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과소평가된 에이스', 로빈 로버츠
ㅡ랄프 카이너(명예의 전당 헌액)
로빈 로버츠는 MLB 역사상 가장 과소평가된 투수 중 한 명입니다. 로버츠는 1948년부터 1966년까지 19시즌 통산 286승 245패 4688.2이닝 2357탈삼진 평균자책점 3.41을 기록했는데요. 특히 1950년부터 1959년까지 408경기 199승 149패 237완투 3011.2이닝 1516탈삼진 평균자책점 3.32 WAR(승리기여도) 60.4승으로 경기수·이닝·완투·WAR 부문 1위, 다승·탈삼진 부문 2위를 기록한 1950년대 최고의 투수였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 메이저리그는 윌리 메이스, 미키 맨틀, 행크 애런을 비롯한 역대급 타자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로버츠는 최전성기였던 1952-55시즌 4년 연속 다승 및 완투 1위를 비롯해 굵직한 성과를 남기며 MVP 순위권에 들었지만, 최고의 활약을 펼친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이 영 상은 1956년에 제정됐습니다. 이후 1960년대 메이저리그는 밥 깁슨, 샌디 코팩스, 탐 시버를 비롯한 투수들의 시대가 열렸는데요.
불행하게도 로버츠의 전성기는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 때문에 로버츠는 7년 연속 올스타(1950-56), 4년 연속 다승왕(1952-55), 2년 연속 탈삼진왕(1953-54)이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수상 경력을 쌓지 못했죠. 결국 1950년부터 1955년까지 연평균 323이닝을 던진 그는 만 29세를 기점으로 급격한 기량 하락을 겪었고, 그 결과 오늘날 로버츠의 이름은 대부분의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잊히고 말았습니다.
일리노이의 고집쟁이 소년

로빈 로버츠 / 출처 - MLB.com
로빈 에반 로버츠(Robin Evan Roberts)는 미국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웨일즈계 이민자 톰 로버츠와 영국계 이민자 사라 로버츠 사이의 여섯 자녀 중 다섯 째로 태어났습니다. 석탄 광부였던 그의 아버지 톰은 제1차 세계대전에 영국군으로 참전한 후 고향인 랭커셔의 탄광으로 돌아갔지만, 1921년 파업으로 일자리를 잃은 뒤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미국의 석탄 지대인 일리노이주로 이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일리노이의 광산도 쇠퇴하기 시작하자 톰은 광부를 그만두고 작은 농장을 운영했습니다. 어린 시절 로버츠는 농장 일도, 집안일도 싫어했는데요. 아버지의 꾸지람도, 어머니의 타이름도 소용이 없었죠. 그는 한시도 공에서 손을 떼지 않았고, 어머니를 향해 "언젠가 프로 선수가 돼서 집을 사드리겠다"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훗날 아버지도 "로빈이 하겠다고 하면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라고 회고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고집'은 로버츠가 투수로서 가지고 있던 특징이기도 했습니다. 로버츠는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 특히 야구에 푹 빠져 있었는데요. 그는 12세부터 친구들과 팀을 조직해 야구를 했고, 틈만 나면 고향팀 스프링필드 브라운스의 경기를 보러 다녔죠. 하지만 고교 졸업 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예비 항공대 프로그램에 등록했던 그는 전쟁이 끝난 뒤 미시간 주립대에 다닐 때 처음에는 대학 야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로버츠는 신입생 시절 농구 선수로만 뛰면서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로부터 '올해의 선수'로 선정됐습니다. 그가 대학 야구를 시작한 것은 이듬해부터였는데요. 1946년 봄, 예고 없이 연습에 나타난 로버츠는 야구 팀의 코치인 존 콥스가 그에게 어떤 포지션을 맡고 싶은지 묻자 "어떤 포지션이 필요하세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콥스가 "투수"라고 답하자 로버츠는 "그럼, 제가 한번 던져보죠 뭐"라고 말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약속을 지키다

