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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허슬(Charlie Hustle)', 피트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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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 로즈 Ⓒ MLB.com

 

피트 로즈는 MLB 역사상 가장 논쟁의 여지가 다분한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기록적인 면에서 그는 꾸준함의 상징과도 같은 타자였습니다. 로즈는 통산 안타(4,256), 경기(3,562), 타석(15,890), 타수(14,053)에서 역대 1위에 올라 있는데요. 이는 그가 탁월한 실력뿐만 아니라 1963년(22세)에 데뷔해 1986년(45세) 은퇴할 때까지 24시즌 동안 활약할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한 선수였기에 가능한 기록입니다. 또한, 현역 시절 로즈는 허슬 플레이의 대명사이기도 했죠.

 

'찰리 허슬(Charlie Hustle)'이란 별명을 지닌 그는 볼넷을 얻어낸 후에도 1루로 전력 질주를 하는 근성 넘치는 플레이 스타일로 5개 포지션(2루수, 좌익수, 우익수, 3루수, 1루수)에서 뛰면서 올스타에 17번이나 선정될 만큼 야구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감독 재임 시절 스포츠 도박에 연루되어 한때 MLB 사무국으로부터 영구 제명을 당하는 등 여러 스캔들로 인해 경기장 밖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최선을 다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

피트 로즈 Ⓒ MLB.com

 

'피터 에드워드 로즈(Peter Edward Rose)'는 1941년 4월 14일, 미국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해리 프란시스 '피트' 로즈와 라번 로즈의 네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해리는 은행원으로 일했지만, 40대가 넘어서까지 준 프로 선수로서 야구, 권투, 미식축구에서 활약한 스포츠 광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해리는 아들을 어린 시절부터 운동선수로 키우기로 결심했고, 아들에게 항상 경기에 나설 때는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해리는 아들을 리틀야구에 입문시키며 감독에게 그를 스위치히터로 키워줄 것을 당부했는데요. 당시 피트 로즈의 나이는 8살이었죠. 로즈는 메이저리그 선수를 12명이나 배출한 신시내티 지역의 야구 명문인 웨스턴 힐스 고교를 다녔고, 야구와 미식축구에서 재능을 드러냈습니다. 나이에 비해 체구가 작았지만, 그는 미식축구팀에서 신입생부터 주전 러닝백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2학년 때 주전 자리를 뺏기자 로즈는 1년을 유급하며 몸을 불리는 과정을 거칩니다.

 

1년간의 유급으로 인해 로즈는 졸업반이 되었을 때, 고교 스포츠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로즈는 준-프로팀에서 포수, 2루수, 유격수로 뛰었고 타율 0.626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남기며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받았는데요. 그중에는 고향팀 신시내티 레즈의 스카우트였던 외삼촌 버디 블루바움도 있었죠. 블루바움은 1960년 조카가 고교를 졸업하던 날, 가족을 찾아가 "신시내티가 로즈와 7000달러에 계약할 의향이 있다"라며 영입 의사를 타진했습니다.

 

로즈는 신시내티와 계약을 맺은 후 뉴욕-펜 리그(클래스 D)의 제네바 레드레그스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첫해 타율 0.277 1홈런 43타점 OPS 0.727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1961년 플로리다 리그(클래스 D)의 탬파 타폰스에서 타율 0.331 2홈런 77타점 30도루 OPS 0.911으로 잠재력을 만개했고, 1962년 사우스 애틀랜틱 리그(싱글 A)의 마콘 피치스에서도 타율 0.330 9홈런 71타점 15도루 OPS 0.931을 기록하며 본격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찰리 허슬의 탄생

피트 로즈 Ⓒ MLB.com

 

1963년 신시내티의 스프링 캠프에 초대된 로즈는 주전 2루수 돈 블라싱게임의 사타구니 부상으로 생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타격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며 프레드 허치슨 감독의 눈에 들었습니다. 양키스와 시범경기에서 상대팀 에이스 화이티 포드는 볼넷을 얻고 1루로 전력 질주한 로즈에게 '찰리 허슬(Charlie Hustle)'이란 조롱 섞인 별명을 붙였죠. 하지만 이 별명을 명예의 상징으로 삼은 로즈는 극적으로 신시내티의 개막 로스터에 승선할 수 있었습니다.

