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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리그의 타격왕, 로드 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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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커류 / 출처 - MLB.com

로드 커류는 약점이 없는 타자입니다. 안쪽이든 바깥쪽이든, 높든 낮든, 빠른 공이든 변화구이든, 어떤 공에도 잘 대처합니다. 그는 공에 맞춰서 스윙을 합니다. 그래서 정말 대단합니다. 빈틈이 하나도 없습니다.
ㅡ 캣피시 헌터(Catfish Hunter, 명예의 전당 헌액자)

로드 커류는 1970-80년대를 풍미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교타자 중 한 명이자, 마리아노 리베라 이전에 파나마 출신으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최초의 선수입니다. 커류는 1967년부터 1985년까지 19시즌 통산 2469경기 3053안타 92홈런 1424득점 1015타점 353도루 타율 0.328 출루율 0.393 OPS 0.822를 기록했고 올스타 18회, 신인왕, MVP 1회, 로베르토 클레멘테상을 수상했는데요. 특히 아메리칸리그(AL) 타격왕을 7차례나 차지했습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커류보다 더 많은 타격왕을 차지한 타자는 타이 콥(12회), 호너스 와그너(8회), 토니 그윈(8회) 뿐입니다. 또한, 1969년부터 1983년까지 15년 연속 3할 타율을 달성했는데, 이는 타이 콥(19년), 스탠 뮤지얼(16년), 호너스 와그너(15년), 토니 그윈(15년)만이 이룩한 대기록이죠.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MLB 사무국은 2016년 아메리칸리그 타격왕의 이름을 '로드 커류 상', 내셔널리그는 '토니 그윈 상'으로 명명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데요. 여기에 1977년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공을 인정받아 로베르토 클레멘테상을 수상했고, 1985년 8월 4일 MLB 역사상 16번째로 통산 3,000안타를 달성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커류는 은퇴 후 1991년 첫 번째 투표에서 90.5%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그의 등번호 29번은 미네소타 트윈스와 LA 에인절스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됐습니다.


파나마 출신의 소년, 야구를 시작하다

로드 커류 / 출처 - MLB.com

 

'로드니 클라인 커류(Rodney Cline Carew)'는 1945년 10월 1일, 파나마의 가툰에서 안콘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태어났습니다. 해당 열차는 시대 상황상 인종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커류의 어머니 올가는 유색인종 전용 객실인 뒤 칸에 타고 있던 중 갑자기 진통을 느꼈습니다. 다행히 해당 열차에는 미국인 간호사인 마가렛 앤이 타고 있었고, 상황을 파악한 그녀는 앞 칸에서 의사인 로드니 클라인을 모셔와 올가의 분만을 도왔습니다.

 

올가는 감사의 표시로 아이의 이름을 '로드 클라인 커류'라고 지었습니다. 또한, 마가렛에게는 아이의 대모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는데요. 두 사람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커류의 아버지 에릭은 화가로 일했는데, 술에 취하면 가정 폭력을 휘두르기 일쑤였습니다. 따라서 올가는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기 위해 남편에게서 떼어놓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그녀의 목적지는 커류의 대모 마가렛이 있는 뉴욕이었습니다.

 

커류가 14살이 됐을 무렵, 뉴욕에 정착한 올가는 마가렛의 도움으로 커류를 포함한 다섯 남매를 마침내 미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훗날 커류는 이때의 기억을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느낌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는데요. 미국으로 이주한 커류는 조지 워싱턴 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고교 시절에는 야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커류는 학교를 마친 후 식료품점에서 재고관리 직원으로 일하며 영어를 익히는 데 집중했죠.

 

커류가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한 것은 1964년 준프로 팀인 뉴욕 캐벌리어스에 입단하면서부터였는데요. 당시 그의 나이는 만 18세였습니다. 사실 커류는 어린 시절 파나마에서 체육 교사인 이모부 조셉 프렌치로부터 야구를 배웠고, 감보아의 리틀리그에서 잠시 뛴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있었고, 한창 성장할 고교 시절 야구를 하지 않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배트를 다시 잡자마자 재능을 드러냈습니다.

