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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볼러의 대명사, 밥 펠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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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펠러 / 출처 - MLB.com

그보다 더 빠른 공을 던질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ㅡ조 디마지오, 테드 윌리엄스

밥 펠러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현 가디언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놀란 라이언이 등장하기 전까지 파이어볼러의 상징과도 같은 투수였습니다. 1940년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펠러의 패스트볼이 얼마나 빠른지 홍보하기 위해 전직 메이저리거이자 스포츠 영상 분석의 선구자인 루 폰세카에게 의뢰했고, 폰세카는 시카고의 링컨 파크에서 오토바이와 맞붙게 하는 실험을 통해 펠러의 패스트볼 구속을 측정했는데요.

 

해당 실험에서 정장 바지를 입고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착용한 펠러는 아스팔트 도로에서 마운드 없이 투구를 했는데 약 140km/h로 가속 중인 오토바이보다 몇 피트 앞서 표적에 도달했습니다. 비디오 분석 결과 당시 펠러의 패스트볼 구속은 약 98.6마일(158.7km/h)으로 계산됐고, 훗날 더 발전된 측정 방식으로 분석한 결과 104마일(167km/h)에 달했다고 합니다(출처 :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트).

 

​한편, 펠러는 합법적인 병역 면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해 4년간 군 복무를 하며 8개의 무공훈장을 받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펠러의 통산 성적은 266승 162패 3827이닝 2581탈삼진 평균자책점 3.25인데요. 하지만 입대 직전 3시즌 동안 평균 25승을 기록했고, 전역 직후 26승을 기록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참전하지 않았을 경우 그의 승수는 350승을 넘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버지의 조기교육

밥 펠러 / 출처 - MLB.com

 

펠러의 본명은 '로버트 윌리엄 앤드류 펠러 (Robert William Andrew Feller)'로, 1918년 11월 3일 미국 아이오와주 밴 미터에서 농부인 아버지 윌리엄 펠러와 학교 교사인 레나 포렛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펠러가 걷기도 전부터 그와 공놀이를 했고 4살 무렵부터는 함께 캐치볼을 했는데요. 이러한 조기 교육 덕분에 펠러는 9살이 되었을 때는 야구공을 80m 이상 던질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아버지는 투수로서 펠러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저녁에도 캐치볼을 할 수 있도록 헛간에 조명을 설치했습니다. 1930년 여름, 11살의 펠러는 지역 고등학교 팀을 상대로 등판해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는데요. 그의 활약에 고무된 아버지는 자신의 농장에 야구장을 짓는 놀라운 결단을 내립니다. 훗날 오크 뷰(Oak View) 파크라고 불린 그 경기장의 입장료는 25센트였고 때로는 1,000명이 넘는 팬들이 모였습니다.

 

펠러는 오크 뷰 팀에서 처음엔 주로 유격수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1934년 15살이 되었을 때 그는 마운드에서 뛰어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고 첫 18이닝 동안 35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죠. 이듬해인 1935년 16살의 펠러는 아이오와주의 주도 디모인의 준-프로팀인 파머스 유니온에서 157이닝 동안 361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여러 메이저리그 구단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펠러는 그 해 여름 클리블랜드의 전설적인 스카우트 사이 슬랩니카와 비밀리에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죠. 슬랩니카는 훗날 "그 아이는 제가 꼭 데려가야 할 투수였습니다. 패스트볼이 빠르고 날카로웠는데, 직선으로 날아가는 게 아니라 꿈틀거리며 날아다녔습니다. 평생에 한 번만 볼 수 있는 팔이란 걸 알았죠"라고 회고했는데요. 계약금은 고작 1달러와 사인볼이었습니다.


17세에 데뷔하다

밥 펠러 / 출처 - MLB.com

 

이듬해인 1936년 클리블랜드는 펠러를 지역의 준 프로팀인 로젠블룸스로 보내서 3경기에 등판시킨 후 7월 14일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올립니다. 그리고 펠러는 며칠 후인 7월 19일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경기에서 팀이 2-9로 지고 있던 8회 말에 교체 투입되며 데뷔전을 치르는데요. 당시 그의 나이는 만 17세였습니다. 이후 펠러는 약 한 달간 산발적으로 구원 등판하면서 메이저리그 무대에 적응해 나갑니다.

 

그리고 8월 23일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상대로 역사적인 첫 선발 등판에 나섭니다. 클리블랜드의 감독 스티브 오닐은 17세의 펠러가 어려움을 겪을 경우를 대비해 데니 게일하우스를 불펜에서 대기시켰는데요. 하지만 이는 기우에 불과했죠. 펠러는 1회 첫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웠고, 9이닝 동안 6피안타 1실점 15탈삼진(선발 데뷔전 최다 탈삼진 기록)으로 커리어 첫 승을 수확했습니다.