로빈 로버츠 / 출처 - MLB.com
놀랍게도 고교 시절 주로 3루수를 맡았던 로버츠는 투수로 포지션을 옮긴 첫 해부터 대학 최고의 투수로 떠올랐는데요. 그는 그레이트레이크 해군 훈련소와 경기에서 미시간 주립대 역사상 최초로 노히터를 달성하는 등 첫 시즌을 4승 2패로 마쳤고, 로버츠의 재능에 깊은 인상을 받은 미시간 대학의 감독이자, 전직 메이저리거 레이 피셔는 자신이 코치로 있는 노던 리그의 트윈시티 트로이언스에 로버츠를 초대했습니다.
이듬해인 1947년, 로버츠는 17연승을 포함해 18승 3패 평균자책점 2.33을 기록하면서 트로이언스의 노던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그 성과에 힘입어 필라델피아 필리스, 뉴욕 양키스, 보스턴 브레이브스, 보스턴 레드삭스를 포함해 최소 MLB 5팀으로부터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팀은 필리스였는데요. 필리스의 스카우트 척 워드는 처음 본 순간부터 로버츠의 재능을 알아차리고 그를 1년 이상 따라다녔습니다.
필리스는 1947시즌 종료 후 로버츠에게 계약금으로 1만 달러를 제안했는데요. 미시간 주립대로 돌아가서 농구 선수로 마지막 시즌을 뛸 예정이었던 로버츠가 주저하자 필리스는 다음날 1만 5000달러를 제안했고, 이틀 후에는 2만 5000달러로 제안액을 높였습니다. 결국 필리스의 제안을 수락한 로버츠는 부모님에게 1만 9000달러짜리 집을 선물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로버츠는 1948년 필리스의 스프링 캠프에 초대됐지만, 대학 졸업을 위해 겨울 학기를 다니는 바람에 합류가 늦었습니다. 게다가 도착하자마자 부드럽고 모래가 많은 잔디 위에서 운동을 하다가 다리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며칠간 투구조차 하지 못했는데요. 라커룸에서 낙담해 있는 로버츠를 본 필리스의 감독 퍼킨스는 그의 자신감을 북돋아 줬고, 로버츠는 첫 등판에서 3이닝 퍼펙트를 기록하며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필라델피아 '위즈 키즈'의 에이스

로빈 로버츠 / 출처 - MLB.com
스프링 캠프 이후, 로버츠는 산하 마이너리그 팀인 윌밍턴으로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로버츠가 마이너리그에 머무는 기간은 길지 않았죠. 그는 1948년 4월 29일 프로 데뷔전에서 9이닝 1실점 17탈삼진을 시작으로 5연속 완투승을 거두는 등 11경기에서 9승 1패 96이닝 121탈삼진 평균자책점 2.06을 기록한 후 6월 17일 필리스로 콜업됐습니다. 그리고 클럽하우스에 도착한지 2시간 만에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릅니다.
로버츠는 데뷔전에서 피츠버그에 8이닝 2실점 완투패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등판에서 신시내티를 상대로 9이닝 2실점 완투승을 거두는 등 7승 9패 평균자책점 3.19으로 데뷔 시즌을 마칩니다. 시즌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로버츠는 누나의 소개로 위스콘신 대학을 갓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던 메리 앤 칼네스를 만납니다. 로버츠는 처음 본 순간 메리에게 반했고 둘은 이듬해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로버츠는 1949년 15승 15패 226.2이닝 95탈삼진 평균자책점 3.69를 기록했고, 만년 꼴찌팀이었던 필리스도 리그 3위로 시즌을 마쳤습니다. 필리스가 3위 이상을 기록한 것은 32년 만이었는데요. 특히 시즌 마지막 30경기에서 19승(11패)을 거두며 주목받았죠. 그러자 <엔터프라이즈 어소세이션>의 스포츠 기자 해리 그레이슨은 젊고 재능 있는 선수들이 많은 필리스에게 '위즈 키즈(Whiz Kids)'라는 별명을 지어줬습니다.
이듬해인 1950년 로버츠는 20승 11패 304.1이닝 146탈삼진 평균자책점 3.02로 올스타에 선정되며 전성기의 시작을 알립니다. 특히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3연속 완봉승을 거뒀고, 정규시즌 최종전에서 2위 다저스를 상대로 10이닝 1실점 완투승을 거두면서 필리스를 35년 만에 리그 1위로 이끌었죠. 필리스의 월드시리즈 상대는 조 디마지오, 요기 베라, 화이티 포드가 이끄는 당대 최강팀 뉴욕 양키스였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시리즈에서 맛본 패배