 

타고난 재능을 갖춘 '컨택트 머신'

로드 커류 / 출처 - MLB.com

 

캐벌리어스 시절 커류의 팀 동료 중에는 미네소타 트윈스의 스카우트 먼로 카츠의 아들인 스티브 카츠도 있었는데요. 아들의 경기를 보기 위해 경기장에 방문한 먼로는 상대 투수의 모든 공을 라인드라이브 타구로 날려버리는 커류를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습니다. 그는 미네소타의 동료 스카우트인 허브 스타인에게 커류를 추천했고, 미네소타가 양키스 원정 경기를 치르기 위해 뉴욕에 오는 4월에 맞춰 입단 테스트 경기를 잡았습니다.

 

커류의 타격을 지켜본 미네소타 감독 샘 멜레 역시 한눈에 그의 재능을 알아봤고, 양키스가 커류를 보지 못하도록 입단 테스트 경기를 서둘러 마쳤습니다. 그리고 2달 후인 1964년 6월 24일, 커류는 브롱스의 한 레스토랑에서 계약금 5,000달러와 월급 400달러에 미네소타와 계약을 맺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야구를 다시 시작한 지 약 3달 만에 벌어진 일이었죠.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요?

 

먼저 언급해야 할 점은 커류가 역사상 최고의 핸드 아이 코디네이션(Hand-eye coordination, 눈과 손의 협응력)을 갖춘 타자였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그는 어떤 공도 배트에 맞힐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타고난 손목 힘 덕분에 간결한 스윙으로도 구장 전역에 쏜살같은 타구를 날릴 수 있었다는 점인데요. 이에 대해 스타인은 "저는 세계를 누비면서 많은 선수를 봤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재능은 커류였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커류는 1964년 루키 리그에서 뛰면서 타율 0.325 0홈런 21타점 OPS 0.822를 기록했고, 시즌 종료 후엔 군 복무를 위해 해병대에 공병으로 입대했습니다. 미국 영주권자였던 커류는 현역으로 6개월간 근무한 후 예비군 신분으로 5년 반을 더 복무했습니다. 그리고 예비군 신분으로 1965년 플로리다 리그(A)에서 타율 0.303 1홈런 52타점 OPS 0.794를, 1966년 캐롤라이나 리그(A)에서 타율 0.292 1홈런 30타점 OPS 0.738을 기록했습니다.


야구 인생의 은사를 만나다

로드 커류 / 출처 - MLB.com

 

1967년 4월 11일, 커류는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상대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볼티모어의 에이스 데이브 맥널리를 상대로 첫 타석부터 안타를 때려내는 등 데뷔전에서 4타수 2안타로 멀티히트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데뷔 첫해부터 타율 0.292 8홈런 51타점 OPS 0.750을 기록하며 올스타에 선정됐고, 시즌 종료 후 1위 20표 중 19표를 받아 미국 야구기자 협회(BBWAA) 선정 아메리칸리그(AL) 신인왕을 수상했습니다.

 

커류는 빅리그 2년 차인 1968년 타율 0.273 1홈런 42타점 OPS 0.659으로 혹독한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습니다. 하지만 1969년 타율 0.332 8홈런 56타점 19도루 OPS 0.853으로 3년 연속 올스타 선정과 함께 커리어 첫 타격왕을 차지하며 마침내 잠재력을 만개했죠. 이해 그는 도루 19번 중 7번을 홈 스틸로 기록하며 타이 콥(8번)에 이어 MLB 단일 시즌 역대 2위 기록을 세우는데요. 여기에는 빌리 마틴 감독의 철학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틴 감독은 현역 시절 양키스의 내야수로 4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했고, 미네소타에서 은퇴 후에는 스카우트부터 시작해 3루 코치와 산하 트리플 A 구단인 덴버 베어스의 감독을 거쳐 1969년 메이저리그 팀의 감독으로 부임했습니다. 훗날 디트로이트, 텍사스, 양키스, 애슬레틱스 등을 거치며 통산 1253승 1013패(.553)를 기록한 그는 일명 '빌리 볼'이라 불리는 공격적인 주루 플레이를 바탕으로 한 운영 철학으로 명성이 높았는데요.