 

3주 후, 그는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 경기에서 9이닝 동안 2피안타 2실점 17탈삼진으로 디지 딘의 단일 경기 탈삼진 기록과 동률을 이룹니다. 펠러는 데뷔 시즌을 5승 3패 62이닝 76탈삼진 평균자책점(ERA) 3.34로 마쳤고, 역사적인 신인 시즌을 보낸 그는 "셜리 템플(당대 최고의 아역 배우)을 제외하면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젊은이"가 됐습니다. 하지만 시즌 종료 후 펠러는 사회 생활의 쓴맛을 보게 됩니다.

 

당시 메이저리그 규칙에 따르면 아마추어 선수와 직접 계약을 맺을 수 있는 것은 마이너리그 팀뿐이었는데요.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마이너리그 팀을 거치지 않고 펠러와 직접 계약을 맺었고, 펠러의 고향인 밴 미터와 가장 가까운 마이너리그 팀인 데모인 데몬스가 이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면서 결국 클리블랜드는 7,500달러의 벌금을 물게 됐습니다. 하지만 펠러는 가까스로 클리블랜드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약관의 나이로 정상에 오르다

밥 펠러 / 출처 - MLB.com

 

펠러는 1937시즌 시작과 함께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합니다. 그러나 시즌 첫 등판에서 커브볼을 던지다가 팔꿈치 부상을 입었고, 클리블랜드는 펠러의 팔꿈치를 보호하기 위해 7월까지 그를 철저하게 관리했습니다. 이에 따라 펠러의 실질적인 풀타임 첫해는 1938시즌이었는데요. 1938년 펠러는 17승 11패 277.2이닝 240탈삼진 ERA 4.08로 탈삼진 1위에 오르지만 볼넷 역시도 208개로 1위였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만 20세가 된 펠러는 24승 9패 296.2이닝 246탈삼진 ERA 2.85로 다승·완투·이닝·탈삼진 부문 1위를 차지하며 잠재력을 만개하기 시작합니다. 펠러는 1940년 27승 11패 320.1이닝 261탈삼진 ERA 2.61으로 다승·탈삼진·평균자책점 1위에 오르며 투수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는데요. 특히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개막전 노히터를 기록했고, 이닝·완투(34)·완봉(4)에서도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펠러는 1941년에도 25승 13패 343이닝 260탈삼진 평균자책점 3.15로 다승·이닝·탈삼진 부문 1위에 오르면서 3시즌 연속 리그를 지배했습니다. 22세까지 펠러가 거둔 성적은 107승 1,448.1이닝 1,233탈삼진 ERA 3.18. 향후 300승 투수를 넘어 400승까지 바라볼 수 있는 페이스였죠. 하지만 1941년 12월 7일,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가던 길에 펠러는 진주만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틀 후, 펠러는 메이저리그 스타 중 최초로 해군에 자원입대합니다. 그는 원래 전투기 조종사로 입대하려고 했지만 청력 검사에서 떨어졌고, 노포크 해군 기지에서 기초 훈련을 받은 후 그곳에서 조교로 복무했습니다.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는 군 면제를 받았지만, 전투에 참여하기를 원하며 USS 앨러배마에 배치됐습니다. 하지만 전투에 나가기 직전인 1943년 1월, 그의 아버지가 뇌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4년간 공백을 무색하게 하는 활약

밥 펠러 / 출처 - MLB.com

 

펠러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봄 훈련을 위해 플로리다에 있을 때 만난 버지니아 윈터와 결혼했고, 1943년 갈바닉 작전과 1944년 플린트록 작전 그리고 1945년 필리핀해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태평양과 북대서양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무려 8개의 무공훈장을 받은 참전 용사로 생애 후반에는 그린베레의 명예 회원이기도 했는데요.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1945년 8월 22일 상사로 전역했습니다.

 

제대 후 풀타임 첫해인 1946년 펠러는 26승 15패 371.1이닝 348탈삼진 ERA 2.18로 다승·이닝·탈삼진 부문 1위를 차지했습니다. 탈삼진 348개는 당시 기준 아메리칸리그 단일 시즌 신기록이었죠. 이 기록은 1965년 샌디 코팩스(탈삼진 382개)가 경신하기 전까지 역대 1위를 유지했습니다. 또한, 선발 등판(42)·완투(36)·완봉(10)에서도 1위를 차지하며 약 4년의 공백을 무색하게 하는 활약을 펼칩니다.

