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삭스의 영원한 캡틴', 칼 야스트렘스키

칼 야스트렘스키 Ⓒ MLB.com
칼 야스트렘스키는 1960-70년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 중 한 명으로,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엄스의 뒤를 잇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초대 공식 주장입니다. 야스트렘스키는 1961년부터 1983년까지 23시즌 동안 레드삭스에서만 뛰면서 통산 3,308경기 3,419안타 452홈런 1,844타점 168도루 타율 0.285 출루율 0.379 OPS 0.841 WAR 96.5승을 기록했고 올스타 18회, MVP 1회, 골드글러브 7회, 타격왕 3회에 선정됐습니다.
야스트렘스키의 최대 장점은 '꾸준함'이었습니다. MLB 역사상 한 구단에서 23시즌을 뛴 선수는 브룩스 로빈슨(볼티모어)와 야스트렘스키 뿐입니다. 그는 경기(3,308) 2위, 안타(3,419) 9위, 2루타(646) 9위, 총 루타(5,539) 10위, 타점(1,844) 15위, 볼넷(1,845) 6위 등 대부분의 누적 타격 지표에서 보스턴 구단 역대 순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요. 또한, 통산 3,519안타 452홈런을 기록한 그는 역대 8명뿐인 '3,000안타-400홈런 클럽'의 회원 중 한 명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야스트렘스키는 MLB 역사상 가장 임팩트 있는 시즌을 보낸 타자이기도 하죠. 그는 1967년 타율 0.326 44홈런 121타점으로 트리플크라운과 함께 안타(189)·득점(112)·출루율(.418)·장타율(.622) 부문에서도 1위에 오르면서 타격 7관왕에 올랐습니다. 타격 7관왕은 이후 57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테드 윌리엄스는 "1967년 그는 베이브 루스이자, 호너스 와그너였으며, 타이 콥이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열정과 재능

칼 야스트렘스키 Ⓒ MLB.com
칼 마이클 야스트렘스키 시니어(Carl Michael Yastrzemski Sr.)는 1939년 8월 22일 미국 뉴욕주 사우스햄튼에서 폴란드계 이주민인 카롤 야스트렘스키와 해티 스코니트니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카롤은 젊은 시절 프로야구 선수를 꿈꿨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꿈을 포기하고 가업인 감자 농장을 이어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들(야스트렘스키)이 태어나기 전부터 세미프로 팀인 브리지 햄튼 화이트 이글스를 창단해 선수 겸 감독을 맡았습니다.
야스트렘스키는 그의 자서전에서 "생후 18개월 무렵 아버지가 선물한 작은 야구 배트를 다른 아기들이 담요나 좋아하는 장난감을 들고 다니는 것처럼 어디든 끌고 다녔다"라고 회고했는데요.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캐치볼을 했고, 여섯 살쯤에는 매일 저녁 식사 후 뒷마당에서 아버지가 던져주는 테니스 공을 치면서 놀았습니다. 야스트렘스키가 야구에서 맡은 첫 번째 보직은 아버지가 선수 겸 감독으로 있는 화이트 이글스의 '배트보이'였습니다.
그리고 준 프로 선수로서는 어린 나이인 14세에 처음으로 화이트 이글스에서 뛰었죠. 야스트렘스키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40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팀의 주전 유격수이자, 최고의 타자"였습니다. 훗날 야스트렘스키는 "아버지는 한 번도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하지만 저는 어려운 시기, 놓쳐버린 기회, 힘든 농장 생활 등 아버지가 겪으셨던 일이 저에게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결심하셨다는 걸 항상 느끼고 있었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야구에 대한 열정과 재능을 물려받은 야스트렘스키는 고교 시절부터 많은 MLB 팀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졸업반 무렵에는 자신의 응원팀인 뉴욕 양키스로부터 계약금 4만 달러 제안을 받습니다. 하지만 야스트렘스키의 아버지가 10만 달러를 역제안하면서 협상이 결렬됐는데요. 그러자 야스트렘스키는 운동 특기생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고 노트르담 대학에 진학합니다. 그러나 야스트렘스키는 결국 대학 팀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습니다.
레드삭스를 선택하다

