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츠의 위대한 에이스, 톰 시버

톰 시버 / 출처 - MLB.com
톰 시버는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이자, 뉴욕 메츠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입니다. 또한, 개성 넘치는 에이스들이 즐비했던 1960-70년대의 지배자이자, 최후의 승자이기도 했습니다. 시버는 1967년부터 1986년까지 20년간 통산 311승 205패 231완투 61완봉 4,783이닝 3,640탈삼진 ERA 2.86을 기록했는데요. MLB 역사상 300승과 3,000탈삼진을 동시에 달성한 9명 중 통산 평균자책점이 2점 대인 투수는 월터 존슨과 시버뿐입니다.
시버는 베이스볼 레퍼런스 기준 WAR(승리기여도)에서도 109.9승으로 역대 6위이자, 라이브볼 시대 투수 중 로저 클레멘스(139.2)에 이어 2위에 올라있는데요. 클레멘스가 금지 약물을 복용한 것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시버가 1위로, 그 뒤를 그렉 매덕스(106.6)와 랜디 존슨(101.1)이 잇고 있죠. 또한 시버는 메츠 역사상 최초의 영구 결번(41번) 선수이자,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98.84%로 리베라 이전까지 역대 최고 득표율을 기록한 투수였습니다.
시버의 입단 후 신생 팀 메츠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1969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더 프랜차이즈(The Franchise)'입니다. 시버가 투수들의 시대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구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구종과 정교한 제구력, 뛰어난 경기 운영 능력을 모두 갖춘 '완성형 투수'였기 때문인데요. 시버는 특유의 '드롭 앤 드라이브' 투구폼으로 강속구를 던졌지만, 놀란 라이언만큼 빠르지는 않았습니다.
시버는 밥 깁슨이나 스티븐 칼튼처럼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던지거나, 샌디 코팩스나 짐 팔머처럼 위력적인 커브를 던지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강속구, 슬라이더, 커브를 모두 최고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었고 투구 위치와 구속 변화, 예측 불가능한 볼 배합을 바탕으로 타자의 약점을 공략하는 투구 지능을 지녔었습니다. 심지어 당대 최고 수준의 훈련량을 소화하는 성실성과 함께 늘 상대 타자를 분석하는 학구적인 면모도 갖추고 있었죠.
작은 키의 야구 소년

USC 시절 톰 시버 / 출처 - MLB.com
'조지 토마스 시버(George Thomas Seaver)'는 1944년 11월 1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프레즈노에서 찰스 헨리 시버와 베티 리 시버의 사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시버의 아버지는 건포도를 수확해 전국 각지로 배송하는 회사의 임원으로 일했지만 어린 시절에는 골프 선수이자 수영, 배구, 서핑에도 능한 만능 스포츠맨이었는데요. 아버지로부터 운동신경을 물려받은 시버는 리틀리그부터 프레즈노 고교 시절까지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시버는 고교 졸업 후 메이저리그 구단들과 계약을 맺지도, 명문 대학으로부터 장학금 제안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프레즈노 고교 시절 시버는 키 168cm 몸무게 70kg에 불과한 선수였기 때문이죠. 뛰어난 제구력과 투구 지능을 바탕으로 체격과 힘의 부족을 보완했지만, 패스트볼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프로 레벨에서 통할지는 미지수였습니다. 결국 대학 진학에 실패하면서 고교 졸업과 함께 징집 대상이 된 시버는 미국 해병대에 입대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해병대에서 현역으로 복무하는 동안 고된 훈련과 규칙적인 생활을 통해 신체적으로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약점이었던 패스트볼이 몰라볼 정도로 강력해진 것이죠. 6개월간 현역 복무를 마친 시버는 이듬해인 1963년 <프레즈노 시티 칼리지>에 입학했고, 2학년 때는 11연승과 함께 수많은 학교 기록을 세웠는데요. 이 시점에서 시버의 체격은 6피트 1인치(185cm)에 195파운드(88kg)까지 성장해 있었습니다.
그런 시버를 주목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USC, 남가주 대학)을 11번이나 대학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전설적인 감독 로드 디듀스(Rod Dedeaux)도 그중 한 명이었죠. 디듀스는 시버에게 자신의 팀에 합류할 것을 제안했고, 1964년 여름 알래스카로 건너가 준-프로 팀인 골드패너스에서 활약하며 자신의 실력을 증명한 시버는 전액 장학금을 받고 야구 명문 USC으로 편입하면서 본격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기 시작합니다.
행운의 제비 뽑기

