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 맨’에서 ‘트루먼’으로, Goodbye 앤서니 리조
‘진짜 남자(TRUE MAN)’ 앤서니 리조를 떠나보내며
여러분이 기억하는 앤서니 리조(Anthony Rizzo)는 어떤 모습인가요?
늘 눈 밑에 아이 블랙(Eye-Black)을 바르고, 짐 캐리를 연상케 하는 밝은 미소로 시카고 컵스의 1루 베이스를 지키던 다부진 체격의 1루수.
2016년 월드시리즈 7차전 연장 10회 말, 108년 만에 ‘염수의 저주’가 깨지던 순간 마지막 아웃카운트로 기록된 공을 포구한 뒤 환호하며 뒷주머니에 살뜰히 챙겨 넣던 그 선수.
뉴욕 양키스로 팀을 옮긴 이후 진출한 2024년 월드시리즈에서는 5차전 게릿 콜과의 소통 오류로 빅이닝 헌납과 시리즈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돼 고개를 떨궈야 했던 선수.
ⓒ ESPN
또 하나의 전설로 기록된 리조가 9월 14일(우리 시간) 시카고 컵스의 홈구장인 리글리필드(Wrigley Field)에서 공식 은퇴식을 가졌습니다.
리조, 2016 WS 우승의 숨은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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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PN
2016년 월드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이었고, 그 마지막 7차전도 연장 10회까지 가서야 승부가 났습니다. 당시 월드시리즈는 ‘저주 시리즈’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세간의 관심이 많았습니다. 108년 묵은 ‘염소의 저주’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시카고 컵스와 68년 동안 ‘와후 추장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대결이었기 때문입니다.
리조와 컵스 멤버들은 당시 이 트로피를 들고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14시즌을 뛴 리조는 그중 시카고 컵스에서만 10년을 보내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컵스 소속으로 통산 타율 0.261, 303홈런, 965타점을 기록했으며, 특히 2016년 월드시리즈에서는 컵스가 108년 묵은 한을 풀고 정상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 Chicago Tribune
리조는 당시 월드시리즈 7경기에서 타율 0.360, 1홈런, 5타점, 7득점을 기록했습니다. MVP는 결승타를 기록한 벤 조브리스트에게 돌아갔지만, 리조가 받아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성적이었습니다.

ⓒ 2016 Topps Now - Kris Bryant & Anthony Rizzo(1/2/16) #663A(카드 읽어주는 남자)
그 당시 주요 언론은 리조에게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습니다.
“Rizzo was the rock in the Cubs’ lineup, constantly getting on base and driving in runs when needed. Without his steady presence, the Cubs would not have been in position for Zobrist’s heroics.”
“리조는 컵스 타선의 바위 같은 존재였다. 꾸준히 출루하고 필요할 때마다 점수를 만들어냈다. 그의 안정적인 존재감이 없었다면 조브리스트의 영웅적 장면도 없었을 것이다.”
- Chicago Tribune(2016.11.3.)
“While Zobrist took home the MVP hardware, Anthony Rizzo’s .360 average and crucial Game 6 home run were equally vital in shifting the momentum.”
“MVP 트로피는 조브리스트가 가져갔지만, 리조의 .360 타율과 6차전 홈런은 흐름을 바꾸는 데 똑같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 ESPN(2016.11.3.)
“It could have been Rizzo, it could have been Bryant, it could have been Russell. But Zobrist had the hit that will live forever.”
“리조가 될 수도 있었고, 브라이언트나 러셀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조브리스트가 영원히 기억될 그 한 방을 날렸다.”
- Sports Illustrated(2016.11.4.)

