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의 천재, 행크 그린버그
행크 그린버그 / 출처 - MLB.com
행크 그린버그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1루수이자, 1930년대를 대표하는 파워 히터 중 한 명입니다. 그린버그의 통산 성적은 1,394경기 1,628안타 331홈런 1,274타점 타율 0.313 출루율 0.412 OPS 1.017로 레전드급 타자라기엔 다소 부족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47개월 동안 복무하면서 전성기 4년을 군대에서 보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린버그는 군 입대 전 4년간 평균 타율 0.327 43홈런 149타점 OPS 1.094를 기록하고 있었고, 복귀 후 풀타임 첫해인 1946년 타율 0.277 44홈런 127타점 OPS 0.977로 홈런과 타점 부문 1위를 차지했습니다. 만약 군 복무가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그의 성적은 훨씬 더 뛰어났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그린버그는 MLB 최초의 유대인 슈퍼스타였으며, 그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면서 이와 같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큰 키(193cm)에 평발인 그린버그는 민첩함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나는 노력을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데요. 그는 매일 아침 8시부터 4시간 동안 방망이를 휘둘렀고, 경기가 끝난 후에도 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타격 연습을 했습니다. 커리어 초기에는 어색했던 1루 수비도 수많은 연습을 통해 평균 이상으로 좋아졌고, 좌익수로 포지션을 옮긴 후에도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실책을 줄여나갔죠.
뉴욕의 덩치 큰 소년

행크 그린버그 / 출처 - MLB.com
그린버그의 본명은 '헨리 벤자민 그린버그(Henry Benjamin Greenberg)'로, 1911년 1월 1일 미국 뉴욕주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루마니아계 유대인 이민자 부부의 사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린버그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가족은 브롱스로 이사했는데, 뉴욕 시립 야구장의 바로 건너편이었죠. 어린 시절 그린버그는 동네 아이들과 매일 야구공을 던지고 치면서 야구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제임스 먼로 고교 시절, 이미 190cm 95kg 이란 건장한 체격을 갖춘 그린버그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는데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는 야구였지만. 가장 잘하는 스포츠는 농구였습니다. 또한, 미식축구와 육상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죠. 1929년 만 18세의 그린버그는 고향팀인 뉴욕 양키스로부터 스카우트를 받습니다. 하지만 양키스에는 루 게릭이란 확고한 주전 1루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린버그는 이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린버그는 운동선수로서 장학금을 받고 뉴욕 대학교에 진학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 자이언츠에서 입단 테스트를 치렀습니다. 하지만 존 맥그로 감독은 그린버그의 큰 덩치와 굼뜬 움직임을 보고 그를 뽑지 않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1930년 대학교 1학년을 마친 후 그린버그는 디트로이트와 9,000달러에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9월 15일 양키스전에서 딱 한 타석만 소화한 후 마이너리그로 내려갔습니다.
이후 3년간 마이너리그에서 자신을 담금질한 그린버그는 1933년 다시 빅리그의 부름을 받았지만, 그를 마땅치 않게 본 버키 해리스 감독에 의해 제한된 기회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그린버그는 타율 0.301 12홈런 85타점 OPS 0.835라는 준수한 성적을 남깁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4년 미키 코크레인이 감독 겸 포수로 디트로이트에 부임하면서 그린버그에게도 기회가 오게 됩니다.
죽음의 부대를 이끌다
코크레인은 부임과 동시에 그린버그에게 주전 1루수를 맡겼고, 그린버그는 풀타임 첫해인 1934년 타율 0.339 26홈런 139타점 OPS 1.005과 함께 리그에서 가장 많은 63개의 2루타를 날립니다. 이해 그린버그는 2루수 찰리 게링거, 좌익수 구스 고슬린, 포수 코크레인과 함께 일명 '죽음의 부대(The Bttalion of Death)라고 불리는 강타선을 구축하며 디트로이트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이듬해인 1935년 그린버그는 타율 0.328 36홈런 168타점 OPS 1.039으로 홈런과 타점 부문 1위를 차지하며 만장일치로 MVP를 수상했고, 이러한 그의 활약에 힘입어 디트로이트는 월드시리즈에 올랐습니다. 비록 그린버그 자신은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 홈으로 슬라이딩하던 중 손목 부상을 입어 더 이상 경기에 나서지 못했지만, 디트로이트는 시카고 컵스를 4승 2패로 꺾고 창단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린버그는 1936년 4월 워싱턴 새너터스와 경기에서 손목에 다시 부상을 입으면서 12경기에서 타율 0.348 1홈런 15타점 OPS 1.085를 기록한 것을 끝으로 시즌 아웃됐습니다. 하지만 1937년 건강하게 돌아온 그린버그는 타율 0.337 40홈런 184타점 OPS 1.105를 기록하며 타점왕에 오릅니다. 184타점은 핵 윌슨(1930년 191타점)과 루 게릭(1931년 185타점)에 이어 MLB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죠.
그리고 1938년 그린버그는 '성역'이라 여겨졌던 기록에 도전하는데요. 시즌 종료까지 5경기를 남겨둔 시점에서 58홈런으로 지미 폭스가 1932년 세운 우타자 최다 홈런 기록과 동률을 이룸과 동시에 베이브 루스의 단일 시즌 홈런 1위 기록인 60홈런까지 2개 차이로 접근한 것이죠. 하지만 신체적, 정신적으로 지쳐 있었던 그린버그는 마지막 5경기에서 홈런을 한 개도 추가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투철했던 희생 정신