톰 시버 / 출처 - MLB.com
디듀스 감독은 한국인 메이저리거 박찬호와도 인연이 있는데요. 박찬호는 2006년 1월,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내게 용기와 힘을 주신 두 분'이라는 제목으로 이틀 전 타계한 민관식 전 대한체육회장과 함께 디듀스를 언급하면서 생전에 해준 조언과 결혼 축하 등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깊은 애도를 표했습니다. 실제로 박찬호는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을 무렵, 강력한 하체와 드롭 앤 드라이브 투구폼 때문에 시버와 닮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습니다.
USC에서 첫해인 1965년 시버는 10승 2패를 기록하며 100이닝 동안 100탈삼진을 기록했습니다. 1965년은 메이저리그에서 신인 드래프트가 처음 시작된 해이기도 했는데요. 이해 다저스는 시버를 10라운드에서 지명하며 2000달러의 계약금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시버가 이를 거부하고 7만 달러를 요구하면서 계약이 무산됐죠. 그리고 시버는 196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20순위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지명을 받습니다.
애틀랜타는 계약금으로 만족할 만한 금액(5만 1,500달러)을 제안했고, 어린 시절 그의 응원팀이기도 했기에 시버는 입단을 승락했습니다. 하지만 대학리그 기간 중에는 대학 소속 선수와 계약할 수 없다는 메이저리그 규정이 문제가 됐는데요. 시버는 1966년 대학 리그에 등판하지 않았지만, USC는 시범 경기를 두 번 치른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근거로 당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 윌리엄 에커트는 3월 2일 애틀랜타와 시버의 계약을 무효화합니다.
이후 시버는 USC로 복귀하려고 했지만 이번엔 프로 계약을 맺었다는 이유로 대학리그(NCAA)가 그의 출전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시버의 아버지가 이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려고 하자, 에커트는 다른 팀들이 애틀랜타의 제안(5만 1500달러)에 맞춰 줄 의사가 있을 경우, 제비 뽑기를 통해 계약권을 획득할 수 있도록 중재안을 내놓습니다. 추첨에 참가한 세 팀(필라델피아, 클리블랜드, 메츠) 중 행운의 제비를 뽑은 팀은 바로 뉴욕 메츠였습니다.
더 프랜차이즈(The Franchise)

톰 시버 / 출처 - MLB.com
당시 메츠는 1962년 창단 이후 4시즌 연속 내셔널리그 꼴찌를 기록 중이었습니다. 메츠는 초대 감독으로 뉴욕 양키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명장 케이시 스텡겔을 영입해서 차근차근 전력을 다져가는 것을 구상했지만, 스텡겔 감독은 이미 일흔을 넘긴 나이였고 팀에는 어리고 실력 미달인 선수들로 가득했죠. 뉴욕 언론은 이런 초창기 메츠를 '스텡겔의 유치원'이라고 불렀는데요. 단, 홈 경기가 연일 매진됐을 정도로 인기만큼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시버가 입단하면서 신생팀 메츠에게도 서광이 비추기 시작했는데요. 시버는 입단 첫해인 1966년 인터내셔널 리그(AAA)의 잭슨빌 선즈에서 34경기 12승 12패 210이닝 188탈삼진 ERA 3.13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6월 6일, 고교 시절부터 연인이었던 낸시 린 맥킨타이어와 백년가약을 맺었죠. 이 시기 잭슨빌의 감독 솔리 헤머스는 시버의 재능과 침착함에 대해 감탄하며 "그는 21세의 몸에 35세의 머리가 더해진 투수"라 말했습니다.
메츠는 1967년 신임 단장 빙 디바인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선수단 개편에 나섰고, 21세의 시버를 메이저리그에 콜업했습니다. 시버는 1967년 4월 13일 데뷔전에서 피츠버그를 상대로 5.1이닝 6피안타 4볼넷 8탈삼진 2실점을 기록하며 팀 승리를 이끌었고, 전반기 8승 5패 ERA 2.65로 데뷔 첫해부터 올스타에 선정됐습니다. 그리고 16승 13패 251이닝 170탈삼진 ERA 2.76으로 시즌을 마치며 메츠 구단 역사상 최초로 NL 신인왕에 올랐습니다.
시버의 등장은 메츠 팬들에게 이전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희망을 가져다 줬는데요. 이런 느낌을 받은 건 팬들만이 아니었죠. 데뷔 시즌 올스타에 선정된 시버는 올스타전에서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행크 애런(통산 755홈런)에게 사인을 받으려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을 소개하려고 하는 순간, 행크 애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꼬마야, 난 네가 누군지 알아. 그리고 조만간 이 경기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알게 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
전성기의 시작

