것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역대 첫손에 꼽을만한 야구 선수면서 동시에 멋진 신사였던 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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