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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저스 역대 최고의 포수', 로이 캄파넬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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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캄파넬라 / 출처 : MLB.com

 

로이 캄파넬라는 다저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포수 중 한 명입니다. 재키 로빈슨이 인종 장벽을 깬 이듬해 다저스에서 데뷔한 캄파넬라는 로빈슨에 이어 두 번째로 MVP를 수상한 흑인 선수가 됐고, 훗날 로빈슨의 발자취를 따라 흑인 선수로서는 두 번째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한편, 캄파넬라는 짧은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3번의 내셔널리그(NL) MVP를 수상한 선수이기도 합니다.

 

캄파넬라는 인종 장벽에 가로막혀 만 26세인 1948년에서야 메이저리그에 데뷔했고, 불운한 교통사고로 인해 만 35세인 1957년까지 10시즌밖에 뛰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캄파넬라는 무려 3번이나 MVP에 선정됐는데, 이는 지미 폭스, 조 디마지오, 요기 베라, 스탠 뮤지얼에 이어 메이저리그 역사상 5번째 기록입니다. 현재까지도 MVP에 3번 이상 선정된 선수는 캄파넬라를 포함해 13명뿐입니다.

 

캄파넬라는 5피트 9인치(175cm)에 220파운드(100kg)라는 작은 체형에도 불구하고 타석에서 엄청난 파워와 포수로서 강력한 어깨를 갖춘 선수였습니다. 또한 겸손하고, 쾌활하며, 리더십까지 갖춘 최고의 팀 동료이기도 했죠. 그는 인종을 가리지 않고 모든 투수와 호흡을 잘 맞췄는데요. 이에 세이버메트리션인 빌 제임스는 캄파넬라를 1위 요기 베라와 2위 자니 벤치에 이어 역대 3위의 포수로 선정했습니다.


혼혈 왕자(the Half-Blood Prince)

로이 캄파넬라 / 출처 : MLB.com

 

캄파넬라는 1921년 11월 19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존 캄파넬라는 이탈리아(시칠리아)계 이민자였고, 어머니인 아이다 캄파넬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는데 다른 인종끼리 결혼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는 자라면서 양쪽 인종의 아이들로부터 '혼혈'이라는 놀림을 받았고, 가정 형편으로 인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그만둬야 했죠.

 

하지만 그에겐 특별한 재능이 있었는데요. 고교 시절 야구, 농구, 미식축구 팀에서 활약한 캄파넬라는 모든 스포츠 종목에서 주장을 맡을 만큼 뛰어난 실력과 리더십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캄파넬라가 가장 사랑한 종목은 야구였습니다. 그의 실력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캄파넬라는 고향팀 필라델피아 필리스로부터 스카우트를 받습니다. 그러나 필리스는 그가 혼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영입 제안을 철회했습니다.

 

캄파넬라는 1937년 만 15세의 어린 나이에 니그로리그의 워싱턴 엘리트 자이언츠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인 1938년 엘리트 자이언츠는 볼티모어로 연고지를 옮겼고, 캄파넬라는 점차 팀의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캄파넬라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만 19세인 1941년부터였는데요. 이해 그는 타율 0.320 4홈런 22타점 OPS 0.938로 니그로리그 올스타전 MVP에 선정됩니다.

 

한편, 캄파넬라는 이듬해 계약과 관련해서 구단과 갈등을 빚은 후 멕시코리그의 몬테레이 술탄스로 이적해 1943시즌 동안 멕시코에서 머무릅니다. 하지만 구단주 존 윌슨과 화해한 캄파넬라는 1944년 엘리트 자이언츠로 복귀해 타율 0.388 2홈런 28타점 OPS 0.976으로 타격왕을 차지했고, 1945년에는 타율 0.369 5홈런 47타점 OPS 1.027으로 타점왕에 오르는데요. 그리고 1945년 10월, 다저스가 그에게 접근합니다.


다저스의 부름을 받다

'영혼의 배터리' 돈 뉴컴(좌)과 로이 캄파넬라(우) / 출처 : MLB.com

 

당시 다저스는 브랜치 리키 단장의 주도 하에 메이저리그의 인종 장벽을 허물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저스의 코치였던 찰리 드레센의 주선으로 브랜치 리키 단장을 만난 캄파넬라는 '브루클린 조직'에서 뛰는데 관심이 있느냐는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캄파넬라가 리키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그가 소유한 니그로리그 팀인 '브루클린 브라운 다저스'에 오라는 뜻으로 오해했기 때문이었죠.

 

며칠 후 호텔에서 재키 로빈슨을 만난 캄파넬라는 그로부터 자신이 이미 비밀리에 다저스와 계약을 맺었다는 얘기를 들은 후에야 비로소 리키의 영입 제안이 사실은 메이저리그 팀인 브루클린 다저스에 오라는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메이저리그에서 뛸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게 아닐까 두려웠던 캄파넬라는 남미 순회 경기를 떠나기 직전에 리키에게 "다저스에서 뛰고 싶다"라는 전보를 보냈습니다.

