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구력, 그 이상의 승부사'.. 매덕스와 기억력
현대 야구의 틀이 정립된 이래 투수의 제구력을 설명할 때 그렉 매덕스는 가장 먼저, 그리고 자주 언급되는 선수입니다. ‘제구의 마법사’라는 수식어는 진부할 지경이고, 극도로 정교한 제구력을 뜻하는 ‘핀 포인트 컨트롤’이라는 말이 대중적으로 사용된 것도 매덕스의 영향입니다.
야구에서 홈플레이트의 너비는 17인치(43.18cm)입니다. 매덕스의 전성기를 본 사람들은 그가 홈플레이트의 가운데 15인치는 쓰지 않고 양쪽 1인치(2.54cm)만 활용해 투구한다고 했습니다. 그마저도 최전성기 때는 양쪽 0.5인치만 쓴다는 평가까지 받았습니다. 여기에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의 꿈틀거리는 무브먼트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매덕스는 강속구 투수와 결이 다른 자신만의 압도적인 투구로 야구 역사에 이름을 새겼습니다.
매덕스의 제구력을 극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제구력에 못지않은 것이 바로 매덕스의 기억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매덕스가 던진 공 하나 하나만 보면 제구력 자체에 시선이 집중되지만, 경기 전체의 맥락을 살펴보면 엄청난 기억력을 바탕으로 한 집요한 승부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주목할 만한 사례가 있습니다. 매덕스는 최근에도 여러 인터넷 매체를 통해 자신의 현역 시절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는데, 그러면서 현역 시절 동안 던진 수많은 공 가운데 최고의 투구를 꼽아달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매덕스는 “데뷔 두 번째 시즌에 던진 공 하나”라고 지체없이 답했습니다. 세인트루이스전 선발 투수로 나서 이미 10이닝 무실점 투구를 펼친 상황. 연장 11회에도 마운드에 오른 매덕스는 당시 2아웃 만루 위기에서 루이스 알리시아를 상대했습니다. 먼저 3볼로 몰린 뒤 스트라이크 2개를 연달아 던져 풀카운트.
이때 매덕스는 체인지업을 결정구로 떠올렸습니다. 체인지업만 제대로 던진다면 그대로 이닝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점수가 0 대 0이었던 탓에 매덕스는 밀어내기 볼넷을 걱정해 직구를 던졌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매덕스와 20대 초반의 매덕스는 달랐던 모양입니다. 고심 끝에 직구로 승부한 결과는 2타점 적시타. 다음 타자 호세 오켄도에게 연속 적시타를 맞은 매덕스는 3실점하고 마운드를 내려와 패전 투수가 됐습니다.
매덕스는 이 경기를 절대 잊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후 수년이 흐른 1994년 6월 1일. 애틀랜타 소속으로 바뀐 매덕스는 샌프란시스코 원정 경기를 치르는 중이었습니다. 5회까지 무실점했고 6회 투아웃을 잡아놓은 이후 연속 출루를 허용해 2아웃 만루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번에도 먼저 3볼로 몰린 이후 스트라이크 2개를 넣어 풀카운트가 됐습니다.
여기에서 매덕스는 루이스 알리시아에게 적시타를 맞아 패전투수가 됐던 그때 세인트루이스전 연장 11회를 떠올렸습니다. 당연히 체인지업이었습니다.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체인지업을 제대로 던졌습니다. 타자 데이브 마르티네스의 배트가 허공을 가르면서 삼진. 매덕스는 이 순간을 돌아보며 “실수를 통해 배운다”고 했습니다. 특히 그것이 기술적 실수가 아닌 정신적인 실수였다고 말한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그러면서 실수 하나를 만회하기 위해 6년을 기다려야 했다고 덧붙였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체인지업을 망설이다 패전 투수가 됐던 세인트루이스와의 연장 승부는 데뷔 두 번째가 아닌, 세 번째 시즌이던 1988년 5월 17일 경기였고, 샌프란시스코전 만루 상황은 자신이 기억한 8회가 아닌 6회였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 사소한 기억의 오류를 양해하면, 매덕스는 23년의 현역 생활에서 5008과 ⅓이닝을 소화하며 2만 421명의 타자를 만나는 동안 겪은 숱한 장면 가운데 자신의 의지가 불타오른 공 하나를 거의 완벽하게 되짚어 기억해냈습니다. 같은 상황이 오면 절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강한 승부욕이 초인적인 기억력과 맞물렸고, 물리적인 제구력까지 결합돼 자신만의 명장면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매덕스는 2008년 LA 다저스에서 은퇴하면서 통산 999개의 볼넷으로 커리어를 마감했습니다. 여기에도 이야깃거리가 있습니다. 은퇴를 앞둔 시즌의 9월 8일 경기에서 매덕스는 샌디에이고를 상대로 6이닝 4실점에 볼넷 2개를 허용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기록된 통산 볼넷이 999개.
남은 시즌 동안 서너 차례 선발 등판이 예정된 상황에서 통산 볼넷 기록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던 매덕스는 팀 동료였던 데릭 로우에게 "추가 볼넷없이 999볼넷으로 커리어를 마치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후 세 차례 선발 등판에서 18이닝을 던지면서 단 하나의 볼넷도 내주지 않았습니다. 타고난 제구력이 뒷받침되어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이것도 치열한 승부욕의 결과라는 생각이 듭니다.
매덕스는 제대로 투구를 하기 위해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먼저 직구를 원하는 위치로 던진다. 그리고 구속에 변화를 준다”. 이 두 가지만 해내면 어떤 변수가 생기더라도 괜찮은 투구가 가능하다는 게 매덕스의 지론입니다. 간단한 말이지만 그대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말입니다. 매덕스는 여기에다 실수를 잊지 않는 치밀한 기억력, 그 실수를 되갚으려는 원초적인 승부욕으로 차원이 다른 존재가 됐습니다. 선발 등판이 없는 날, 유독 비디오 분석에 집착하면서 특정 상황에 대처하는 타자의 디테일을 기억해둔 것도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매덕스의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 것은 지난 'K베이스볼 시리즈' 한일전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한 경기에서 밀어내기로만 4점을 내준 우리 대표팀 투수들을 보면서 매덕스가 투구의 기본을 설명한 것이 떠올랐습니다. 만 30세가 되기도 전에 4년 연속 사이영상을 수상한 대투수를 KBO리그 투수들과 정면 비교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규 시즌보다 눈에 띄게 떨어진 구속으로도 무실점한 박영현과 정우주의 투구를 생각하면 매덕스가 말한 ‘실수에서 배운 투구’가 우리나라 대표팀 투수에게도 참고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기술적 실수가 아닌, 정신적 실수였을 수도 있습니다. 구종과 구속부터 제구력과 디셉션 등 투구를 구성하는 요소는 다양합니다. 하지만 치밀한 기억력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투구 요소라는 것이 매덕스의 사례를 통해 공유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