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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승 좌완 랜디 존슨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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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를 오래 보신 분들이라면 이 왼손 투수를 잊지 못하실 겁니다.


랜디 존슨(Randall David Johnson),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저는 '공포의 좌완'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미국팬들은 그를 '빅 유닛(Big Unit)'이라고 불렀습니다.
미국인들의 시선에도 그는 정말 체격이 큰 선수였습니다. MLB 투수들의 평균 신장이 190cm니까 아주 큰 편입니다. 그런데 랜디는 신장이 2m8cm였습니다.
사실 랜디 존슨 전까지 MLB 스타우트의 속설은 '키가 너무 큰 투수는 밸런스를 잡기 어려워 효과적인 피칭을 하기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1988년 랜디가 몬트리올에서 데뷔했을 때만 해도 그 속설이 맞는 거 같았습니다.
첫 풀타임 시즌인 1989년 그는 160.2이닝을 던지면서 볼넷을 96개나 내줬습니다. 공은 무섭게 빠른데, 제구는 안되는 거구의 왼손 투수.
그런데 이 기록도 그해 두 팀에서 작성됐습니다.
몬트리올은 당대 최고 좌완이던 시애틀의 마크 랭스턴을 영입하기 위해 제구 안 되는 좌완 랜디 존슨과 또 다른 우완 투수 유망주 2명 등 3:1 트레이드를 단행한 것입니다.

그렇게 끼어팔기 선수 중 하나였을 정도로 주목받지 못했던 랜디가 제구를 잡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폭발적인 구위로 그 단점을 눌러 이기며 '공포의 좌완'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 14승으로 첫 10승 투수가 됐는데 11패도 있었고, 120볼넷은 리그 최다였습니다. 그해부터 3년간 14승-13승-12승으로 확고한 선발 투수로 올라섰습니다. 그런데 120볼넷-152볼넷-144볼넷으로 3년 연속 최다 볼넷 투수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194K-228K-241K의 압도적인 탈삼진도 함께 기록했습니다. 241K는 리그 최다였습니다.

 

상상만으로도 정말 특이한 투수 아닙니까? ^^

 

가공할 위력의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를 던지며 추풍낙엽처럼 삼진을 잡아냈지만, 타자들을 공포에 떨게 한 제구력 난조로 4사구도 무수히 내주던 투수.
단 두 구종만으로도 리그를 압도할 수 있었던 선발 투수.
그러던 랜디는 전설의 강속구 투수 놀란 라이언을 만나 조언을 들으면서 그야말로 리그 최강 투수로 거듭나게 됩니다.

 

라이언 역시 전설의 강속구와 함께 리그 최고의 삼진왕이었으면서, 동시에 볼넷도 아주 많이 내주던 젊은 시절을 보낸 투수였습니다.
기술적으로 키가 너무 크고 팔이 너무 길어 릴리스 포인트가 자주 흔들린다고 지적한 라이언은 반복 가능한 투구 매커니즘을 유지하도록 반복 훈련을 조언했습니다. 아울러 상체와 팔이 아니라, 하체와 무게 중심의 균형을 이루는 투구 동작도 이야기했습니다.
어찌 보면 평범한 기술적인 조언일 수 있지만, 라이언이 진심으로 건네는 이야기는 느낌이 다를 수밖에.
그리고 라이언은 무엇보다 타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스트라이크존을 공격하는 마음 자세를 강조했습니다. 랜디는 이 조언에 따른 정신적인 변화가 컸다고 회고했습니다.

 

1993년 나이 서른에 19승 8패 ERA 3.24, 255.1이닝 동안 308개의 삼진을 잡으며 올스타에 뽑히고 사첫 이영상을 수상하는 생애 최고의 해를 보냅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랜디 존슨의 커리어를 소개할 의도는 아니었는데, 기록을 복기해 보자니 끝이 없네요. 
그의 서른살 시즌은 실은 피칭 커리어의 날아오르는 시작점에 불과했습니다.
랜디는 40세에 290K로 9번째 탈삼진왕을 차지하는 등 나이를 거꾸로 먹는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만 45세이던 2009년 자신의 고향 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300번째 승리를 거뒀습니다.
통산 4875K로 역대 좌완 투수 1위, 놀란 라이언에 이어 역대 2위의 삼진왕이었던 랜디는 6번의 300K 시즌을 이뤄내 라이언과 통산 공동 1위입니다.
10번의 올스타, 5번의 사이영상과 함께 양대리그에서 모두 노히트를 기록한 5명의 투수 중에 한 명이며, MLB 30개 팀 모두를 상대로 승리한 15명의 투수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2004년에는 만 40세에 MLB 사상 17번째 퍼펙트게임을 던져, 최고령 기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시범경기에서 그가 타자에게 던진 공에 날아가던 비둘기가 맞아 폭발하듯 사라진 사고(?)는 유명합니다.

 

이제 랜디 존슨에 대한 제 추억을 몇 가지 소개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01년 시애틀에서 열린 올스타전이었습니다.
올스타 숙소 호텔의 엘리베이터를 내리는데 바로 앞으로 랜디가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저와 함께 내리던 박찬호 선수를 만나자 랜디는 걸음을 멈추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박찬호의 첫 올스타전을 축하하는 일상적인 인사 대화였는데, 정말 키가 크다는데 새삼 감탄했던 기억은 생생합니다.
그때 옆에서 찍은 사진인데, 박천호 선수가 1m85입니다.
예전에 NBA를 취재하며 매직 존슨과 잠깐 몇마디 인터뷰 한적이 있는데 일어서니 제가 가슴에 닿을까 말까였습니다. 랜디가 매직보다 2cm 정도 더 큽니다. 