애런의 말은 예언이 됐습니다. 시버는 1968년 16승 12패 278이닝 205탈삼진 ERA 2.20으로 소포모어 징크스 없이 한층 더 뛰어난 성적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1969년 25승 7패 273.1이닝 208탈삼진 ERA 2.21로 다승왕을 차지하면서 창단 이후 7년 연속 리그 9위 이하에 머물렀던 메츠의 첫 가을야구 진출을 이끌고, 3년 연속 올스타와 함께 커리어 첫 사이영상을 수상했습니다. 한편, MVP 투표에서도 윌리 맥코비(SF)에 이어 2위에 올랐습니다.
이해 메츠는 마지막 48경기에서 37승(11패)을 거두며 한때 14경기 차로 앞서 있었던 시카고 컵스를 제치고 NL 동부 지구 1위를 차지했는데요. 그 중심에는 시버가 있었습니다. 시버는 순위 싸움이 한창이던 7월 9일 셰이스타디움의 5만 명이 넘는 관중 앞에서 컵스를 상대로 9회 말 1사까지 퍼펙트를 유지하는 등 9이닝 1피안타 11탈삼진 무실점 완봉승을 거뒀고, 마지막 8번의 등판에서 8경기 연속 완투승(8승 무패 ERA 1.00)을 기록했습니다.
메츠의 창단 첫 가을 야구 상대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였습니다. 팀의 에이스로서 애틀랜타와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NLCS) 1차전에 등판한 시버는 7이닝 8피안타 3볼넷 2탈삼진 5실점으로 고전했는데요. 하지만 7회까지 4-5로 뒤져있던 메츠는 8회 초 애틀랜타의 너클볼러 필 니크로를 상대로 5득점을 집중시키며 역전승을 거뒀습니다. 기세를 탄 메츠는 2차전과 3차전에서도 승리하며 3연승으로 월드시리즈 진출을 확정 지었습니다.
월드시리즈를 앞두고 대부분의 전문가는 볼티모어의 우세를 점쳤는데요. '최초의 양대 리그 MVP' 프랭크 로빈슨, '인간 진공청소기' 브룩스 로빈슨이 이끄는 볼티모어는 당대 최강의 타선을 자랑했습니다. 여기에 마이크 쿠엘라, 데이브 맥널리, 짐 파머가 이끄는 마운드도 메츠에게 뒤지지 않았죠. 무엇보다도 선수단 대부분이 20대로 구성된 메츠와는 달리, 볼티모어는 1966년 우승을 경험한 베테랑을 중심으로 신구 조화를 갖춘 팀이었습니다.
ㅣ어메이징 메츠(Amazing Mets)

1969년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한 메츠 / 출처 - MLB.com
볼티모어가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시버를 5이닝 4실점으로 무너뜨리며 손쉽게 승리를 거둘 때까지만 하더라도 전문가들의 예상이 맞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메츠는 1패 후 4연승으로 모두의 예상을 깨고 창단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어메이징 메츠'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1차전에 이어 4차전 선발로 나선 시버도 10이닝 6피안타 2볼넷 6탈삼진 1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1차전 패배를 설욕하고 팀의 우승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프로 데뷔 4년 만에 거둔 눈부신 성공에도 불구하고 메츠의 에이스는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시버는 1970년 18승 12패 290.2이닝 283탈삼진 ERA 2.82로 평균자책점(이하 ERA)과 탈삼진 부문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는데요. 특히 1970년 4월 22일에는 샌디에이고를 상대로 탈삼진 19개를 기록하며 스티브 칼튼과 함께 단일 경기 최다 탈삼진 공동 1위에 올랐고, 마지막 10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연속 탈삼진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시버는 이듬해 MLB 역사상 투수로서 손에 꼽힐 만한 압도적인 시즌을 보냅니다. 그는 1971년 20승 10패 286.1이닝 289탈삼진 ERA 1.76으로 ERA와 탈삼진 부문 리그 1위를 차지했는데요. 이해 NL 사이영상은 다승과 이닝 부문 리그 1위를 차지한 시카고 컵스의 퍼거슨 젠킨스(24승 13패 325이닝 263탈삼진 ERA 2.77)에게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지금 기준에서는 ERA가 1.01이나 낮은 시버가 사이영상을 받았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후에도 시버는 빅리그 첫해인 1967년부터 1978년까지 12시즌 중 1974년을 제외한 11시즌 동안 2점대 이하 ERA를 유지하는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심지어 같은 기간 15승+을 10회, 250이닝+과 200탈삼진+을 각각 11회씩 달성했죠. 또한 다승왕 2회, 탈삼진왕 5회, ERA 1위 3회를 차지했고 올스타에 11번, 사이 영 상에 3번(1969, 1973, 1975년) 선정됐습니다. 이런 꾸준함은 시버를 투수 시대(1960-70년대)의 지배자로 만들어줬습니다.
제2의 전성기

