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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의 여우, 에디 콜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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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콜린스 Ⓒ MLB 명예의 전당

 

에디 콜린스는 '지능적인 플레이'로 데드볼 시대를 지배했던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2루수 중 한 명입니다. 콜린스는 1906년 데뷔해 1930년 은퇴할 때까지 25시즌 동안 통산 2,826경기 3,315안타 47홈런 1,299타점 741도루 타율 0.333 OPS 0.853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MLB 통산 안타 12위, 도루 7위에 해당하는 성적입니다. 또한, 콜린스의 WAR은 124.3승으로 1위 로저 혼스비(127승)에 이어 메이저리그 역대 2루수 2위에 올라있습니다.

 

콜린스의 플레이 스타일은 '정교한 타격', '영리한 주루', '뛰어난 수비'로 요약할 수 있는데요. 야구 선수치곤 작고 마른 편(175cm 79kg)이었던 그는 배트를 짧게 쥐고 반대편으로 밀어치는 데 집중했습니다. 또한, 콜린스는 '도루는 포수가 아닌 투수의 타이밍을 빼앗는 것'이란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은 도루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 빠르지 않은 발을 갖고 있었음에도, 상대 투수를 철저하게 분석해서 베이스를 훔칠 수 있었습니다.

 

명문대를 졸업한 엘리트 

에디 콜린스 Ⓒ MLB 명예의 전당

 

콜린스는 절묘한 번트 기술로도 유명했습니다. 그의 안타 가운데 상당수는 번트에서 나왔고, 희생번트는 통산 512개로 현재까지도 MLB 역대 1위에 올라있습니다. 또한, 40세가 넘는 나이에도 '2루 수비의 교과서'라 불릴 만큼 뛰어난 수비수이기도 했죠. 한편, 그의 최대 장점 중 하나는 '큰 경기에 매우 강한 선수'였다는 겁니다. 그는 선수로서 6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했고, 그 가운데 3번의 시리즈에서 4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습니다.

 

메이저리그 선수 중에서 대학을 다닌 선수가 극히 드물었던 시대에 아이비리그의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콜린스는 당대 가장 똑똑한 선수였습니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오만한 태도'로 동료들과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요. 하지만 교육 수준과는 별개로 콜린스는 수많은 미신을 믿는 모순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순'과 '복잡성'은 그의 경력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특징이자, 은퇴 후 저평가 받는 원인이기도 했죠.

 

에디 콜린스의 본명은 '에드워드 트로브리지 콜린스(Edward Trowbridge Collins)'로, 1887년 5월 2일 미국 뉴욕주 밀러턴에서 철도 화물 운송업자인 존 로스먼 콜린스와 메리 콜린스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콜린스가 생후 8개월이 됐을 때 그의 가족은 뉴욕시에서 북쪽으로 30마일 떨어진 테리타운으로 이사했는데요. 테리타운의 어빙 스쿨을 졸업한 콜린스는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해 미식축구 팀의 쿼터백이자, 야구팀의 유격수로 활약했습니다.

 

명문대 출신이라 상류층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 콜린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콜린스는 컬럼비아 대학생 시절에도 부업으로 한 경기당 1달러를 받고 준프로 팀인 테리타운 테러스에서 활약했죠. 대학야구 선수가 프로 팀에서 뛰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에디 T. 설리번'이라는 가명을 썼습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콜린스는 훗날 1906년 준프로 팀에서 뛴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학야구 선수 자격이 박탈됩니다.

 

애슬레틱스 왕조를 탄생시키다

에디 콜린스 Ⓒ MLB 명예의 전당

 

그러나 그런 시간들이 완전히 낭비된 것은 아니었는데요. 마침 신혼여행 중이었던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투수 앤디 코클리가 우연히 콜린스가 준 프로팀인 러틀랜드에서 뛰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코클리는 즉시 애슬레틱스의 공동 구단주 겸 감독인 코니 맥에게 "이 아이를 빨리 영입해야 한다"라고 전보를 보냈습니다. 코니 맥은 백업 포수인 지미 반스를 파견했고, 반스가 쓴 스카우팅 리포트를 보자마자 콜린스와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콜린스는 애슬레틱스와 계약을 맺을 때 한 가지 흥미로운 조건을 걸었습니다. '마이너리그에서 뛰지 않는다'는 조건을 계약서에 명시한 것이죠. 이후 콜린스는 1906년 9월 18일 화이트삭스전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습니다. 하지만 콜린스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기 위해 첫 두 시즌 동안 20경기 출전(1906년 6경기, 1907년 14경기)에 그쳤고, 그가 본격적으로 메이저리그에 뛰어든 것은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1908년부터였습니다.

 

콜린스는 1908년 유격수, 2루수, 외야수를 오가며 102경기에서 타율 0.273 1홈런 40타점 8도루 OPS 0.691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풀타임 2루수로 출전한 첫해인 1909년 153경기에서 타율 0.347 3홈런 56타점 63도루 OPS 0.866을 기록하며 자신의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후 콜린스는 1910년 153경기에서 타율 0.324 3홈런 81타점 81도루 OPS 0.800으로 도루왕을 차지하면서 소속팀 애슬레틱스(102승 48패 0.684)의 리그 1위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출전한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0.429를 기록하며 애슬레틱스에 창단 첫 우승을 안겼죠.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는데요. 콜린스가 이끄는 애슬레틱스는 1910년부터 1914년까지 5년간 4차례나 리그 1위를 차지했고, 그중에서 3차례(1910, 1911, 1913년)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1914년에는 월드시리즈 우승에 실패했지만 152경기에서 타율 0.344 2홈런 85타점 58도루 OPS 0.904를 기록하며 MVP를 차지했습니다.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되다