 

커류와 마틴 감독은 1969년 이후 마틴이 구단주와 불화로 해고되면서 딱 한 시즌 밖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틴 감독과 함께 한 1년은 커류의 커리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죠. 훗날 커류는 2번의 40도루 시즌을 포함해 통산 353도루를 기록합니다. 훗날 커류는 마틴 감독에 대해 "그는 똑똑하고, 선수를 다루는 법을 압니다. 그는 경기장 안팎에서 저를 도왔고, 제가 정말 필요할 때 의미 있는 조언을 해줬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다

로드 커류 / 출처 - MLB.com

 

커류는 이듬해인 1970년 5월 20일 캔자스시전에서 미네소타 구단 역사상 최초로 힛 포 더 사이클을 기록하는 등 6월 22일까지 타율 0.374를 기록하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밀워키와 경기에서 병살타를 피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거친 슬라이딩을 한 마이크 헤겐과 2루에서 충돌해 왼쪽 다리에 큰 부상을 당하면서 3달간 결장했습니다. 시즌 후반 복귀한 그는 51경기 타율 0.366 4홈런 28타점 4도루 OPS 0.930으로 네 번째 시즌을 마칩니다.

 

하지만 부상 여파는 다음 시즌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커류는 1971년 타율 0.307 2홈런 48타점 OPS 0.736으로 5년 연속 올스타 선정과 함께 3할 타율을 달성했지만, 앞선 두 시즌 같은 폭발적인 생산성을 보이진 못했죠. 이듬해인 1970년에도 타율 0.318 0홈런 51타점 OPS 0.749로 6년 연속 올스타 선정과 함께 커리어 두 번째 타율 1위를 차지했지만, 1918년 잭 위트 이후 처음으로 홈런 없이 타격왕에 오른 선수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수 년간의 고생 끝에 부상 여파에서 벗어난 커류는 1973년을 기점으로 드디어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커류는 1973년 4월까지 타율 0.246에 그치는 부진을 겪었으나, 5월부터 무서운 속도로 안타를 몰아치면서 정규시즌을 타율 0.350 6홈런 98득점 41도루 OPS 0.881으로 마치고 2년 연속이자 세 번째 타격왕을 차지했습니다. 한편, 안타(203개)와 3루타(11개) 부문에서도 리그 1위에 올랐는데 이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커류는 1974년 153경기 218안타 3홈런 86득점 38도루 타율 0.364 출루율 0.433 OPS 0.879로 안타·타율·출루율에서 리그 1위에 올랐고, 1975년에도 143경기 192안타 14홈런 89득점 35도루 타율 0.359 출루율 0.421 OPS 0.919로 타율·출루율 부문 리그 1위에 오르며 4년 연속 타격왕을 차지했습니다. 이 기간 그의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는 각각 7.5, 7.8로 리그 1위였죠. 즉, 공수주를 종합했을 때 리그 최고의 타자였다는 뜻입니다.

 

미네소타를 떠나 에인절스로

로드 커류 / 출처 - MLB.com

 

1976년 미네소타의 감독으로 선임된 진 마우치는 커류의 포지션을 2루수에서 1루수로 옮깁니다. 이는 커류의 수비 부담을 줄이면서 타격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는데요. 커류는 1976년 타율 0.331 9홈런 97득점 49도루 OPS 0.858로 1위 조지 브렛(0.333)과 단 0.002 차이로 타격왕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만약 이해 타격왕을 차지했을 경우 그는 1972년부터 1978년까지 7년 연속 타격왕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할 수도 있었죠.

 

실제로 커류는 이듬해인 1977년 155경기 239안타 14홈런 128득점 100타점 23도루 타율 0.388 출루율 0.449 OPS 1.019 WAR 9.7로 안타·득점·타율·출루율·OPS·WAR 등 대부분의 타격 지표에서 리그 1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239안타는 단일 시즌 역대 12위이자 1930년 이후 최다 안타 기록이었고, 타율 0.388은 1957년 테드 윌리엄스(0.388) 이후 최고 기록이었는데요. 당연하게도 이해 아메리칸리그 MVP는 커류의 차지였습니다.

