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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속구 투수의 대명사, 놀란 라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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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라이언 / 출처 - MLB.com

 

놀란 라이언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강속구 투수 중 한 명입니다. 라이언은 1966년부터 1993년까지 27시즌 통산 324승 292패 5,386이닝 5,714탈삼진 ERA 3.19의 성적을 남겼고 올스타 8회, 방어율왕 2회, 탈삼진왕 11회를 차지했는데요. 탈삼진 5,714개는 2위 랜디 존슨보다 무려 839개나 많은 MLB 역대 1위 기록입니다. 이 밖에도 라이언은 6번의 300K 시즌, 15번의 200K 시즌, 215번의 10K 경기 등 탈삼진에 관한 수많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라이언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안타를 뽑아내기가 어려운 투수기도 했습니다. 그의 통산 피안타율 0.204는 1,500이닝 이상 투구한 투수 가운데 역대 1위에 해당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라이언은 남들은 평생 한 번 하기도 힘든 노히터를 7번(역대 1위)이나 달성했는데요. 게다가 통산 12번의 1안타 완봉승 역시 밥 펠러와 함께 역대 공동 1위입니다. 이러한 탈삼진 능력과 피안타 억제력은 라이언을 당대 가장 화려한 투수로 만들어줬습니다.

 

이를 가능하게 만들어 준 것은 라이언의 구위였습니다. 라이언은 시속 100마일(161km)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경기 내내 꾸준히 던졌는데요. 이는 현시점에서도 빠른 구속이지만, 그가 활동하던 1970~80년대에는 더 압도적인 구속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내구성이죠. 부상 위험성이 높은 강속구 투수임에도 그는 무려 27년이나 뛰면서 5,386이닝(역대 5위)을 소화했는데, 만 46세가 된 그의 마지막 공조차 자그마치 그 속도가 158km/h에 달했습니다.

 

물론 압도적인 탈삼진 능력과 피안타 억제력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도 여러 약점이 있었습니다. 라이언은 역사상 가장 많은 2,795개의 볼넷(2위 스티브 칼튼, 1,833개)을 내줬는데요. 또한 277개의 폭투로 라이브볼 시대 1위, 757개의 도루 허용으로 역대 1위, 91개의 실책으로 투수 역대 1위에 올라있습니다. 한편, 경력 내내 약팀에서 뛴 탓에 292패(역대 3위)나 당한 점도 문제였죠. 이런 이유로 라이언은 현역 시절 한번도 사이 영 상을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원조 텍사스 출신 파이어볼러

놀란 라이언 / 출처 - MLB.com

 

놀란 라이언의 본명은 린 놀란 라이언 주니어(Lynn Nolan Ryan Jr.)로 1947년 1월 31일 미국 텍사스주 남부의 작은 마을인 레푸지오에서 린 놀란 라이언 시니어와 마사 리 핸콕 라이언 부부의 여섯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라이언이 생후 6주쯤 됐을 때, 석유 회사의 공장 관리자로 일하던 아버지가 전근을 가면서 그의 가족은 근처 도시인 앨빈으로 이사했는데요. 라이언은 7살 때 아버지와 함께 앞마당에서 캐치볼을 하면서 야구를 처음 접했습니다.

 

그때부터 야구를 좋아하게 된 라이언은 동네 아이들과 근처 공터에서 야구를 즐겼고, 9살 때 리틀리그에 입단하면서 본격적으로 야구에 입문했습니다. 어린 시절 놀란은 부업으로 지역 신문 배급업을 하던 아버지를 도와 매일 새벽 1시에서 4시 사이에 55마일(89km)에 달하는 경로를 거쳐 1500부에 달하는 신문을 배달했는데요. 이 시기 라이언은 신문을 원통형으로 말아 고객들의 집 앞에 던져 주면서 팔의 근력을 키웠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매일 같은 시간에 빠짐없이 신문을 배달하는 일을 통해 그는 책임감이라는 중요한 덕목을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라이언은 미식축구 경기장에서 소프트볼을 한쪽 엔드존에서 반대편 엔드존까지 100야드(91.4m) 이상을 던질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반 때 훗날 미국 프로미식축구(NFL) 러닝백이 되는 노엄 블라이치와 충돌해 다친 후 미식축구를 그만두고 야구에 집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앨빈 고교에 입학한 라이언은 어느 날 중학교 때 했던 것처럼 재미 삼아 미식축구 경기장에서 소프트볼을 한쪽 엔드존에서 반대편 엔드존까지 100야드(91.4m) 이상을 던졌고, 이를 우연히 지켜본 앨빈 고교 야구부 감독 짐 왓슨은 즉시 라이언을 야구부에 스카우트했습니다. 그리고 2학년부터 앨빈 고교의 에이스 자리를 꿰찬 라이언은 3학년 때 이닝당 평균 2개의 삼진을 잡아내면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특유의 하이킥과 오버핸드 스로를 장착하다