 

로즈는 22번째 생일을 앞두고 1963년 신시내티의 홈 개막전에서 피츠버그를 상대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렀는데요. 그는 12타수 연속 무안타로 출발했지만, 피츠버그의 밥 프렌드를 상대로 3루타를 때려내며 첫 안타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157경기 170안타 6홈런 101득점 41타점 13도루 타율 0.273 OPS 0.705를 기록하며 내셔널리그(NL) 신인왕으로 선정됐습니다. 데뷔 시즌을 마친 그는 미국 육군에 입대해 포트녹스에서 6개월간 현역으로 복무합니다.

 

군 복무의 영향으로 로즈는 빅리그 2년 차인 1964년 136경기에서 타율 0.269 4홈런 34타점 OPS 0.645에 그치는 극심한 부진을 겪습니다. 하지만 절치부심한 로즈는 1964시즌 종료 후 베네수엘라 윈터리그에 참여해 실전 감각을 끌어올렸고, 1965년 162경기 209안타 11홈런 117득점 8도루 타율 0.312 OPS 0.828로 최다 안타 1위에 오르면서 커리어 첫 올스타에 선정됐습니다. 한편, 타율 0.312는 9시즌 연속 3할 타율 기록 중 첫 번째 시즌이기도 했죠.

 

이후 로즈는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입지를 굳건히 다졌습니다. 로즈는 1966년 156경기 205안타 16홈런 97득점 타율 0.313 OPS 0.811을, 1967년에는 148경기 176안타 12홈런 86득점 타율 0.301 OPS 0.808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1968년 149경기 210안타 10홈런 94득점 3도루 타율 0.335 OPS 0.861으로 안타와 타율 부문 1위, 1969년 156경기 218안타 16홈런 120득점 타율 0.348 OPS 0.940으로 득점과 타율 부문 1위에 오르며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빅 레드 머신의 엔진

피트 로즈 Ⓒ MLB.com

 

로즈는 '어떤 상황에서도 늘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 스타일로 명성을 얻었는데요. 팀 동료였던 조 모건은 "로즈는 항상 끊임없이 경기에 몰입했습니다. 매 경기가 월드시리즈 7차전 같았죠. 그는 마치 시즌의 마지막 경기인 것처럼 162경기를 전력 질주하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습니다"라고 회고했죠. 이에 대해 로즈는 "저는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습니다. 허슬(hustle) 플레이로 메이저리그에 올랐고, 이곳에 머물기 위해선 더 허슬을 해야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모로 로즈는 모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경기장에서는 누구보다 호전적인 선수였지만, 경기장 밖에선 팬과 언론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기록과 돈 그리고 명예를 위해서 뛰는 이기적인 선수였지만, 팀이나 동료들을 위해서 여러 차례 포지션을 바꾸는 헌신적인 면모도 있었죠. 한편, 그는 언제나 파티를 즐겼지만, 스스로는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순성으로 인해 로즈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립니다.

 

신시내티 레즈는 1970년대 최전성기를 보냈습니다. 1970년 명장 스파키 앤더슨이 감독으로 부임하고, 1971년 레전드 2루수 조 모건을 영입한 신시내티는 젊은 포수 자니 벤치와 1루수 토니 페레즈의 성장으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손에 꼽힐 강력한 타선을 구축했는데, 이를 가리켜 '빅 레드 머신(Big Red Machine)'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1970년부터 1976년까지 내셔널리그 우승 4회와 월드시리즈 우승 2회를 차지했고, 그 중심에는 피트 로즈가 있었죠.

 

로즈는 '빅 레드 머신'의 리드오프이자, 팀에 승리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는 촉매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1970년부터 1972년까지 3년 연속 3할 타율을 달성했고, 두 차례나 최다 안타 1위에 오릅니다. 그러나 로즈의 커리어 하이 시즌을 한 해만 꼽자면 아마도 1973년일 겁니다. 1973년 로즈는 160경기 115득점 230안타 5홈런 64타점 10도루 타율 0.338 OPS 0.838로 개인 통산 세 번째 타격왕과 함께 최다 안타 1위에 오르면서 MVP에 선정됐기 때문입니다.