에디 콜린스 Ⓒ MLB 명예의 전당

 

하지만 애슬레틱스는 1914시즌 종료 후 콜린스를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하는데요. 해당 시즌 MVP를 받은 선수가 오프시즌에 트레이드된 것은 MLB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먼 훗날인 2003년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MVP를 수상하고 양키스로 트레이드되기 전까지 약 90년간 유일한 사례이기도 했죠. 따라서 콜린스가 1914시즌 종료 후 트레이드된 원인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첫 번째 원인은 애슬레틱스가 재정난으로 인해 그의 높은 연봉을 감당하기 힘들었다는 겁니다. 당시 애슬레틱스의 내야진(에디 콜린스, 잭 배리, 프랭크 베이커, 스터피 맥기니스)의 별명은 '10만 달러 내야진'이었고, 그중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선수는 콜린스였는데요. 따라서 재정난에 빠진 애슬레틱스가 가장 먼저 처분해야 할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애슬레틱스는 그의 트레이드 대가로 화이트삭스로부터 5만 달러를 받았다고 합니다.

 

두 번째 원인은 특유의 오만한 성품으로 인해 팀 동료들과 마찰이 벌어졌기 때문인데요. 콜린스는 고등 교육을 받았고 표면적으로는 세련된 매너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애슬레틱스가 우승을 차지하는 동안 팀원 중 일부는 콜린스의 충성심과 우선순위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죠. 영리하기로 정평난 콜린스는 종종 신문과 잡지에 기사를 기고했는데, 팀원들은 그가 기사에 쓴 내용 때문에 다른 팀들이 약점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된 콜린스는 계약금 1만 달러에 연봉 1만 5000달러 계약을 맺으면서 타이 콥, 트리스 스피커에 이어 리그에서 세 번째로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됐습니다. 하지만 비싼 돈을 들여 콜린스를 영입한 효과는 확실했는데요. 1910년부터 1914년까지 리그 4-6위권에 머물렀던 화이트삭스는 콜린스를 영입한 후 1915년 93승 61패(.604)로 리그 3위, 1916년 89승 65패(.578)로 리그 2위를 기록했습니다.


블랙삭스 스캔들, 그리고 말년

에디 콜린스(가운데) Ⓒ MLB 명예의 전당

 

1917년 화이트삭스가 100승으로 리그 1위를 차지하며 콜린스는 12년 만에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았습니다. 이때 콜린스는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0.409을 기록하며 팀의 창단 두 번째 우승을 이끌었죠. 이는 콜린스의 커리어 4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1918년 8월 해병대에 입대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는데요. 그는 필라델피아 해군 조선소에서 복무했지만, 훈장까지 받으면서 1919년 2월 7일 명예롭게 전역했습니다.

 

전역 직후인 1919년에도 화이트삭스는 리그 1위를 차지하며,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습니다. 1919년은 MLB 역사상 최대, 최악의 흑역사인 블랙삭스 스캔들이 벌어진 해였죠. 이해 짠돌이로 악명 높던 구단주 코마스키에게 불만을 품은 화이트삭스의 일부 선수들이 도박사들에게 돈을 받고 월드시리즈에서 신시내티 레즈에게 고의로 패배하는 승부조작 사건이 일어났고, 결국 이듬해인 1920년 경찰 조사 결과 승부조작에 관련된 8명이 영구 제명됩니다.

 

하지만 당시 리그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았고 동료들과 사이가 나빴던 콜린스는 처음부터 용의선상에서 벗어났습니다. 훗날 콜린스는 "군 복무를 마치고 캠프에 도착한 순간부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수단 내부에서 잦은 논쟁과 노골적인 적대감이 팽배해 있었다. 하지만 우리 팀에는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야구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을 목격하게 됐지만, 그 일이 벌어질 당시에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화이트삭스가 스캔들로 추락한 후에도 콜린스는 계속해서 뛰어난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1920년부터 1926년까지 7시즌 동안 연평균 타율 0.348 3홈런 71타점 25도루 OPS 0.881을 기록했고, 1924시즌 중반부터 1926시즌 종료까진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했죠. 그리고 1926시즌 이후 화이트삭스에서 방출된 콜린스는 1927년 애슬레틱스와 계약을 맺고 친정팀으로 복귀해 선수 겸 코치로 4년간 활약한 뒤 1930년 만 43세의 나이로 은퇴했습니다.

 


은퇴 후의 삶

 

은퇴할 때를 기준으로 콜린스는 메이저리그 역대 경기수(2826)·볼넷(1499)·도루(744)에서 2위, 득점(1921)에서 3위, 안타(3315)·타석(9949)·3루타(187)에서 4위, 출루율(0.424)에서 6위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또한 현재까지도 2루수로서 경기수(2650)·어시스트(7630) 1위, 풋아웃(6526) 2위에 올라있는데요. 하지만 블랙삭스 스캔들을 일으킨 1919년 화이트삭스의 멤버였기에, 명예의 전당은 4수 끝에 1939년 77.7%의 득표율로 간신히 헌액됐습니다.

 

은퇴 후 콜린스는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애슬레틱스에서 코치로 일한 뒤 1933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부사장 겸 단장으로 부임했습니다. 보스턴의 단장 시절 그는 바비 도어와 테드 윌리엄스라는 미래 명예의 전당 멤버를 스카우트하는 성과를 남겼는데요. 1947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콜린스는 단장 자리를 조 코르닌에게 넘기고 부사장으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1951년 3월 26일 심혈관 질환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만 63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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