로빈 로버츠 / 출처 - MLB.com
필리스는 다저스와 정규 시즌 최종전에서 10이닝 완투승을 거둔 에이스 로버츠를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기용할 수 없었죠. 이에 따라 에디 소여 감독은 정규시즌 16승 7패 22세이브 평균자책점 2.66을 기록한 마무리 짐 콘스탄티를 1차전 선발로 기용하는 변칙적인 전략을 구사했는데요. 콘스탄티는 한차례도 선발 투수로 등판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8이닝 4피안타 1실점으로 기대 이상의 투구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타선이 양키스 선발 라스키에게 9이닝 2피안타 5탈삼진 무실점으로 틀어막히면서 필리스는 0-1으로 1차전을 내줬습니다. 시리즈 1패를 안은 채로 월드시리즈 2차전에 등판한 로버츠는 2회 볼넷과 안타 2개를 허용하면서 선취점을 내줬지만, 필리스도 5회 리치 애쉬번의 희생플라이로 1-1 동점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양 팀 투수가 모두 9회까지 추가 실점을 하지 않으면서 승부는 연장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로버츠는 1-1 동점 상황에서 연장 10회 초에도 마운드에 올랐고, 새로운 이닝 양키스의 선두타자로 들어선 건 다름 아닌 조 디마지오였는데요. 로버츠는 앞선 4번의 승부에서 디마지오를 모두 뜬공 아웃으로 돌려세웠습니다. 하지만 5번째 승부에서는 디마지오에게 주무기인 높은 패스트볼을 공략 당하면서 역전 솔로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고, 결국 10회 말 무득점에 그치면서 필리스는 시리즈 2패째를 내주게 됩니다.
양키스는 3차전과 4차전에서 승리하면서 월드시리즈 2연패를 달성했습니다. 로버츠는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4차전에서 0-5로 뒤져있던 8회 팀의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해 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으나 패배를 막을 순 없었죠. 이는 그의 커리어에서 마지막 월드시리즈 등판이기도 했는데요. 로버츠는 이후로도 압도적인 활약을 이어갔지만, 필라델피아는 26년 후인 1976년에서야 다시 가을야구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1950년대 메이저리그 마운드의 지배자

로빈 로버츠 / 출처 - MLB.com
로버츠는 1950년부터 1955년까지 6년 연속 20승을 기록했고, 1952년부터 1955년까지는 4년 연속 다승 1위에 올랐습니다. 또한 6년 연속 300이닝을 돌파했고, 이닝과 완투에서 5번이나 1위에 올랐죠. 특히 1952년에는 28승 7패 330이닝 148탈삼진 ERA 2.59를 기록하며 <스포팅뉴스>가 선정한 '올해의 MLB 선수'가 됐고, 1953년과 1954년에는 각각 탈삼진 198개, 185개로 2시즌 연속 탈삼진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전성기의 로버츠는 리그를 지배하는 투수였지만, 6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된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수상 경력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1952년 MVP 투표에서도 컵스 외야수 행크 사우어(타율 0.270 37홈런 21타점 OPS 0.892)에게 밀려 2위에 그쳤습니다. 1952년 로버츠의 베이스볼레퍼런스 WAR(승리 기여도)는 8.6승, 사우어는 5.6승이었습니다. 둘의 차이는 사우어는 타자, 로버츠는 투수였다는 것뿐이었죠.
당시 MLB 커미셔너였던 포드 프릭은 로버츠와의 식사 자리에서 투수들이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투수만을 위한 상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1956년 사이영상을 제정하게 되는 계기가 됐는데요. 하지만 6시즌 연속 300이닝을 소화하면서 그의 팔은 소모될 대로 소모되어 있었고, 로버츠는 1956년 19승 18패 297.1이닝 128탈삼진 ERA 4.45로 7시즌 연속 20승과 300이닝 달성에 실패합니다.
시즌 내내 팔을 끝까지 뻗지도 못할 정도로 통증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주무기인 패스트볼의 위력이 감소했기 때문이었죠. 로버츠는 1957년 10승 22패 249.2이닝 128탈삼진 ERA 4.07으로 2년 연속 최다패를 기록했지만, 1958년 17승 14패 269.2이닝 130탈삼진 ERA 3.24로 반등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2년 연속 4점대 ERA에 그친 후 1961년 1승 10패 117이닝 54탈삼진 ERA 5.85를 기록하자 양키스로 트레이드됩니다.
플레이 스타일