월드시리즈 2연패를 이끌다

빅 레드 머신  Ⓒ MLB.com


이듬해인 1974년 33세의 로즈는 타율 0.284에 그치면서 1965년 이후 처음으로 3할 타율에 달성에 실패했고, 소속팀 신시내티 역시 다저스에게 NL 서부지구 1위 자리를 내주며 포스트시즌 진출이 무산됐습니다. 로즈의 전성기가 끝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죠. 그러나 로즈는 1975년 162경기 112득점 210안타 7홈런 74타점 OPS 0.838로 멋지게 반등에 성공했고, 신시내티도 108승(58패)으로 NL 서부지구 1위를 탈환했습니다.

 

신시내티의 반등에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로즈가 외야에서 3루로 이동한 것이었는데요. 로즈가 팀을 위해 3루로 포지션을 옮김으로써 신시내티는 약점이었던 3루 자리를 보강함과 동시에 젊은 거포인 조지 포스터를 풀타임 좌익수로 기용할 수 있었죠. 포스터는 로즈의 희생으로 주전을 차지한 1975년 타율 0.300 23홈런 78타점 OPS 0.875로 기회를 살렸고, 1976년부터 3년 연속 타점왕에 오르는 등 빅 레드 머신의 또 다른 주축으로 성장했습니다.

 

1975년 로즈는 챔피언십시리즈에서 피츠버그를 상대로 타율 0.357 1홈런 2타점 OPS 0.929을 기록하며 신시내티의 3연승을 이끌었고, 월드시리즈에서 보스턴을 상대로 타율 0.370 0홈런 2타점 OPS 0.966을 기록하며 신시내티의 7차전 승리를 견인하고 월드시리즈 MVP에 선정됐습니다. 로즈의 활약 덕분에 신시내티는 1940년 이후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로즈는 1975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올해의 스포츠맨'에 선정됐습니다.

 

이듬해인 1976년 로즈는 162경기 130득점 215안타 10홈런 63타점 OPS 0.854로 3년 연속 득점과 2루타(42) 부문 리그 1위에 올랐고, 통산 6번째 최다 안타 1위를 차지했는데요. 신시내티 역시 102승(60패)으로 NL 서부지구 1위를 차지한 후 챔피언십시리즈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에 3연승,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에 4연승을 거두며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는 챔피언십시리즈 도입 후 유일한 포스트시즌 무패 기록입니다.


빅 레드 머신의 해체

피트 로즈 Ⓒ MLB.com

 

로즈는 이후로도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로즈는 30대 후반에도 1977년 162경기 204안타 9홈런 64타점 16도루 타율 0.311 OPS 0.809을, 1978년 159경기 198안타 7홈런 52타점 13도루 타율 0.302 OPS 0.783을 기록했는데요. 특히 1978년 5월 5일에는 홈구장인 리버 프런트 스타디움에 운집한 37,823명의 팬들 앞에서 MLB 역사상 13번째 통산 3000안타를 달성했고, 6월 14일부터 44경기 연속 안타를 때려내며 NL 역대 공동 1위에 오릅니다.

 

​하지만 경기장 밖의 분위기는 전례 없이 달라지고 있었는데요. 메이저리그는 1976년부터 선수들이 일정 기간 팀에서 활약한 후 다른 팀과 자유롭게 계약할 수 있는 '자유계약 선수(FA)' 제도를 도입했고, 이는 선수들의 연봉 상승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FA 제도 도입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구단은 신시내티였죠. 스몰마켓인 신시내티는 늘어난 연봉을 감당할 재정적인 여력이 없었고, 1루수 토니 페레즈를 시작으로 주축 선수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냈습니다.

 

대부분의 기록에 따르면 로즈는 신시내티에 남기를 원했지만, 신시내티는 30대 후반의 고액 연봉자인 그를 붙잡을 여력이 없었죠. 1978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은 로즈는 세인트루이스, 피츠버그, 캔자스시티 등 여러 팀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으나,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4년 320만 달러에 계약을 맺습니다. 당시 필라델피아는 1883년 창단 후 100년 가까운 역사에서 월드시리즈 우승을 한차례도 차지하지 못한 '만년 꼴찌팀'이란 인식이 강했는데요.

