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투사 커트 플러드와 FA 제도
길고 긴 정규 시즌이 끝나면 야구는 동면에 돌입합니다.
야구가 없으니 고요할 것 같지만, 우리가 야구 없는 겨울을 '스토브리그'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자유계약선수, 즉 Free Agent(FA)를 비롯한 트레이드라든지 2차 드래프트 등 선수들과 지도자들의 대이동이 팬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시절이기도 합니다.
당장 KBO리그도 KIA 타이거즈 출신 유격수 박찬호 선수가 FA가 되면서 4년 80억원 계약으로 두산 베어스 유니폼을 입었습니다.
여전히 20명 가까운 FA 선수들이 계약 협상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올겨울에는 2차 드래프트도 있습니다.
FA는 1군에서 7,8년 이상 오랜 기간 열심히 해서 살아남은 선수들에게는 큰 보상을 받고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그런데 요즘 야구에서 당연시 여겨지는 FA, 즉 자유계약선수의 권리는 실은 큰 도전과 희생을 거쳐서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그러나 플러드를 보여주는 기록이 따로 있습니다.
226게임 연속 무실책과 568번 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 기록은 당시만 해도 MLB 최고 기록이었습니다.
1965년 9월 3일 경기부터 1967년 6월 2일까지 플러드는 226경기 연속으로 단 하나의 실책도 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기간 중견수로 수비 기회는 568번, 한 번도 집중력이 떨어진 순간이 없었습니다.
아울러 7년 연속 골드글러브 수상도 그의 가치를 보여줍니다. 올스타에도 3번 선정됐습니다.

1960년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중원을 책임지던 중견수 커트 플러드는 공격보다는 이렇게 빼어난 수비로 명성을 떨치던 선수였습니다.
물론 3할 이상 시즌을 6번이나 기록했고, 1964년에는 NL 최다인 211안타를 기록하는 등 공격력도 만만치 않았지만, 당대의 팬들과 선수들은 사상 최고의 중견수 수비로 플러드를 기억합니다.
플러드는 1969년 시즌 종료와 함께 카디널스와의 계약이 끝나자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됐습니다.
당시만 해도 MLB에는'보류조항(reserve clause)'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번 드래프트 된 선수에 대해서는 모든 권리가 구단에 주어지는 조항이었습니다. 몇 년을 뛰었든 상관없이 구단에서 나가라면 나가고, 트레이드를 시키면 군말 없이 짐을 꾸려야 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리저브 조항은 무려 1879년 팀의 핵심 선수들이 계속 이동하며 연봉을 높게 요구하자 부담이 증가한 구단에서 만든 규정입니다. '영입 후 한 시즌 지난 후에도 선수를 묶어두는 자동 재계약 제도'를 만들었고, 당초 5명에 적용하던 이 제도를 점차 확대해 1887년부터는 아예 소속 선수 전원에게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선수를 구단의 소유물로 여기는, 좀 과장하면 노예제도 같은 이 '보류조항'은 무려 90년이 지난 1960년대 말까지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던 겁니다.
플러드에게도 그런 운명이 닥쳤습니다.
12년간 부동의 중견수로 세인트루이스에서 활약하던 플러드는 1969년 시즌이 끝나자 포수 팀 맥카버, 외야수 바이런 브라운, 좌완 투수 조 호너 등과 함께 필리스로 트레이드됐습니다. 카디널스는 이들을 내주고 1루수 딕 알렌과 2루수 쿠키 로하스, 우완 투수 제리 존슨을 받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플러드는 보류조항을 정면거부하고 나서며 야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거액인 10만 달러의 연봉이 보장됐지만 그는 '형편없는 필리스의 성적과 황폐한 코니맥스타디움의 시설, 그리고 인종차별적인 팬' 등의 이유를 들어 트레이드를 거부했습니다.
특히 12년간 헌신적인 플레이로 팀의 주축이던 플러드를 트레이드하면서 팀에서는 본인에게 언급조차 없었고, 취재 기자를 통해 트레이드 소식을 들었던 것도 플러드가 분통을 터뜨린 큰 이유 중의 하나였습니다.
선수 노조와 상의한 끝에 모든 소송비를 부담하겠다는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자 플러드는 보위 쿤 당시 커브셔너에게 '자유계약선수(프리 에이전트, Free Agent)'가 되도록 공표해 달라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100년 가까이 지켜져 온 구단의 절대 권리에 대한 정면 도전은 큰 파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플러드는 12년간의 선수 생활을 한 끝에 자신이 마치 일개 상품처럼, 본인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팔려간다는 현실에 대해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흑인이었기에 '보류조항'이 더욱더 노예 문서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1969년 12월 24일 커미셔너 쿤에게 보낸 편지를 요약 소개하면,
1970년 시즌에도 물론 야구를 하고 싶습니다. 필리스에서 계약 요청을 받았지만 다른 모든 팀의 오퍼도 고려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커미셔너께서 나의 이런 의사를 다른 모든 팀에게 전달하고, 1970년 시즌에 내가 어떤 팀에서도 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플러드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기득권을 지닌 권력층이 일개 한 선수의 혁명적인 요청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플러드는 1970년 1월 16일 독점금지법 위반을 들어 MLB과 쿤 커미셔너에게 410만 달러 손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재키 로빈슨과 행크 그린버그 등 은퇴한 선수들과 빌 빅 전 구단주 등이 플러드를 지원해 증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선수 노조가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다고 전체 투표로 결의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역 선수 중에는 실제로 법정에서 증언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결국 이 소송은 미국 연방대법원까지 가게 됐고, 5-3의 판결로 MLB의 손을 들어주게 됩니다.
이 소승으로 인해 1970년 시즌을 전혀 뛰지 못한 플러드는 1971년 워싱턴 세네터스로 다시 트레이드돼 재기를 노렸으나 13게임 만에 결국 은퇴하고 말았습니다.
1년간의 힘겨운 법정 투쟁은 그에게서 너무 많은 빼앗아 갔고, 야구에 대한 열정도 차갑게 식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당대 최고의 중견수이던 플러드는 글러브를 벗었습니다. 만 33세였습니다.
그런대 비록 플러드 자신은 소송에서 패했지만,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그가 처음 역사적인 투쟁을 시작한 지 5년 뒤인 1975년에 결국 다저스 우완 투수 앤디 매서스미스와 오리올스 좌완 투수 데이브 맥낼리가 MLB 중재위원인 피처 세이츠로부터 자유계약선수의 자격을 부여받았습니다.
결국 그렇게 거의 100년 만에 '보류조항'이 무너지면서 MLB에는 FA 제도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은퇴 후 스페인의 휴양도시 팔마 데 말로카에서 바를 운영하기도 했던 플러드는 1978년 오클랜드 에이스의 방송 해설가로 야구에 복귀했고, 1988년 창단됐다가 금방 사라진 시니어 베이스볼리그의 커미셔너를 맡기도 했습니다.
평생 줄담배를 피웠던 플러드는 1997년 59세에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매년 겨울 스토브리그에서는 수많은 선수들이 FA 자격을 얻어 엄청난 돈더미에 올라앉고 있습니다. 그들이 받는 큰 혜택이 커트 플러드라는 선배가 결과적으로 자신을 희생해가며 벌였던 뜨거운 투쟁으로 시작된 결과였음을 알면 좋을텐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