톰 시버 / 출처 - MLB.com
많은 전문가는 시버의 최전성기를 첫 사이영상을 차지한 1969년부터 두 번째 사이영상을 차지한 1973년까지로 꼽습니다. 1974년 시버는 커리어 첫 12년 중에서 처음으로 평균자책점이 3.00을 넘었고, 올스타에 선정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74년은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해 중 하나였습니다. 이해 시버는 어깨와 골반 통증을 참고 뛰면서도 11승 11패 236이닝 201탈삼진 ERA 3.20을 기록하며 7년 연속 200탈삼진을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시즌 막판 오랜 통증의 원인을 찾는데요. 케네스 릴랜드 박사는 시버의 통증 원인을 수년간 누적된 피로 때문에 발생한 좌골 신경 문제와 골반 구조 탈구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이는 무릎이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낮추어 앞으로 나아가는 시버 특유의 '드롭 앤 드라이브' 투구폼과 관련이 깊었죠. 이에 따라 두 차례의 정골요법 치료를 진행했는데, 시버에 따르면 이후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던 통증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건강을 회복한 시버는 1975년 22승 9패 280.1이닝 243탈삼진 ERA 2.38로 다승과 탈삼진 부문 리그 1위를 차지하고 세 번째 사이영상을 수상하며, 샌디 코팩스에 이어 3차례 사이영상을 수상한 메이저리그 역사상 두 번째 투수가 됐습니다. 그리고 1976년에도 14승 11패 271이닝 235탈삼진 ERA 2.59으로 탈삼진 부문 리그 1위에 오르며 9시즌 연속 200탈삼진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시버와 메츠의 갈등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1974년 캣피시 헌터에 이어 1975년 앤디 메서스미스와 데이브 맥널리가 '사이츠의 결정'으로 자유계약 신분을 얻은 후 메이저리그에는 서비스 타임(로스터 등록일수) 6년을 채운 선수에게 자유계약 선수 자격을 부여하는 FA 제도가 도입됐습니다. 이에 따라 1976시즌을 앞두고 맺었던 연간 22만 5,000달러에 인센티브가 포함된 시버의 계약은 갑자기 시대에 뒤떨어진 계약이 됐고, 시버는 다른 정상급 투수들과 동등한 연봉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한밤중의 대패(Midnight Massacre)

신시내티 레즈 시절 톰 시버 / 출처 - MLB.com
이를 전해 들은 당시 메츠의 사장 도널드 그랜트는 시버를 배은망덕하다고 여겼고, 자신과 친분이 있는 <뉴욕 데일리 뉴스>의 기자 딕 영을 포섭해 시버에게 부정적인 기사를 쓰게 했습니다. 영은 시버를 '문제아'로 지칭하며 "매사에 불평불만이 많고, 팀의 사기를 꺾는다"라고 비난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에 남길 원했던 시버는 로린다 드 룰렛 구단주, 조 맥도날드 단장과 협상해 3년 110만 달러 계약에 원칙적으로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뉴욕 데일리 뉴스>를 읽던 그는 "시버의 아내인 낸시 시버는 놀란 라이언의 아내인 루스 라이언과 매우 친한 데, 그녀에게서 라이언이 시버보다 더 많은 돈을 받는다는 걸 듣고 남편에게 더 많은 연봉을 요구하도록 부추겼다"라고 영이 쓴 거짓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더 이상 그랜트 사장과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시버는 즉시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1977년 6월 15일 신시내티 레즈로 이적했습니다.
훗날 이 트레이드는 '한밤중의 대패(Midnight Massacre)'라 불리게 되는데요. 시버는 신시내티로 이적 후 맹활약을 펼치면서 1977시즌을 21승 6패 261.1이닝 196탈삼진 ERA 2.58로 마칩니다. 비록 4개 차이로 10년 연속 200탈삼진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시버는 통산 10번째 올스타와 함께 사이영상 투표에서도 3위에 오르며 여전한 기량을 과시했습니다. 반면, 메츠는 시버가 떠난 1977년을 시작으로 3년 연속 리그 최하위에 머물렀습니다.
시버는 1978년 16승 14패 259.2이닝 226탈삼진 ERA 2.88을 기록했고, 6월 16일 세인트루이스를 상대로 커리어 유일의 노히터를 달성했습니다. 이후에도 시버는 1982년까지 신시내티 소속으로 5시즌 반 동안 75승 46패 ERA 3.18로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는데요. 특히 단축시즌이었던 1981년 4월 8일 개막전에서 통산 3,000번째 탈삼진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14승 2패 166.1이닝 87탈삼진 ERA 2.54을 기록하며 사이영상 투표 2위에 올랐습니다.
메츠로 복귀 그리고 두 번째 이별