놀란 라이언 / 출처 - MLB.com

 

그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인물은 뉴욕 메츠의 스카우트 레드 머프였는데요. 머프는 메이저리그에선 부상으로 인해 두 시즌밖에 뛰지 못했지만, 현역 시절 강력한 구위를 갖춘 투수였죠. 은퇴 후 메츠의 스카우트로 일하고 있던 그는 훗날 라이언의 투구를 처음 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전날 밤 저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구속이 빠른 짐 멀로와 터크 패럴을 봤습니다. 그 녀석(라이언)은 이미 두 사람보다 훨씬 빨랐죠."

 

머프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메츠는 1965년 메이저리그 최초의 신인 드래프트에서 12라운드 295순위에 라이언을 지명했습니다. 라이언은 계약 직후 애팔래치언 리그(루키 레벨)의 메리언 메츠로 보내져 프로 경력을 시작했는데요. 그곳에서 만 18세의 라이언은 13경기(12선발) 3승 6패 78이닝 '56볼넷' 115탈삼진을 기록하며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죠. 다만 이 시기 라이언의 투구 스타일은 우리가 아는 것과 거리가 매우 멀었습니다.

 

라이언은 6피트 2인치(188cm)라는 키에 비해 몸무게는 150파운드(68kg)밖에 되지 않는 매우 마른 체형이었고, 투구폼도 오버핸드가 아닌 사이드암이었습니다. 하지만 메츠에서 체계적인 관리를 받으면서 조금씩 우리가 아는 모습을 갖춰갔는데요. 그는 첫 시즌을 마친 후 겨우내 메츠의 요청에 따라 식사 외에도 단백질 보충제를 마시면서 체격을 키웠고, 프로 2년 차부터는 특유의 하이킥과 함께 오버핸드로 투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인 1966년 라이언은 메츠 산하 싱글 A와 더블 A를 거치며 32경기 17승 4패 202이닝 139볼넷 307탈삼진 ERA 2.90을 기록했고, 시즌 막판 만 19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콜업되어 2경기 1패 3이닝 3볼넷 6탈삼진 ERA 15.00을 기록했습니다. 라이언은 1966시즌 종료 후 육군 예미군에 입대했고, 이 때문에 이듬해 6월이 되어서야 첫 등판에 나섰는데요. 하지만 얼마 못 가 팔꿈치 부상을 당하면서 1967시즌 4경기 등판에 그쳤습니다.


전도유망한 유망주에서 골칫덩이로

놀란 라이언 / 출처 - MLB.com

 

팔꿈치 부상에서 회복한 라이언은 1968년 스프링 캠프에서 인상적인 활약으로 메츠 신임 감독 길 호지스의 눈에 띄면서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68년 4월 14일, 라이언은 메이저리그 첫 선발 등판에서 휴스턴을 상대로 5회까지 노히터를 기록하는 등 6.2이닝 3피안타 2볼넷 8K 무실점 호투를 펼치며 역사적인 첫승을 거뒀죠. 하지만 이때 오른손에 물집이 잡히는 바람에 자진해서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습니다.

 

라이언은 1968년 첫 두 달 동안 5승 4패 77.1이닝 40볼넷 85탈삼진 ERA 1.98을 기록하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는데요. 특히 1968년 5월 라이프(LIFE) 지는 그를 집중 조명했는데, 인터뷰에 응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들은 라이언의 패스트볼을 당대 최고의 투수인 샌디 코팩스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했죠. 특히 1967년 MVP 올랜도 세페다는 "라이언은 내가 메이저리그에서 본 최고의 젊은 투수"라는 극찬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손가락 물집과 남은 시즌 동안 압도적인 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면서 라이언은 1968년을 21경기 6승 9패 134이닝 75볼넷 133탈삼진 ERA 3.09으로 마쳤고, 1969년에는 군 복무로 인해 25경기 6승 3패 89.1이닝 53볼넷 92탈삼진 ERA 3.53을 기록하는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1969년 라이언은 NLCS 3차전 7이닝 2실점(승), WS 3차전 2.1이닝 무실점(세이브)을 기록하며 메츠의 창단 첫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라이언은 1970년 27경기 7승 11패 131.2이닝 97볼넷 125탈삼진 ERA 3.42, 1971년에도 10승 14패 152이닝 116볼넷 137탈삼진 ERA 3.97로 활약했으나, 이는 데뷔 초에 받은 기대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죠. 무엇보다도 단점으로 부각된 건 고질적인 제구 불안이었는데요. 메츠에서 5시즌 동안 라이언은 29승 38패 501이닝 493탈삼진 ERA 3.58을 기록했는데, 501이닝 동안 내준 344볼넷은 9이닝당 개수로 환산했을 때 무려 6.1개에 달했습니다.