로빈 로버츠 / 출처 - MLB.com
전성기 시절 로버츠는 타자와 정면 승부를 고집했는데요. 동시대에 함께 뛴 전설적인 타자들의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당대 최고의 강속구 투수였고, 이를 바탕으로 '칠 테면 쳐보라'는 식으로 스트라이크를 던졌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라이브볼 시대 투수 중 가장 적은 9이닝당 볼넷(1.73개)을 기록할 수 있었죠. 또한, 이런 공격적인 피칭 스타일은 그를 통산 305번의 완투를 기록한 이닝이터로 만들어줬습니다.
반면,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그는 유인구를 던지는 걸 싫어했기에, 강력한 구위에 비해 탈삼진(9이닝당 4.5개)이 적었습니다. 게다가 너무 공격적인 피칭 스타일로 인해 통산 505개의 홈런을 허용했죠. 이는 훗날 제이미 모이어(522개)가 넘어서기 전까지 역대 최다 피홈런 기록이었습니다. 단, 로버츠가 허용한 홈런 가운데 약 64%는 솔로 홈런이었습니다. 이 역시 공격적인 투구로 볼넷을 최소화했기에 가능한 수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시련을 겪으면서 고집스러웠던 투구 스타일에도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1961시즌 종료 후 양키스로 트레이드된 그는 이듬해 시범경기에서 3이닝 동안 4실점에 그친 뒤 정규 시즌에는 등판하지도 못한 채 1962년 4월 25일 방출됐습니다. 로버츠는 이 시점에서 현역 은퇴를 고민했지만, 자신의 첫 감독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퍼킨스의 설득으로 은퇴를 유보한 그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볼티모어 이적 첫 해인 1962년 10승 9패 191.1이닝 ERA 2.78을 기록하며 반등에 성공했습니다. 로버츠는 원래부터 강속구뿐만 아니라 뛰어난 제구력을 갖춘 투수였습니다. 다만, 전성기에서 내려온 후에도 한동안 자신의 공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죠. 그러나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과거만큼 강하게 던지지 못하더라도 정확한 위치로 공을 던지면 타자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커리어 말년

로빈 로버츠 / 출처 - MLB.com
이후 로버츠는 1963년 14승 13패 251.2이닝 ERA 3.33을, 1964년 13승 77패 204이닝 ERA 2.91을 기록하며 제2의 전성기를 보냅니다. 하지만 1965년 로버츠는 38세였고 스티브 바버, 밀트 파파스, 데이브 맥널리, 월리 벙커와 같은 출중한 젊은 선발 투수들이 있었던 볼티모어는 그를 선발진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또한, 이해 볼티모어에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만 19세의 신인 투수 짐 팔머도 있었습니다.
볼티모어는 로버츠에게 그의 나이에 절반밖에 되지 않는 팔머와 함께 원정 숙소를 써줄 것을 부탁했는데요. 젊은 파머가 대선배와 함께 하면서 배울 것이 많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죠. 어느날 팔머는 로버츠에게 "투구란 무엇인지에 대해 알려달라"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로버츠는 "골치 아픈 생각은 던져버리고 잠이나 자"라고 말했다고 하죠. 훗날 파머는 이를 살면서 받은 가장 훌륭한 조언이라고 회고했습니다.
로버츠는 파파스의 부상으로 5월부터 다시 선발진에 투입됐고 4연속 완투승을 거뒀지만, 이후 1승 7패 ERA 3.87에 그치자 볼티모어는 7월에 그를 방출했습니다. 그러나 5일 뒤 휴스턴과 계약을 맺은 로버츠는 10경기에서 5승 2패 ERA 1.89라는 눈부신 성적을 거두며 1965시즌을 19승 9패 190.2이닝 ERA 2.78로 마쳤습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그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뼛조각을 제거하기 위해 팔꿈치 수술을 받습니다.
'45세까지 던지겠다'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로버츠는 1966년 3승 5패 ERA 3.82를 기록한 후 휴스턴에서 방출됐고, 컵스로 이적해서도 2승 3패 ERA 6.14에 그쳤습니다. 시즌 종료 후 컵스는 코치 계약을 제시했지만, 현역 연장을 원했던 그는 마이너리그 구단과 계약을 맺은 후 6월까지 5승 3패 ERA 2.48을 기록했는데요. 그런데도 MLB 구단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지 못하자 비로소 현역에서 은퇴했습니다.

은퇴 후의 삶

로빈 로버츠 / 출처 - MLB.com
은퇴 후 로버츠는 오전에는 필라델피아 라디오 방송국인 WPEN에서 스포츠 쇼를 진행하고, 오후에는 친구가 운영하는 투자 회사에서 일하면서 재정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직업적인 성공과는 별개로 그는 야구를 늘 그리워했는데요. 그러나 친정팀인 필라델피아를 비롯한 MLB 구단들은 현역 시절 선수 노조의 대표로서 선수의 복리후생 및 권익 향상을 위해 힘쓴 로버츠에게 분개심을 품고 있었죠.
이에 따라 로버츠의 메이저리그 복귀는 번번이 무산됐습니다. 하지만 1976년 사우스 플로리다 대학(USF)의 감독을 맡으면서 야구계에 복귀할 수 있었는데요. 이해 로버츠는 86.9%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로버츠는 USF의 감독으로 일하면서 많은 제자를 메이저리그로 보낸 후 코치로서도 명예롭게 은퇴했습니다. 그리고 2010년 5월 6일, 플로리다의 자택에서 만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