 

커류는 1978년에도 타율 0.333 5홈런 85득점 27도루 OPS 0.853을 기록하면서 커리어 7번째이자, 마지막 타격왕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팀의 패배와 젊은 재능을 유지하지 못하는 프런트의 무능력 때문에 이 시기 커류와 미네소타의 관계는 틀어질대로 틀어져 있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캘빈 그리피스 구단주의 인색한 연봉 협상 스타일과 인종차별적인 발언은 커류의 마음을 떠나게 하는 결정적인 방아쇠로 작용했습니다.

 

1978시즌 종료 후 커류는 미네소타를 떠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고, 미네소타는 1년 후 FA 자격을 얻는 커류가 대가 없이 팀을 떠나기 전에 그를 에인절스로 트레이드합니다. 커류의 영입은 비교적 신생 구단이었던 에인절스(1961년 창단)의 인지도를 높이는데 큰 영향을 미쳤는데요. 실제로 1979년 에인절스는 시즌권 판매로만 5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당일 티켓 판매를 포함할 경우 전년 대비 약 8만 달러의 추가 수익을 올렸습니다.

 

커리어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로드 커류 / 출처 - MLB.com

 

물론 커류의 영입은 흥행에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는데요. 비록 1978년 이후 타격왕 타이틀을 차지하진 못했지만, 커류는 3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에도 불구하고 1979년부터 1983년까지 5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하는 꾸준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에인절스 역시 커류가 합류한 1979년 88승 74패(.543)로 지구 1위를 차지하며 창단 후 19년 만에 처음으로 가을야구 무대를 밟았고, 1982년에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성과를 남겼습니다.

 

커류는 1979년 정규시즌 타율 0.318 3홈런 78득점 18도루 OPS 0.810을 기록했고,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도 타율 0.412(17타수 7안타)로 분전했지만 팀의 탈락을 막아내진 못했습니다. 1980년에도 타율 0.331 3홈런 74타점 23도루 OPS 0.833을 기록했고, 1981년에는 타율 0.305 2홈런 57타점 16도루 OPS 0.753으로 주춤했지만, 1982년 타율 0.319 3홈런 88득점 10도루 OPS 0.799로 반등에 성공하며 팀을 다시 가을야구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1983년 타율 0.339 2홈런 66득점 6도루 OPS 0.820을 기록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습니다. 하지만 1984년 타율 0.295 3홈런 42타점 4도루 OPS 0.720으로 15시즌 연속 3할 타율 기록이 중단됩니다. 커류는 이듬해인 1985년 8월 4일, 친정팀 미네소타와 경기에서 좌완 프랭크 비올라를 상대로 통산 3,000번째 안타를 때려내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16번째로 3000안타 고지를 밟았는데요. 1985년은 그의 현역 마지막 시즌이기도 했죠.

 

1985년 타율 0.280 2홈런 69득점 5도루 OPS 0.717을 기록한 후 에인절스와 재계약을 거절하고 다시 한번 FA 시장에 나온 커류는 어떤 팀으로부터도 메이저리그 계약을 제시받지 못했습니다. 여기에는 1986년부터 메이저리그 로스터가 24명으로 축소된 것도 영향을 미쳤죠. 그는 보스턴으로부터 온 마이너리그 타격 코치 제안과 샌프란시스코의 마이너리그 선수 계약을 거절하고 은퇴를 선택했는데요. 은퇴 시점 그의 나이는 39세였습니다.

 

 

은퇴 후의 삶

로드 커류 / 출처 - MLB.com

 

커류는 1991년 첫 번째 투표에서 90.5%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이는 파나마 출신 야구 선수로서는 최초의 기록이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파나마시티 국립 경기장은 '로드 커류 경기장'으로 이름을 고쳤고, 그의 등번호 29번은 미네소타와 에인절스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됐습니다. 한편, 그는 1999년 <스포팅 뉴스>가 선정한 메이저리그 레전드 TOP 100에서 61위를 차지했고, MLB 올-센추리팀 최종 후보에 올랐습니다.

은퇴 후 커류는 애너하임에 있는 자택 근처에서 타격 교실을 운영했는데요. 그는 프로 선수들 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선수들까지 성실하게 지도했고, 1992년 에인절스의 타격 코치로 초빙되어 9년간 재직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한, 사회 봉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2016년부터 해당 시즌 아메리칸리그에서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한 선수에게는 '로드 커류 타격 챔피언십 어워드'가 수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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