에인절스로 트레이드되다

놀란 라이언 / 출처 - MLB.com

 

전문가들은 메츠 시절 라이언의 발전을 방해한 요인으로 크게 세 가지를 꼽습니다. 첫째, 라이언은 데뷔 초기 예비군 복무 때문에 선발 등판 간격이 일정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투구 감각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둘째, 당시 메츠는 톰 시버, 제리 쿠스먼, 게리 젠트리라는 젊고 재능 있는 선발진을 갖추고 있었기에 라이언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메츠 코치진의 지도 스타일도 라이언과 맞지 않았습니다.

 

당시 메츠 투수 코치는 루브 워커가 맡고 있었는데요. 전직 포수 출신인 워커는 투수들의 멘탈적인 측면에 타고난 감각을 지니고 있었고, 상대 타자들을 분석해 볼 배합을 짜는 데도 매우 능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톰 시버, 제리 쿠스먼, 게리 젠트리를 비롯해 1969년 메츠의 우승을 이끈 강력한 투수진을 키워낼 수 있었죠. 하지만 투수 출신이 아니었기에 투수 메커니즘을 지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톰 시버, 제리 쿠스먼과 같은 대학 출신 투수들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대학을 거치면서 코치들에게 투구폼과 다양한 구종을 배웠기 때문이죠. 반면, 만 19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에 콜업되기 전까지 별다른 투구 훈련을 받지 못한 라이언에겐 투구폼을 다듬어 주고 새로운 구종을 가르쳐 줄 코치가 필요했는데요. 이러한 상황들이 겹치면서 한때 전도 유망했던 라이언의 커리어는 막다른 길로 치닫는 듯했습니다.

 

라이언은 1971시즌 종료 후 아내 루스에게 메츠가 만약 겨울 동안 자신을 트레이드하지 않는다면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일방적인 거래 중 하나로 평가되는 트레이드가 일어납니다. 1971년 12월 10일, 3루수 보강을 노리던 메츠가 올스타 유격수 짐 프레고시를 영입하기 위해 4명의 부진한 선수를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보낸 것이죠. 그중 한 명은 바로 라이언이었습니다.


트레이드 후 각성에 성공하다

놀란 라이언 / 출처 - MLB.com

 

결과적으로 메츠에게 이 트레이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요. 프레고시는 1966년부터 1970년까지 5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된 유격수였지만, 트레이드 직전 해인 1971년에는 타율 0.233 5홈런 33타점 OPS 0.643에 그쳤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메츠에 입단하기 전까지 3루수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죠. 따라서 메츠가 기대하던 3루수 보강 효과는 기대할 수 없었고, 결국 프레고시는 부진 끝에 1973시즌 중반 텍사스로 트레이드됩니다.

 

하지만 라이언에게 이 트레이드는 단순히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에서 MLB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 중 한 명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예비군 복무를 마친 라이언은 4일마다 등판할 수 있게 되면서 투구 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프로 초기 어려움을 겪던 원인 중 하나였던 손가락 물집 문제도 노하우가 생기면서 점차 극복해날 수 있었죠. 가장 중요한 점은 라이언에게 던지는 법을 알려줄 코치를 처음으로 만났다는 겁니다.

 

당시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의 투수 코치 톰 모건은 라이언의 거친 투구폼을 다듬고, 위력적인 커브를 장착시켰습니다. 무엇보다도 메츠 시절에는 받지 못했던 정서적 지지와 충분한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한편, 당시 야구 선수에겐 금기시되던 웨이트 트레이닝을 훈련에 접목시킨 것도 라이언이 최초였는데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라이언은 미완의 대기에서 탈삼진 머신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죠. 라이언은 에인절스에서 8년간 최전성기를 보냅니다.