칼 야스트렘스키 Ⓒ MLB.com
야스트렘스키에게 영입 제안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첫 주자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였습니다. 필라델피아는 처음엔 6만 달러를 제안했고, 이를 거절하자 8만 달러로 계약금을 올렸음에도 야스트렘스키 부자의 대답은 "No"였습니다. 다음은 신시내티 레즈였는데, 그들은 2만 달러씩 5회에 걸쳐 10만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이조차도 야스트렘스키 부자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보스턴 레드삭스의 차례가 찾아왔는데요.
레드삭스는 야스트렘스키의 가족을 펜웨이 파크로 초청했고, 계약금 10만 달러와 별도의 학비를 제안했습니다. 그 결과 1958년 11월, 야스트렘스키는 최초 제안에서 1만 5,000달러 오른 계약금 11만 5,000달러에 나머지 학비 전액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레드삭스와 계약했습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아마추어 야구 선수에게 지급된 역사상 가장 큰 계약금이었죠. 하지만 레드삭스의 도박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야스트렘스키는 프로 첫해인 1959년 캐롤라이나 리그(클래스 B)의 랄리 캐피털스로 배정되어 타율 0.377 15홈런 100타점 16도루 OPS 1.051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0년 2월, 레드삭스의 스프링 캠프에 초청된 야스트렘스키는 팀의 대선배인 테드 윌리엄스의 바로 옆 라커룸을 배정받습니다. 윌리엄스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야스트렘스키는 41세의 윌리엄스가 야구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준비하는지를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1959년 스프링캠프가 끝난 후 레드삭스는 야스트렘스키를 1년 더 마이너리그에서 육성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주된 목적은 내야수인 야스트렘스키를 좌익수로 훈련시켜 1960시즌 후 은퇴할 윌리엄스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었는데요. 야스트렘스키는 1960년 아메리칸 어소세이션(트리플A)의 미니애폴리스 밀러스에서 타율 0.339 7홈런 69타점 16도루 OPS 0.858을 기록했고, 외야수로서도 무려 18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활약을 펼칩니다.
테드 윌리엄스의 후계자

칼 야스트렘스키(왼쪽)와 테드 윌리엄스(오른쪽) Ⓒ MLB.com
야스트렘스키는 1961년 4월 11일 펜웨이 파크에서 열린 정규 시즌 개막전에서 좌익수 겸 5번 타자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레전드 타자인 테드 윌리엄스의 후계자로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고, 21세 신인 선수에게 이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죠. 야스트렘스키는 메이저리그 첫 타석에서 안타를 쳤지만, 5타수 1안타로 데뷔전을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5월 8일까지 첫 16경기에서 타율 0.226 0홈런 9타점 OPS 0.555에 그쳤습니다.
그러자 레드삭스 구단은 테드 윌리엄스에게 상담을 요청했는데요. 구단의 요청에 응한 윌리엄스는 야스트렘스키가 타격 연습을 하는 것을 지켜본 후 "스윙이 훌륭하니, 함부로 바꾸지 말라"라고 조언했습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야스트렘스키는 다음날 첫 홈런을 친 것을 시작으로 이틀 연속 홈런포를 가동했고, 데뷔 시즌을 타율 0.266 11홈런 80타점 6도루 OPS 0.721으로 마칩니다. 또한, 좌익수로서 12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강력한 어깨를 뽐냈습니다.
2년 차에도 소포모어 징크스는 없었습니다. 야스트렘스키는 1962년 타율 0.296 19홈런(2루타 43개) 94타점 OPS 0.832를 기록하고 15개의 외야수 어시스트로 리그 1위에 오르는 성장세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3년 차인 1963년 타율 0.321 14홈런 68타점 OPS 0.894로 첫 올스타 선정과 함께 타율(.321)·안타(183)·2루타(40)·볼넷(95)·출루율(.418) 부문 1위를 차지했고, 외야 어시스트 1위(17개)로 첫 골드글러브까지 거머쥐며 일약 스타덤에 오릅니다.
초창기 야스트렘스키는 테드 윌리엄스와는 다른 유형의 타자였는데요. 그는 뛰어난 타격 정확도와 선구안을 바탕으로 높은 타율과 출루율을 기록했지만, 윌리엄스처럼 많은 홈런을 때려내진 못했습니다. 그 대신 야스트렘스키는 윌리엄스가 갖지 못한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지닌 뛰어난 수비수였죠. 실제로 그의 통산 168도루는 은퇴 시점을 기준으로 레드삭스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고, 9번의 외야 어시스트 1위와 7번의 골드글러브를 수상했습니다.
완전체로 진화하다