(당시 호텔에서 많은 올스타들을 만났는데, 커트 실링 투수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그는 멀리서 박찬호를 보더니 일부러 다가와서 올스타 뽑힌 걸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실링이 아주 인성이 좋은 친구로구나 생각을 했었습니다. ^^)

©️2001년 시애틀에서 열린 올스타전 호텔에서 만난 랜디 존슨과 박찬호를 찍은 사진, 키 차이가 ㅎㅎ

 

랜디 존슨을 처음 눈앞에서 봤던 기억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마도 1999년쯤 뉴욕의 셰이스타디움이었습니다. 연도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애리조나 시절 김병현 취재를 갔을 때였습니다. 경기 전 취재를 하다가 원정팀 더그아웃에 앉아 있는데 훈련을 마친 디백스 선수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랜디 존슨이 제 바로 앞에 서서 더그아웃 위쪽에 있는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있다가 밑에서 랜디의 사인하는 모습을 찍었는데 정말 그렇게 거대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진은 당시 쓰던 노트북에 저장해 놓았는데 컴퓨터가 갑자기 망가지면서 그 사진도 잃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사진입니다. 바로 밑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의 체구에 지구가 다 가리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2000년대 초 피닉스의 당시 이름 뱅크원파크 클럽하우스였습니다.
랜디에게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경기 후 클럽하우스에서 기다렸다가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다가가 질문을 했습니다. 무슨 질문이었는지 전부 정확히 기억은 나질 않는데, 당시 활약하던 김병현에 대한 질문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당신 별명이 '빅 유닛'인데 BK의 별명은 '스몰 유닛'이라는 말도 듣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까 씩~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소 무뚝뚝했지만 그렇다고 배리 본즈처럼 다른 사람들은 무시하거나, 혹은 불친절하거나 그런 느낌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생소한 한국 기자였으니 아마 낯은 좀 가렸던 거 같습니다.

후에 알게 된 것은 랜디 존슨이 관계를 소중히 하며 어렸을 적 친구들과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지낸다는 것입니다.
소방관, 교사, 음악업계 종사자, 마켓 주인, 경찰관 등 다양한 직종의 어릴 적 친구들과 종종 만나고, 시애틀과 애리조나 그리고 명예의 전당 헌액식 때 시간이 되는 친구들을 초대하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자선 활동을 할 때도 시간이 되고 원하면 함께 봉사활동을 하곤 했습니다. 친구들이 '너는 이제 유명인이잖아?'라고 하면 '난 그저 랜디일 뿐이야'라고 답하곤 했다죠.

 

MLB 사상 24번째로 300승을 달성한 랜디 존슨은 은퇴 후에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랜디는 야생동물 사진과 여행 사진, 메탈리카나 AC/DC 등 록 콘서트 그리고 스포트 이벤트도 찍는데 상당한 수준으로 인정받습니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팀 사진사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랜디의 자신 워터마크는 '죽은 새(Ded Bird)'입니다. 그의 투수에 맞은 새 사건을 차용한 것입니다.

 

2009년 6월 4일 워싱턴 내셔널스를 상대로 이룬 300승 관련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하며 '빅 유닛' 랜디 존슨 이야기를 마칩니다.

 

랜디 존슨은 스티브 칼턴과 게이로드 페리에 이어 세 번째로 전 소속팀 상대로 300승을 거둔 투수가 됐습니다. 특히 칼턴과 존슨은 자신들의 야구 생애를 시작했던 팀을 상대로 위대한 300승째를 거뒀습니다. 존슨은 몬트리올 엑스포스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팀이 이적해 워싱턴 내셔널스가 됐습니다.
존슨은 300승을 거둔 투수들 중에 5번째로 승률이 좋습니다. 레프티 그로브와 크리스티 매튜슨, 로저 클레멘스, 존 클락슨만이 랜디 존슨보다 승률이 좋았습니다. 존슨의 승률은 64.7%(300승 164패) 입니다.
존슨은 싸이영상을 5번 수상했는데 그 중에 4번이 애리조나 유니폼을 입고 이뤘습니다.
300K 이상을 기록한 시즌도 6번이나 되는데 그 기록들은 모두 만 29세가 지난 후에 이뤄냈습니다
존슨은 1985년 톰 시버 이후 처음으로 299승을 거두고 곧바로 다음 경기에서 300승을 거둔 투수가 됐습니다, 아홉수는 없었습니다. 
존슨은 왼손 투수로는 역대 6번째 300승 투수입니다. 워렌 스판(363), 스티브 칼턴(329), 에디 플랭크(326), 톰 글래빈(305), 레프티 그로브(300)에 이어 6번째입니다.
존슨은 역대 두 번째의 고령 300승 투수입니다. 너클볼 투수 필 니크로가 만 46세 188일로 최고령이었고, 존슨은 만 45세 267일에 300승을 달성했습니다. 존슨은 또한 300승 투수 중에 5번째로 늦은 나이에 빅리그 첫 승리를 거뒀습니다.

지난 2015년 후보 첫 해에 97.3%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오른 랜디는 어쩌면 최후의 300승 투수가 될지도 모릅니다.
현역 중에는 42세의 저스틴 벌랜더가 265승으로 최다승 투수이고, 37세 클레이턴 커쇼가 222승, 40세 맥스 슈어쩌가 221승입니다. 그 밑으로는 160승 투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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