 

라이언은 에인절스 이적 첫 해인 1972년 19승 16패 284이닝 329탈삼진 ERA 2.28로 커리어 첫 올스타와 탈삼진왕을 차지했습니다. 1973년에는 21승 16패 326이닝 383탈삼진 ERA 2.87로 2년 연속 올스타와 탈삼진왕을 차지하며 사이영상 투표에서도 짐 파머에 이어 2위에 올랐고, 1974년에도 22승 16패 332.2이닝 367탈삼진 ERA 2.89로 3년 연속 탈삼진왕을 차지함과 동시에 그해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사이영상 투표 3위에 오릅니다.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파이어볼러

놀란 라이언 / 출처 - MLB.com

 

라이언이 1973년에 잡은 탈삼진 383개는 샌디 코팩스(382개)의 기록을 하나 차이로 경신하는 메이저리그 단일 시즌 탈삼진 신기록이었습니다. 또한 라이언은 1973년 5월 15일 캔자스시티전에서 커리어 첫 노히터를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7월 15일 디트로이트전에서 두 번째, 1974년 9월 28일 미네소타전에서 세 번째, 1975년 6월 1일 볼티모어전에서 네 번째 노히터를 작성하며 코팩스(4회)와 함께 최다 노히터 공동 1위에 오릅니다.

 

1974년 9월 7일 애너하임 스타디움에서 열린 화이트삭스전에서 라이언은 경기 중 투구 속도가 측정된 최초의 메이저리그 투수가 됐는데요. 당시에는 원시적인 레이더건으로 홈플레이트 3m 앞에서 투수들의 구속을 측정했는데, 그날 라이언이 던진 마지막 공의 구속은 시속 100.8마일(약 162.2km)로 찍혔습니다(만약 현재의 방식대로 투수가 공을 놓는 지점(평균 54.5피트)부터 측정했다면 시속 약 106마일(170.6km) 정도란 계산이 나옵니다).

 

라이언 1975년 14승 12패 198이닝 186탈삼진 ERA 3.45로 주춤했지만, 이후 1976년부터 1979년까지 다시 4연속 탈삼진 부문 선두를 차지하며 에인절스에서 8시즌 중 7차례나 탈삼진 1위에 올랐습니다(물론 같은 기간 6번이나 볼넷왕에 올랐고, 나머지 두 시즌도 볼넷 2위였죠). 라이언이 에인절스에서 8년간 거둔 성적은 138승 121패 2,181.1이닝 1,302볼넷 2,416탈삼진 ERA 3.07(연평균 17승 15패 273이닝 163볼넷 302탈삼진)이었습니다.

 

그러나 1979시즌 종료 후 에인절스는 FA 자격을 얻은 라이언을 잡지 않기로 결정하는데요. 에인절스 단장 버지 바바시는 라이언을 "화려하기만 한 5할 미만 승률 투수"라고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했죠. 사실 이러한 결정에는 라이언의 나이가 어느덧 만 32세라는 점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메츠가 그랬던 것처럼 에인절스도 그를 떠나보낸 것을 후회하게 됐는데요. 라이언의 커리어는 아직 절반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투구에 눈을 뜨다

놀란 라이언 / 출처 - MLB.com

 

1979년 11월 19일, 라이언은 고향팀인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4년 450만 달러 계약을 맺으며 MLB 최초로 연봉 100만 달러를 받는 선수가 됐습니다. 이는 직전 해 연봉의 4배가 넘는 규모였죠. 따라서 사람들은 과연 그가 연봉 규모에 걸맞은 활약을 선보일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었는데요. 하지만 라이언은 휴스턴에서 9년간 106승 94패 1,854.2이닝 1,866탈삼진 ERA 3.13(평균 12승 10패 206이닝 207탈삼진 ERA 3.13)을 기록하며 우려를 불식시킵니다.

 

라이언은 1980년 7월 4일 통산 3,000번째 탈삼진을 기록했고, 1981년 9월 26일에는 통산 5번째 노히터를 달성하며 샌디 코팩스(4회)의 최다 노히터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한편, 라이언은 1981시즌 ERA 1.69로 커리어 첫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했는데요. 이는 2위 밥 네퍼보다 0.51이나 낮은 수치였죠. 1983년 4월 27일에는 월터 존슨(3,509개)를 넘어 역대 탈삼진 1위에 올랐고, 1985년 7월 11일에는 통산 4,000번째 탈삼진을 잡아냈습니다.

 

1987년, 40세의 나이에 접어든 라이언은 34경기에서 211.2이닝 270탈삼진 ERA 2.76으로 평균자책점과 탈삼진 부문 리그 1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사이영상을 받지 못하는 진기록을 남깁니다. 당시 팀의 형편없는 득점 지원으로 8승 16패에 그쳤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듬해인 1988년 라이언은 12승 11패 220이닝 228탈삼진 ERA 3.52로 역대 최고령 탈삼진왕에 오르는데요. 놀랍게도 그는 1989, 1990년에 자신의 기록을 연거푸 경신합니다.