화이트삭스 시절 톰 시버 / 출처 - MLB.com
하지만 시버는 1982년 어깨 부상으로 힘든 시즌을 보내며 5승 13패 ERA 5.50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신시내티의 트레이드 대상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12월 16일 트레이드를 통해 친정팀인 메츠로 복귀하는데요. 당시 메츠는 1980년 출판계 재벌 넬슨 더블데이로 구단주가 교체됐고, 문제를 일으켰던 그랜트 사장은 이미 1978시즌 후 해고된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시버가 메츠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진작에 열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친정팀으로 돌아온 시버는 1983년 9승 14패 231이닝 135탈삼진 ERA 3.55를 기록하며 반등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가 메츠에서 보낸 시버의 마지막 시즌이었죠. 메이저리그는 1982년부터 FA 자격을 얻은 선수를 다른 구단에서 영입하는 경우 선수의 전 소속 구단에게 보상 선수를 지명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는데요. 아무도 39세의 고액 연봉 투수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메츠는 시버를 보호 명단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는 오판이었습니다. 1984년 1월 20일, 데니스 램프를 FA로 떠보낸 화이트삭스가 보상 선수로 시버를 지명한 것이죠. 화이트삭스 사장 에디 아인혼은 "팀을 이끌어줄 기량과 경험을 갖춘 시버를 영입하게 되어 기쁘다. 이곳은 그가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최고의 장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기대대로 시버는 1984년 15승 11패 ERA 3.95, 1985년 16승 11패 ERA 3.17을 기록했고 화이트삭스에서 통산 300승을 달성했습니다.
1986년 봄, 어머니를 잃은 후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길 원했던 시버는 동부로 트레이드해달라고 요청했고, 화이트삭스는 시버의 소원대로 시즌 중반 그를 보스턴으로 트레이드했습니다. 만 41세의 시버는 1986년 보스턴으로 이적 후 5승 7패 ERA 3.80을 기록하며 팀의 가을야구 진출에 기여했는데요. 하지만 무릎 부상으로 월드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했고, 벤치에서 7차전 빌 버크너의 실책과 친정팀 메츠의 우승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은퇴 후의 삶

톰 시버 / 출처 - MLB.com
1986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은 시버는 1987년 부상으로 선발진에 큰 타격을 입은 메츠의 요청을 받아 친정팀으로 복귀를 추진했는데요. 하지만 마이너리그 등판에서 3경기 연속 부진하자, 시버는 "42세의 제겐 더 이상 경쟁력이 없습니다. 이미 모든 힘을 다 써버렸습니다"라며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시버는 1988년 메츠의 영구 결번(41번)으로 지정됐고, 1992년 첫 번째 투표에서 98.84%(당시 1위, 현재 4위)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됩니다.
현역에서 은퇴 후 시버는 1989년부터 2005년까지 메츠와 양키스의 지역 방송과 NBC 스포츠의 전국 중계 해설 위원을 맡았습니다. 2005년부터는 가족들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캘리스토가로 이사해서 포도 농장을 운영했고, 이후 매년 명예의 전당 헌액식마다 만찬에서 동료들과 함께 나눠 마실 와인을 가져왔습니다. 시버는 2020년 8월 31일, 치매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합병증으로 인해 향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