 

이듬해인 1947년에도 펠러는 20승 11패 299이닝 196탈삼진 평균자책점 2.68로 다승·이닝·탈삼진 1위를 차지했습니다. 한편 선발 등판(37)·완봉(5)에서도 1위에 오릅니다. 하지만 6월 13일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의 경기에서 그는 비로 미끄러워진 마운드에서 떨어져 허리를 크게 다치는데요. 훗날 펠러는 "그 사건 이후로 제 패스트볼은 다시는 예전 같은 위력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펠러의 최전성기가 지난 1948년 클리블랜드는 리그 1위를 차지하면서 월드시리즈에 진출한다. 정규 시즌 19승 15패 280.1이닝 164탈삼진 평균자책점 3.56으로 기복이 심했던 펠러는 1차전에서 8이닝 1실점을 기록하면서 완투패를 당했고, 5차전에서는 6.1이닝 7실점으로 무너졌다.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6차전에서 브레이브스를 꺾고 창단 두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커리어 말년

밥 펠러 / 출처 - MLB.com

 

이후에도 펠러는 1949년부터 1954년까지 평균 14승 9패 203이닝 90탈삼진 평균자책점 3.69로 수준급 활약을 펼쳤습니다. 특히 1951년에는 22승 8패 249.2이닝 111탈삼진 평균자책점 3.50으로 다승왕을 차지했고, 1954년에는 통산 250번째 승리와 2,500번째 탈삼진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불같은 강속구로 상대를 압도하는 투구를 펼치진 못했지만, 노련한 기교로 타자들을 요리했습니다.

 

하지만 1954년 클리블랜드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뉴욕 자이언츠를 상대로 4차전에서 싹쓸이 패배를 당하는 동안 펠러는 한 경기에도 등판하지 못했고, 이듬해인 1955년에는 임시 선발 혹은 롱릴리프로 역할이 제한되며 25경기(11선발)에 등판해 4승 4패 83이닝 25탈삼진 평균자책점 3.47을 기록하는 데 그쳤죠. 그리고 1956년에는 19경기(4선발) 0승 4패 58이닝 18탈삼진 평균자책점 4.97로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시즌 종료 후 은퇴에 대한 추측이 무성한 가운데, 펠러는 12월 클리블랜드의 단장 행크 그린버그를 만난 뒤 은퇴를 발표했는데요. 그의 나이는 만 38세였습니다. 은퇴를 발표하면서 펠러는 "다른 팀에서 더 뛸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제가 지난 18년 동안 클리블랜드에서 이룬 성과를 깎아내리게 됩니다. 제가 몇 년 더 투수로 활약한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지금 같은 결정을 내려야 할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펠러는 클리블랜드에서만 18시즌 동안 활약하며 통산 266승 162패 3,827이닝 2,581탈삼진 평균자책점 3.25를 기록했고, 8번의 올스타, 6번의 다승 1위, 1번의 평균자책점 1위, 7번의 탈삼진 1위, 트리플크라운 1회, 월드시리즈 우승 1회, 노히터 3회를 달성했습니다. 은퇴 시점을 기준으로 탈삼진 2,581개는 월터 존슨(3,508개)과 사이 영(2,803개)에 이어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습니다.

 


은퇴 후의 삶

밥 펠러 / 출처 - MLB.com

 

펠러는 선수들의 권익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1956년 메이저리그 선수노조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고,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은퇴 연금을 조성하는 데에도 깊게 관여했는데요. 한편 그는 자신을 법인화한 최초의 선수이자, 자유계약(FA) 권리를 위해 노력한 최초의 선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또한, 야구 기념품 컨벤션에서 사인을 한 최초의 스타이면서, 다른 누구보다도 많은 사인을 한 선수이기도 했죠.

 

클리블랜드는 펠러가 은퇴한 직후인 1956년 12월 27일 그의 등번호 19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고, 펠러는 1962년 첫 번째 투표에서 93.8%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타이 콥(98.2%), 베이브 루스(95.1%), 호너스 와그너(95.1%)에 이어 역사상 4번째로 높은 득표율이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 <스포팅 뉴스> 선정 메이저리그 레전드 TOP 100에서 36위에 올랐습니다.

 

펠러는 80대가 되어서도 매일 야구공을 던졌고, 역사상 누구보다 많은 공을 던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마지막으로 투수로 나선 것은 2009년 6월 쿠퍼스타운에서 열린 시범경기였는데, 그의 나이는 만 90세였죠. 하지만 이듬해인 2010년 8월, 백혈병 진단을 받은 후 그 해 12월 1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클리블랜드 선수들은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2011시즌 개막전에서 등번호 19번을 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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