 

1946년 스프링 트레이닝이 진행되고 있을 때, 남미에서 돌아온 캄파넬라는 니그로리그 출신 투수인 돈 뉴컴과 함께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인 뉴햄프셔 내슈아에 배정됐습니다. 다른 흑인 선수들인 재키 로빈슨과 조니 라이트는 몬트리올 다저스를 향했습니다. 대부분의 니그로리그 출신 선수들이 그렇듯이 캄파넬라도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기 위해 엄청난 급여 삭감을 감수하고 마이너리그에서 시작해야 했죠.

 

1946년 뉴햄프셔 내슈아에서 캄파넬라는 타율 0.290와 96타점을 기록하며 리그 MVP에 선정됐습니다. 한 경기에선 내슈아의 감독인 월터 올스톤이 퇴장당한 후 감독 대행을 맡으면서 3점 차를 뒤집고 역전승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사례로, 캄파넬라가 선수단 내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백인 선수들조차도 그를 존경하고 좋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메이저리그 데뷔 초창기

로이 캄파넬라 / 출처 : MLB.com

 

캄파넬라는 1947년 캠프를 마친 후 로빈슨과 함께 몬트리올로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그해 4월 15일 로빈슨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면서 인종 장벽이 허물어졌습니다. 하지만 캄파넬라는 마이너리그에서 1년을 더 보내야 했는데요. 다저스가 그의 콜업을 서두르지 않은 이유는 포수 브루스 에드워즈의 존재 때문이었습니다. 에드워즈는 타율 0.295 9홈런 80타점으로 올스타에 선정됐을 만큼 팀내 스타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죠.

 

​다저스의 단장 브랜치 리키는 인기가 많은 에드워즈와 경쟁함으로써 캄파넬라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하지만 에드워즈가 1947시즌 종료 후 팔 부상을 당하면서 캄파넬라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캄파넬라는 1948년 4월 20일 폴로 그라운드에서 열린 뉴욕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7회 초에 대타로 나서면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고, 해당 경기에서 다저스는 7-6으로 역전승을 거뒀습니다.

 

캄파넬라는 1948시즌 초반 대부분을 벤치에서 보낸 후 다저스 산하 트리플 A 팀인 세인트폴 세인츠로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강등 후 35경기에서 타율 0.325 13홈런 39타점으로 무력시위를 펼치며 다시 빅리그로 콜업됐는데요. 당시 다저스는 5연패를 당하면서 27승 34패(6위)를 기록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캄파넬라가 라인업에 복귀한 1948년 7월 2일 이후, 다저스는 57승 36패(0.613)를 기록하며 NL 3위로 시즌을 마칩니다.

 

캄파넬라는 데뷔 시즌 타율 0.258 9홈런 45타점 OPS 0.761을 기록했고, NL 포수 중 도루 저지율 1위를 차지하면서 83경기 출전에 그쳤음에도 불구하고 MVP 투표에서 21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9년 타율 0.287 22홈런 82타점 OPS 0.883으로 팀 동료인 로빈슨,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래리 도비와 함께 흑인 선수로서는 최초로 메이저리그 올스타에 선정되면서 주전 포수 자리를 굳건히 했습니다.

 

최고의 공수겸장 포수

로이 캄파넬라 / 출처 : MLB.com

 

이후 캄파넬라는 1956시즌까지 8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됐고, MVP를 3번(1951, 1953, 1955)이나 수상했는데요. 그는 MVP 시즌마다 3할 타율, 30홈런, 100타점 이상을 기록했습니다. 1951년에는 타율 0.325 33홈런 108타점 OPS 0.983으로 생애 첫 MVP에 선정됐는데, 같은 해 양키스의 요기 베라가 아메리칸리그 MVP에 선정되면서 MLB 역사상 최초로 양대리그에서 포수가 MVP를 수상하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캄파넬라는 1953년 타율 0.312 41홈런 142타점 OPS 1.006으로 타점왕에 오르면서 두 번째 MVP를 차지했는데, 41홈런과 142타점은 1970년 자니 벤치(45홈런 148타점)가 경신하기 전까지 메이저리그 역대 포수 최다 홈런, 타점 기록이었습니다. 게다가 캄파넬라는 1955년 타율 0.318 32홈런 107타점 OPS 0.978로 세 번째 MVP를 차지한 후 월드시리즈에서 맹활약을 펼치면서 다저스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한편, 캄파넬라는 당대 최고의 수비력을 자랑하는 포수이기도 했는데요. 그는 1948년부터 1952년까지 5년 연속 도루 저지율 1위를 기록했는데, 특히 1951년에는 47번의 도루 시도 가운데 32번을 잡아내 도루 저지율 68.1%로 단일 시즌 역대 1위를 기록했습니다. 통산 도루 저지율 57.4% 역시 메이저리그 역대 1위 기록입니다. 또한, 캄파넬라는 그의 경력 동안 무려 3차례나 포수로서 동료 투수의 노히터를 도왔습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점은 그의 내구성이었죠. 그의 시대에 포수는 부상이 잦을 수밖에 없는 포지션이었습니다. 한 손으로 공을 잡아서 던지는 손을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포수 글러브의 품질이 좋아진 것은 1970년대부터였습니다. 그 역시 선수 생활 내내 손과 팔이 수없이 골절됐고, 주자와 충돌해 뇌진탕을 당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캄파넬라는 NL 포수 최초로 9시즌 연속 100경기에 출전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불의의 사고

