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리스와 랄리, 양키스 레전드와 대결하다
1959년 12월11일. 충격적인 트레이드가 발표됐다.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가 뉴욕 양키스에서 네 명을 받아오면서, 떠오르는 스타 외야수인 로저 매리스가 포함된 세 명을 준 것이었다. 이는 1919년 12월26일, 보스턴 레드삭스가 베이브 루스를 양키스로 보낸 트레이드를 생각나게 했다.
트레이드가 일어난 배경도 비슷했다.
레드삭스가 루스를 양키스로 보낸 건, 해리 프래지 구단주가 연극과 뮤지컬 제작을 위해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양키스는 루스를 받은 대가로 프래지에게 10만 달러의 현금을 지급했고, 펜웨이파크를 담보로 30만 달러를 빌려줬다.
프래지는 계속해서 양키스에 선수를 팔았고, 그 돈으로 브로드웨이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레드삭스 구단은 만신창이가 됐고, 밤비노의 저주는 1919년부터 2004년까지 86년 동안 이어졌다. 매리스 트레이드는, 정확히 루스 트레이드 40년 후에 일어났다.
양키스가 얻은 매리스는 1959년에 첫 올스타가 된 24살의 어린 선수였다. 반면 양키스가 준 행크 바우어는 1950년대 양키스의 주축 선수였지만, 전성기가 지난 37세의 노장이었다. 1956년 월드시리즈의 퍼펙트게임이 '원 히트 원더'인 30세의 돈 라슨도 마찬가지였다.
애슬레틱스의 구단주인 아놀드 존슨이 이런 일방적인 트레이드를 한 이유는 개인적인 이익 때문이었다. 부동산 재벌인 존슨은 1953년 12월에 양키스타디움과 양키스의 트리플A 팀인 캔자스시티 블루스, 블루스의 홈 구장인 블루스타디움을 구입했다. 이후 애슬레틱스 구단주가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양키스타디움을 팔아야 했지만, 양키스가 잘 되면 돈을 많이 버는 사업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존슨은 매리스 트레이드 외에도 애슬레틱스의 좋은 선수들을 양키스에 퍼주다시피 했고, 애슬레틱스는 "양키스의 선수 농장"이라는 비난과 조롱을 받았다.
매리스에게는 반드시 성공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매리스에게는 한 살 많은 형이 있었다. 야구를 싫어하는 매리스를 억지로 끌고 가 야구를 시킨 사람이 형이었다. 형과 매리스는 함께 메이저리그 선수가 되자고 약속했지만, 형은 18살 때인 1951년에 소아마비에 걸려 그토록 좋아했던 야구를 포기했다. 매리스는 형을 대신해 성공해야 했다.
1960년 양키스에 오자마자 타점왕과 리그 MVP가 된 매리스는 1961년 미키 맨틀과 함께 역사적인 홈런 레이스를 시작했다.
양키스의 3번 타자인 매리스와 4번 타자인 맨틀은 베이브 루스의 60홈런 기록을 두고 경쟁했다. 분기점은 8월15일로, 45개로 동률이었던 둘은 매리스가 46호를 날려 맨틀을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양키스 팬들은 루스의 60홈런 기록이 깨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깨질 수밖에 없다면 맨틀이 깨주기를 원했다. 매리스가 애슬레틱스에서 온 외부자인 반면, 맨틀은 양키스 순혈 선수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매리스가 다음날 두 개를 시작으로 이후 44경기에서 15개를 기록한 반면, 맨틀은 37경기에 출전해 9개에 그쳤다. 엉덩이 부상 때문이었다. 홈런 대결은 61대54로 종료됐다.
루스의 자서전을 대필한 경력이 있는 포드 프릭 커미셔너는 심지어 루스는 154경기 시즌에서 60개를 쳤기 때문에 162경기 시즌에서 기록한 매리스의 기록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매리스는 198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메이저리그가 매리스의 기록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건 1991년이었다.
1998년 마크 맥과이어는 70개를 날려 매리스의 기록을 경신했다. 2001년에는 배리 본즈가 73개로 새로운 기록을 작성했다. 하지만 맥과이어와 본즈는 약물 추문에 휩싸여 명예의 전당에도 오르지 못하는 불명예 퇴장을 했다.
2022년 애런 저지가 62개를 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저지의 62개를 진짜 신기록으로 여겼다. 매리스가 61개를 친 1961년 이후 61년 만의 기록 경신이었다. 저지가 매리스의 기록에 가까워지자 매리스의 가족들이 경기장을 찾아와 저지를 응원했다.
하지만 저지의 62홈런 기록은 새로운 도전자를 맞이했다. 9월25일, 칼 랄리는 60호를 날림으로써 저지의 기록에 2개 차로 다가섰다.
랄리의 60홈런이 충격적인 부분은 그가 포수이기 때문이다. 앞서 60홈런을 달성한 6명은 5명의 외야수와 한 명의 1루수(맥과이어)였다.
포수는 체력 소모가 엄청나게 크고 정신적인 피로감도 극에 달하는 포지션이기 때문에 틈틈이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 하지만 랄리는 시애틀이 치른 158경기 중 119경기에 포수로 나섰고, 35경기는 지명타자로 출전했으며, 대타로 두 경기에 등장해 단 두 경기를 결장했다.
랄리의 60홈런이 더 대단한 건, 미국 북서부에 혼자 위치한 시애틀이 이동거리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구단이며, 시애틀의 홈구장인 T-모바일파크는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을 치기 가장 어려운 구장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여러 악조건을 딛고, 랄리는 양키스 선수인 맨틀의 스위치히터 최다 홈런(1961년 64개)을 경신했고, 양키스 선수인 루스의 기록과 타이를 이뤘으며, 양키스 선수인 매리스의 61개와 양키스 선수인 저지의 62개를 노리고 있다.
랄리 이전 포수 최다 홈런 기록은 2021년에 48개를 기록한 살바도르 페레스(캔자스시티 로열스)가 가지고 있었다. 페레스는 저지와 랄리의 MVP 논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랄리가 아메리칸리그의 MVP라고 생각합니다. 애런 저지를 존중하지만, 포수로서 경기 계획을 짜고, 투수를 돕고, 수비와 송구를 잘하면서 홈런을 50개 이상 친다고요?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랄리의 분전에 힘입어, 시애틀은 2001년 이후 24년 만에 디비전 우승을 차지했다. 2001년은 스즈키 이치로가 데뷔한 해다. 이치로는 올해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랄리에게는 또 다른 목표, 아니 더 중요한 목표가 있다. 시애틀은 1977년에 창단했지만 월드시리즈에 오른 적이 없다.
창단 동기인 토론토가 월드시리즈 우승 두 번을 하고, 1993년에 창단한 콜로라도(1회 진출)와 마이애미(2회 진출, 2회 우승) 1998년에 창단한 애리조나(2회 진출, 1회 우승)와 탬파베이(2회 진출)마저 모두 월드시리즈를 경험한 반면, 시애틀은 월드시리즈에 올라보지 못한 유일한 팀이다.
1961년 매리스는 2년 연속 아메리칸리그 MVP가 됐고, 양키스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랄리의 시즌 마지막 경기가 어떤 식으로 끝날지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