 

휴스턴에서의 라이언은 투수로서 완성도 측면에서는 에인절스 시절보다 오히려 나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는 40세가 넘은 나이에도 변함없이 빠른 구속을 유지했고, 에인절스 시절 톰 모건에게 배운 파워커브에 더해 휴스턴에서는 조 넉스홀에게 배운 서클 체인지업을 투구 레퍼토리에 추가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달라진 점은 제구력이었는데요. 라이언의 9이닝당 볼넷은 에인절스 시절 5.4개에서 휴스턴 시절 3.9개로 줄어들었습니다.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놀란 라이언 / 출처 - MLB.com

 

1988시즌 종료 후 휴스턴 구단주 존 맥멀린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2년 연속 탈삼진왕에 오른 라이언의 연봉을 일방적으로 삭감했고, 이에 반발한 라이언은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했습니다. 그리고 1989년 16승 10패 239.1이닝 301탈삼진 ERA 3.20, 1990년 13승 9패 204이닝 232탈삼진 ERA 3.44의 성적으로 연속 탈삼진왕 기록을 '4년'까지 늘렸는데요. 1989년 8월 22일 라이언은 통산 5,000개의 탈삼진을 기록한 유일한 투수가 됐습니다.

 

라이언은 1990년 6월 11일 커리어 6번째 노히터를 기록했고, 7월 31일에는 통산 300승을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1991년 5월 1일 만 44세의 나이로 커리어 7번째 노히터를 달성했죠. 같은 해 라이언은 12승 6패 173이닝 203탈삼진 ERA 2.91을 기록했습니다. 라이언이 이토록 오랫동안 기량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타고난 내구성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철저한 자기 관리와 함께 누구보다 많은 훈련량을 소화했기 때문입니다.

 

텍사스 이적 후 라이언은 오프시즌 동안 매일 5시간 동안 훈련을 소화했는데요. 시즌 중에는 투구를 마친 후 최소 한 시간 동안 고정 자전거를 탔고, 선발 등판하지 않는 날에도 매일 두 시간 이상 웨이트 트레이닝과 달리기, 자전거 타기를 반복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에 대해 텍사스 투수 코치 톰 하우스는 "라이언은 여전히 스스로를 준비시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걸 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체부처럼 매일 말이죠"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라이언조차 노화를 무한정 피해 갈 순 없었죠. 라이언은 1990년부터 허리와 아킬레스건의 지속적인 통증과 싸워야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1992년부턴 무릎, 갈비뼈, 팔꿈치까지 통증의 범위가 넓어졌는데요. 그 결과 라이언은 1992년 5승 9패 157.1이닝 157탈삼진 ERA 3.72에 그쳤고, 1993년 5승 5패 66.1이닝 ERA 4.88을 기록한 것을 끝으로 메이저리그 최장 기간인 27년 동안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은퇴 후의 삶

 

라이언은 1992년 6월 16일 에인절스에서 등번호 30번을, 1996년 9월 15일 텍사스에서 등번호 34번을, 동년 9월 29일 휴스턴에서 등번호 34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면서 프랭크 로빈슨과 함께 메이저리그 세 팀에서 등번호를 영구 결번으로 지정한 유이한 선수가 됐습니다. 한편, 1999년 첫 번째 투표에서 98.79%(497명 중 491명)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는데요. 이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6번째로 높은 득표율입니다.

 

은퇴 후 라이언은 2000년 휴스턴 산하 더블 A 팀 잭슨 제네럴스를 인수하며 프로야구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이후 텍사스주 오스틴 북쪽의 라운드록으로 연고지를 옮기고, 구단명을 라운드록 익스프레스로 바꾼 뒤 4시즌 연속 관중 1위에 오르는 등 성공적으로 구단을 운영했죠. 이를 바탕으로 라이언은 2008년 2월 텍사스의 사장으로 임명됐고, 2010년 팀 힉스로부터 3억 8,500만 달러에 구단을 인수하면서 구단주가 됐습니다.

 

​라이언이 구단주로 있던 2010-11년 텍사스는 2연속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는데요. 하지만 더 많은 구단 지분을 가진 레이 데이비스와 밥 심슨이 공동 회장을 맡으면서 라이언은 2012년 CEO로 물러났고, 구단 운영 철학을 놓고 존 다니엘스 단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2013년 CEO에서도 사임했습니다. 이후 라이언은 휴스턴의 구단주 특별 보좌(2014~2019년)를 역임한 후 은퇴, 텍사스주 조지타운에서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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