로이 캄파넬라 / 출처 : MLB.com

 

하지만 그런 캄파넬라도 1954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더블 플레이를 피하기 위해 슬라이딩을 하다가 왼손에 복합 골절 부상을 당한 후부터 커리어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수술 후 이듬해인 1955년 기적적으로 부활해 커리어 세 번째이자 마지막 MVP를 차지했지만, 1956년 왼손 통증이 다시 악화됐고 설상가상으로 배트에 맞아 오른손 엄지가 골절되면서 타율 0.219 20홈런 73타점 OPS 0.727에 그쳤습니다.

 

캄파넬라는 1956시즌 종료 후 왼손의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세 번째 수술을 받았지만, 다저스가 일본에서 열린 시범경기에 참가하도록 강권하면서 그의 재활 기간은 단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캄파넬라는 1957년 타율 0.242 13홈런 OPS 0.703으로 최악의 부진을 겪으면서 신인 시절 이후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되지 못했죠. 그해 마지막 경기에서 다저스는 로스앤젤레스(LA)로 연고지 이전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스프링 트레이닝을 앞둔 1958년 1월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캄파넬라의 선수 경력은 LA에서 한 경기에도 나서지 못하고 끝났습니다. 캄파넬라는 할렘 중심부에 자신의 이름을 딴 주류 매장을 가지고 있었고, 오프시즌에는 종종 그곳에서 일했는데요. 사고가 일어난 날, 매장을 닫고 집으로 향하던 그는 운전 중인 차가 얼음길에서 미끄러지면서 전신주에 부딪힌 후 전복되어 경추가 골절되는 부상을 당합니다.

 

사고 후 캄파넬라는 수술과 재활을 통해 팔과 손은 움직일 수 있게 됐지만, 남은 생애를 휠체어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럼에도 다저스는 팀의 레전드와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이어갔는데요. 다저스는 사고 후 거의 1년간 수술과 재활을 위해 병원에 입원한 캄파넬라에게 연봉을 계속 지급했습니다. 그리고 1959년 1월에는 그를 스프링 트레이닝의 특별 인스트럭터로 임명해 젊은 포수들을 돕는 멘토 역할을 맡겼습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캄파넬라의 정신

로이 캄파넬라 / 출처 : MLB.com

 

1959년 5월 7일 다저스는 그를 기리기 위해 '로이 캄파넬라의 밤'이란 행사를 열었습니다. 이날 다저스와 양키스의 시범경기에는 무려 93,103명이라는 관중이 모여 당시 기준으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는데요. 이날 경기의 수익금은 캄파넬라의 치료비로 사용됐습니다. 1969년 캄파넬라는 로빈슨에 이어 흑인으로선 두 번째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같은 해 뉴욕 시로부터 청동 메달을 받았습니다.

 

1972년 다저스는 재키 로빈슨의 42번, 샌디 코팩스의 32번과 함께 로이 캄파넬라의 39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1978년 캄파넬라는 다저스의 커뮤니티 책임자인 돈 뉴컴의 보좌로 일하기도 했습니다(캄파넬라와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함께한 뉴컴은 배터리를 맞춘 팀 동료이자, 오랜 친구였죠). 그리고 1993년 6월 26일 캘리포니아주 오들랜드 힐즈에 있는 자택에서 만 71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캄파넬라는 2006년 미키 맨틀, 행크 그린버그, 멜 오트와 함께 미국 우표에 자신의 이미지가 새겨지는 영예를 얻었는데요. 같은 해 다저스는 리더십을 발휘한 다저스 선수에게 수여하는 상인 '로이 캄파넬라상'을 재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2025년 로이 캄파넬라상은 미겔 로하스가 선정됐는데요. 이렇게 다저스 최고의 포수 중 하나이자 리더였던 캄파넬라의 긍정적인 태도와 열정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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