 

하지만 1970년대부터 역대 최고의 3루수 마이크 슈미트와 좌완 에이스 스티브 칼튼이 등장하면서 강팀으로 도약하기 시작했죠. 문제는 1976년부터 1978년까지 3년 연속 NL 동부지구 1위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챔피언십시리즈에서 탈락했다는 건데요 당시로선 파격적인 금액인 320만 달러를 투자하면서까지 로즈를 영입한 것은 창단 첫 WS 우승을 위한 필라델피아의 승부수였습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의 승부수는 멋지게 성공을 거둡니다.


필라델피아 창단 첫 우승의 마지막 퍼즐

피트 로즈 Ⓒ MLB.com

 

필라델피아로 이적한 첫해인 1979년 1루수로 포지션을 옮긴 로즈는 163경기 208안타 4홈런 90득점 20도루 타율 0.331 OPS 0.848을 기록했는데요. 출루율 0.418은 리그 1위였고 20도루는 개인 최다였죠. 이듬해인 1980년 로즈는 정규 시즌에 선 타율 0.282 1홈런 95득점 12도루 OPS 0.706으로 부진했지만, 필라델피아가 번번이 탈락의 고배를 마셨던 챔피언십시리즈에서 휴스턴을 상대로 4할 타율을 기록하며 팀의 월드시리즈 진출을 이끌었습니다.

 

이해 필라델피아는 월드시리즈에서 캔자스시티를 4승 2패로 꺾고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합니다. 로즈는 선수 파업으로 단축된 1981시즌 107경기 140안타 73득점 타율 0.325 OPS 0.781으로 통산 7번째 최다 안타 1위에 오르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습니다. 하지만 1982년 타율 0.271, 1983년 타율 0.245에 그친 끝에 필라델피아로부터 방출됐죠. 이후 1984년 몬트리올과 계약을 맺고 95경기에 출전한 뒤 신시내티로 트레이드되어 선수 겸 감독을 맡습니다.

 

신시내티로 복귀한 로즈는 45세인 1986년까지 현역 생활을 이어가며 여러 진기록을 남겼는데요. 특히 1985년 9월 11일 샌디에이고와 홈경기에서 통산 4192번째 안타를 터뜨리며 타이 콥을 넘어 MLB 역대 최다 안타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최종적으로 그는 통산 3562경기에서 2165득점 4256안타 160홈런 1314타점 198도루 타율 0.303 출루율 0.375 OPS 0.784를 기록했고 올스타 17회, 신인왕, MVP 1회, 타격왕 3회, 골드글러브 2회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도 한동안 신시내티의 감독으로 재직했죠. 하지만 1989년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는데요. 로즈가 메이저리그 경기에 불법 베팅을 한 사실이 밝혀진 겁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로즈는 신시내티 감독 재임 시기인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신시내티의 52경기에 베팅했습니다. 신시내티가 지는 것(고의 패배)에 베팅을 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진 않았지만, 현역 감독이 MLB 경기에 베팅했다는 것만으로도 영구 제명 사유에 해당했죠.


영구제명, 그리고 복권

그레이트 아메리칸 파크 앞에 세워진 피트 로즈 동상 Ⓒ MLB.com

 

로즈는 처음에는 자신에 대한 모든 혐의를 부인했지만, 결국 1989년 8월 24일 MLB 사무국과 영구 제명에 합의했습니다. 이에 따라 명예의 전당 입성은 물거품이 됐습니다. 로즈는 이후 꾸준히 복권을 요청했으나 사무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2024년 9월 30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자택에서 8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로즈가 사망한 지 8개월 만인 2025년 5월 14일 MLB 사무국은 그의 영구 제명 조치를 철회한다고 밝혔습니다.

 

로즈의 복권 논의가 급물살을 탄 계기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공개 발언이 있었습니다. 트럼프는 2025년 초 "로즈는 처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이라고 밝혔고, 이는 야구계와 여론 모두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죠. 로즈의 유족들 역시 복권을 요청했고, MLB 사무국은 이를 재검토한 끝에 전향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제 명예의 전당 후보 자격을 되찾게 된 로즈는 2027년 12월 '시대 위원회'의 투표에 따라 명예의 전당 입성 여부가 결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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