칼 야스트렘스키 Ⓒ MLB.com
하지만 1967시즌을 기점으로 야스트렘스키는 타격에서도 '완전체'로 진화합니다. 야스트렘스키는 1967년 타율 0.326 44홈런 121타점 OPS 1.040으로 타율·홈런·타점 부문 1위에 오르면서 타격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는데요. 이는 2012년 미겔 카브레라가 달성하기 전까지 마지막 타격 트리플크라운 기록이었습니다. 또한, 이 해 야스트렘스는 안타(189)·득점(112)·출루율(.418)·장타율(.622) 부문에서도 1위를 차지하면서 타격 7관왕에 올랐습니다.
놀라운 점은 이러한 성적을 역사상 최악의 투고타저 시대에 기록했다는 건데요. 실제로 1967시즌은 리그 평균자책점이 3.30으로 라이브볼 시대(1920년~) 이후 세 번째로 득점이 나오지 않는 해였습니다. 이를 반영한 야스트렘스키의 1967년 베이스볼레퍼런스 기준 WAR은 12.4승로 단일 시즌 기준 MLB 역대 4위에 해당합니다. 이 해 야스트렘스키보다 높은 단일 시즌 WAR을 기록한 유일한 타자는 베이브 루스(1921, 1923, 1927년)뿐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1967년 아메리칸리그 MVP는 그의 몫이었죠. 야스트렘스키의 활약에 힘입어 전년도 10팀 중 9위였던 소속팀 레드삭스 역시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고 정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리그 1위를 확정지었습니다. 야스트렘스키는 마지막 2주 동안 타율 0.513(44타수 23안타) 5홈런 16타점을 기록했고, 특히 미네소타와 마지막 2경기에서 타율 0.875(8타수 7안타) 1홈런 6타점을 몰아치면서 소속팀을 21년 만에 월드시리즈 무대로 올려놓았습니다.
월드시리즈에서도 야스트렘스키는 타율 0.400(25타수 10안타) 3홈런 5타점 OPS 1.340으로 맹활약을 펼쳤는데요. 하지만 레드삭스는 세인트루이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3승 4패로 패했습니다. 야스트렘스키는 1967시즌 종료 후 <이슈 오브 스포츠> 매거진과 인터뷰에서 레드삭스의 놀라운 시즌은 신임 감독 딕 윌리엄스의 리더십과 토니 코니글리아로, 리코 페트로첼리 등 재능 있는 젊은 선수들이 합류한 덕분이라고 공을 돌렸습니다.
투고타저 시대의 지배자

그렇다면 야스트렘스키는 어떻게 타격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야스트렘스키는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바로 겨울에도 운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이전엔 시즌이 끝나면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1966년 메리맥 대학(레드삭스 입단 후 노트르담 대학에서 편입)에서 학위를 마쳤기 때문에 시즌을 앞두고 컨디셔닝에 집중할 수 있었고, 1967년 스프링 캠프에 매우 좋은 컨디션으로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실제로 야스트렘스키는 1966시즌 종료 후 헝가리 복싱 국가대표팀의 코치를 맡았던 진 버드와 함께 체계적인 프로그램 속에서 훈련에 임했고, 특히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상대적으로 약점이었던 장타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1967년, 역사에 남을 한 해를 보낸 야스트렘스키는 이듬해에도 타율 0.301 23홈런 74타점 13도루 OPS 0.922로 2년 연속 타격왕과 함께 볼넷(119)·출루율(.426) 부문에서도 리그 1위에 오릅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1968년도 직전 시즌 못지 않게 '투수의 해'라고 불릴 만큼 극단적인 투고타저가 펼쳐진 한 해였다는 건데요. NL에선 밥 깁슨이 라이브볼 시대 최저 평균자책점인 1.12를 기록했고, AL에는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투수가 5명에 달했습니다. 이해 AL에서 타율 0.285 이상인 타자는 단 4명뿐이었고, 3할 타율을 달성한 타자는 야스트렘스키가 유일했죠. 참고로 야스트렘스키가 기록한 0.301은 MLB 역사상 타격왕 중 가장 낮은 타율입니다.
야스트렘스키는 1969년 타율 0.255 40홈런 111타점 15도루 OPS 0.870을, 1970년 타율 0.329 40홈런 102타점 23도루 OPS 1.044를 기록하며 2년 연속 40홈런을 달성합니다. 특히 1970년 올스타전에서 4안타를 몰아치며 그가 속한 아메리칸리그 팀이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올스타 MVP에 선정됐는데요. 또한 득점(125)·총 루타(335)·출루율(.452)·장타율(.592)에서 리그 1위에 올랐지만, 알렉스 존슨(0.329)과 .0003 차이로 타격왕을 거머쥐진 못했습니다.
재미없고 따분한 농부