군 복무 당시 행크 그린버그 / 출처 - MLB 명예의 전당
1940년 디트로이트 구단은 그린버그에게 좌익수를 맡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수비력이 형편없는 포수 겸 3루수 루디 요크를 1루수로 기용하기 위해서 였는데요. 당시 그린버그는 피나는 노력을 통해 데뷔 시절 심각했던 1루 수비를 평균 이상으로 끌어올린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팀 내 최고 스타인 그는 팀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있었죠. 하지만 그린버그는 팀의 요청을 받아들여 좌익수로 포지션을 옮깁니다.
그해 그린버그는 타율 0.340 41홈런 150타점 OPS 1.103으로 홈런과 타점 부문 1위를 차지하며 통산 두 번째 MVP에 오릅니다. 그린버그의 양보로 1루수로 포지션을 옮긴 루디 요크도 타율 0.316 33홈런 134타점 OPS 0.993으로 커리어 하이를 경신했고, 둘의 활약을 앞세워 디트로이트도 아메리칸리그의 패권을 차지하는데요. 하지만 아쉽게도 월드시리즈에선 신시내티 레즈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심화된 1941년, 그린버그는 스타급 야구선수 중에선 최초로 미국 육군에 입대해 대전차포수로 복무했습니다. 그리고 1941년 12월 5일 '만 28세 이상자 제대 조치'에 의해 만 30세인 그린버그는 상사로 전역했는데요. 하지만 제대 이틀 후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자, 미 공군의 전신인 USAAF에 다시 자원입대해 3년 반 동안 중국-버마-인도 전선을 담당한 B-29 폭격기 부대에서 복무했습니다.
1945년 7월 1일, 4년 만에 돌아온 그린버그는 복귀전부터 홈런을 때려냈습니다. 그리고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와의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2-3으로 뒤진 9회 초 역전 만루홈런을 쏘아 올리며 팀의 리그 우승을 확정 짓습니다. 이는 지금까지도 디트로이트 역사상 최고의 홈런으로 꼽힙니다. 이해 디트로이트는 시카고 컵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리하며 창단 두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합니다.
토사구팽 후에도 빛나는 인격

피츠버그 파이리츠 시절 행크 그린버그 / 출처 - MLB.com
복귀 후 풀타임 첫해인 1946년 그린버그는 타율 0.277 44홈런 127타점 OPS 0.977로 홈런과 타점 부문 1위를 차지하면서 여전한 기량을 뽐냈습니다. 하지만 디트로이트는 커리어 최저 타율을 기록했다는 이유로 그의 연봉을 낮추려고 했고, 그린버그는 구단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엔 은퇴까지 불사할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디트로이트는 그린버그를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트레이드합니다.
피츠버그는 그린버그가 은퇴하지 않도록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요. 그들은 그린버그를 메이저리그 최초로 연봉 10만 달러를 받는 선수로 만들어줬고, 홈구장 포브스 필드의 좌측 담장을 당긴 후 '그린버그 가든'으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극단적으로 당겨쳐서 홈런을 만들어내는 그린버그의 타격 스타일을 고려한 변화였죠. 구단의 정성에 감복한 그린버그는 은퇴를 번복하고 피츠버그의 유니폼을 입습니다.
그린버그는 피츠버그에서 1947년 타율 0.249 25홈런 75타점 OPS 0.885로 딱 한 시즌만 뛴 후 은퇴했지만, 구단에 커다란 선물을 남겼습니다. 그린버그는 풀타임 2년 차인 랄프 카이너의 멘토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타격 훈련을 함께하는 등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그해 카이너는 홈런 51개로 전년도(23홈런) 대비 2배 이상 홈런을 때려내면서 홈런왕에 올랐습니다(그리고 카이너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됩니다).
한편, 그린버그는 1947년 또 하나의 일화를 남겼는데요.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에게 먼저 다가가 격려를 해준 것이죠. 그린버그는 자신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상대 선수와 관중으로부터 모욕을 받았기 때문에 로빈슨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훗날 로빈슨은 피츠버그와 경기를 치렀을 때 그린버그로부터 "계속 버텨. 잘하고 있어. 용기를 잃지 마"라고 격려를 들었다며 감사함을 표했습니다.

은퇴 후의 삶

행크 그린버그 / 출처 - MLB 명예의 전당
1946년 뉴욕 백화점 재벌 가문의 딸인 카랄 짐벨스와 결혼한 그린버그는 은퇴 직후인 1948년 빌 비크가 구단주로 있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현 가디언스)의 팜 디렉터를 맡았고, 이후 1950년 단장으로 승격했습니다. 그린버그는 임기 동안 아메리칸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래리 도비를 비롯해 많은 아프리카계 선수들을 중용했고, 1954년에는 111승 43패(승률 0.721)로 구단 단일 시즌 최다승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59년 빌 비크와 함께 투자자를 모집해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인수하면서 부사장 겸 단장을 맡았고, 그해 화이트삭스는 1919년 이후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습니다. 1960시즌 종료 후 아메리칸리그가 로스앤젤레스(LA)에 신생팀을 만들 계획을 발표하자, 그린버그는 가장 유력한 구단주 후보로 꼽혔는데요. 하지만 다저스의 구단주 월터 오말리가 독점권을 주장하며 강하게 반발하자 경쟁에서 물러납니다.
그린버그는 1958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면서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유대인 선수가 됐습니다. 그리고 1983년 그의 등번호 5번은 디트로이트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됩니다. 한편 1960년대 주식 시장에 뛰어든 그린버그는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고, 캘리포니아주 비벌리힐스로 거처를 옮깁니다. 그리고 자신의 번호가 역사에 남게 된 지 3년이 지난 1986년 9월 4일, 그린버그는 신장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