하지만 야스트렘스키는 1971년 손 부상을 입으면서 타격 생산성이 크게 하락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972년에는 영구적인 어깨 부상을 당하면서 장타력이 감소했고, 이로 인해 타격폼까지 바꿔야 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971년부터 1980년(31~40세)까지 10년간 한 시즌 평균 타율 0.277 18홈런 79타점 OPS 0.811 WAR 3.2로 꾸준한 활약을 펼치며 다양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특히 1975년에는 레드삭스를 또 다시 월드시리즈로 이끌었죠.
야스트렘스키는 정규시즌 타율 0.269 14홈런 60타점 OPS 0.776으로 부진했지만, ALCS에서 오클랜드를 상대로 타율 0.455 1홈런 2타점 OPS 1.318을 기록하며 팀의 3연승을 이끌었고, 월드시리즈에서도 타율 0.310 0홈런 4타점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레드삭스는 신시내티에게 3승 4패로 패했습니다. 야스트렘스키는 포스트시즌에서 통산 17경기 타율 0.369 4홈런 11타점 OPS 1.047로 강한 면모를 보였지만 끝내 우승 반지는 얻지 못했습니다.
야스트렘스키는 1979년 7월 24일 400홈런, 9월 12일 3,000안타 고지를 밟으며 3,000안타와 400홈런을 동시에 달성한 8번째 타자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후 지명타자로 보직을 옮긴 그는 1981년 타율 0.246 7홈런 53타점 OPS 0.693으로 커리어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지만, 1982년 타율 0.275 16홈런 72타점 OPS 0.789로 반등에 성공했고, 만 43세였던 1983년 타율 0.266 10홈런 56타점 OPS 0.767로 올스타에 선정된 것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습니다.
야스트렘스키는 윌리엄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보스턴의 아이콘이 됐습니다. 윌리엄스는 4할 타율을 기록하고, 기자들과 논쟁을 벌이며, 팬들과도 거리를 뒀던 '고독한 천재'였습니다. 반면, 팀 동료인 빌 리에 따르면 야스트렘스키는 '재미없고 따분한 농부'와도 같았는데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점이 야스트렘스키가 사랑받는 이유였죠. 그는 항상 야구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고, 가장 늦게 나갔다. 그리고 우직한 성실함으로 이를 23년 동안 반복했습니다.

"뉴잉글랜드, 사랑합니다."

1983년 10월 1일, 레드삭스의 홈구장 펜웨이 파크에는 야스트렘스키의 마지막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 33,491명의 관중이 모였는데요. 23년 동안 압박감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았던 야스트렘스키는 경기 전에 열린 은퇴식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잠시 후 평정심을 되찾은 그는 전 구단주 톰 야키를 위해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갖자고 요청했습니다. 이어 가족과 구단 관계자 모두에게 감사를 표한 후 "뉴잉글랜드, 사랑합니다"라는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습니다.
야스트렘스키가 은퇴한 이듬해 그의 아들 칼 야스트렘스키 주니어는 1984년 신인 드래프트 3라운드에서 애틀랜타에 지명된 후 5년간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했지만,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 못했고 2004년 43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아들이자, 야스트렘스키의 손자인 마이크 야스트렘스키는 2013년 드래프트 14라운드에서 볼티모어의 지명을 받은 후 2019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했고, 지금도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캔자스시티에서 뛰고 있습니다.
야스트렘스키는 1989년 첫 번째 투표에서 94.6%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1989년 8월 6일, 레드삭스는 그의 등번호 8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고, 그 번호는 지금도 펜웨이 파크의 외야를 내려다보는 곳에 걸려있습니다. 2019년 <디 애슬레틱>은 가장 위대한 야구 선수 100인 중 야스트렘스키를 38위로 선정됐습니다. 야스트렘스키는 현재 레드삭스의 순회 인스트럭터를 맡고 있으며 2025년 4월 4일에도 펜웨이 파크에서 기념 행사 후 시구를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