ⓒ All Things Chicago
이외에도 리조는 시카고 컵스에서 뛰는 동안 3차례 올스타에 선정됐고, 골드글러브도 4차례 수상하며 공수를 겸비한 자타공인 1루수로 인정받았습니다. 아울러 플래티넘 글러브, 실버 슬러거 수상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몰랐던 리조의 숨은 이야기
리조는 플로리다州 파클랜드의 마저리 스톤맨 더글라스 고등학교(Marjory Stoneman Douglas High School) 출신으로, 보스턴 레드삭스에 의해 드래프트 6라운드에서 지명됐습니다. 2011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데뷔한 이후, 시카고 컵스, 뉴욕 양키스에서 14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해왔습니다.
ⓒ USA Today
리조는 야구 실력뿐 아니라 투철한 봉사 정신으로도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2017년 로베르토 클레멘테상(Roberto Clemente Award) 수상자로 선정됐는데, 이 상은 야구, 스포츠맨십, 지역사회 참여, 그리고 팀에 대한 개인의 기여를 가장 잘 보여준 선수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 The Anthony Rizzo Family Foundation
2012년, 그는 앤서니 리조 패밀리 재단(The Anthony Rizzo Family Foundation)을 설립했는데, 이 재단의 사명은 암 연구를 위한 기금을 모으고, 암과 싸우는 어린이와 그 가족들을 지원하는 것이었습니다.
2007년 자신도 암에 걸렸었는데, 치료를 받던 병실에서 어머니와 함께 앉아 있었을 때, 자신이 완쾌하면 반드시 보답하고 다른 가족들을 돕겠다고 한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https://vimeo.com/338323193?fl=pl&fe=sh
ⓒ The Anthony Rizzo Family Foundation
그는 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앤서니 리조 패밀리 재단을 설립한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가 되는 것은 제 꿈이었습니다. 2007년, 17세의 나이에 저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보스턴 레드삭스 구단에 지명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저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서 싱글 A팀에 합류하며 빅리그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As a child, it was always my dream to be a major league baseball player. In 2007, at the age of 17, I was fortunate enough to be drafted right out of High School by the Boston Red Sox organization. I began my big-league journey in Greenville, SC playing single A ball.
그러나 기쁨도 잠시, 제 세상은 곧 세 마디의 말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당신은 암에 걸렸습니다.” 저는 호지킨 림프종이라는 진단을 받고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But, before I knew it, my exciting new world came crashing down with the three words you never expect to hear…you have cancer. I was shocked to be diagnosed with Hodgkin’s Lymphoma.
이 소식은 저 개인에게도 끔찍했지만, 동시에 저희 가족에게는 더욱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제 할머니께서도 유방암과 맞서 싸우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항암 치료가 저를 지치게 만들 때조차, 저는 제 주변 모든 이들을 위해 꿋꿋하게 버텨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시기를 지나며 저는 암이 단지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함께 맞서 싸워야 하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This was obviously terrible news for me personally, but it was even more grueling for my family because my Grandma was facing her own battle with breast cancer at the very same time. As bad as my chemotherapy treatments made me feel, I knew I had to dig deep and stay strong for everyone around me. During this time, I realized that cancer is so much more than individual hardship, but rather a battle that the whole family must face together.
험난한 길이었지만, 2008년 9월 2일, 저의 주치의 이지도르 로소스 박사님께서 “앤서니, 당신은 차도를 보이고 있습니다”라는 위대한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이런 역경을 극복하면서 저는 메이저리그에서 뛰겠다는 꿈뿐 아니라, 암 환자와 그 가족들을 돕는 롤모델이 되고 싶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It was a hard road, but on September 2, 2008, my doctor, Izidore Lossos gave me the great news, “Anthony, you are in Remission.” Overcoming adversity like this provided me the clarity to know that, in addition to my dreams of major league ball, I now wanted to become a role model to help cancer patients and their families.
2012년, 가족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앤서니 리조 패밀리 재단(The Anthony Rizzo Family Foundation)’을 설립하여 소아암 환자와 그 가족들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도 암과의 싸움에서 함께 타석에 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 그동안 보내주신 사랑과 응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In 2012, with the help of my family, we founded The Anthony Rizzo Family Foundation to support pediatric cancer patients and their families. I truly appreciate all of your love and support along the way as we all continue to step up to the plate in the fight against cancer.
“Stay Strong, Dream Big”
리조는 자신이 암과 싸우던 시기에 암 투병이 자신에게 힘든 것 이상으로 가족들에게 더 큰 고통임을 깨달았습니다. 리조는 “암은 개인이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함께 싸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 NJ.com
특히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암을 극복하고 보스턴 레드삭스 투수로 활약하던 존 레스터(Jon Lester)를 만날 수 있었는데, 레스터가 “항상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몸 상태가 좋을 때는 적극적으로 삶을 살며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합니다.

ⓒ The Anthony Rizzo Family Foundation
리조는 아직까지도 병원을 방문하거나 경기장, 혹은 편지를 통해 만나는 아이들에게 그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위해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의 모든 편지 말미에는 늘 같은 문구를 적어 넣는다고 합니다.
“Stay Strong, Dream Big”
ⓒ 2017 Topps Definitive Collection Autograph Inscription - Anthony Rizzo(DCAI-AR) / (카드 읽어주는 남자)
2017년 발매된 Topps社의 한 사인 카드 시리즈에도 리조의 짤막한 메시지(인스크립션)가 추가돼 있는데요. 해당 카드는 35장 한정으로 발매됐으며, 리조는 큰 꿈을 꾸라는 의미로 “Dream Big!”이라는 문구를 더했습니다.
“바에스테로스, 리조에게 공 날려줘”
2022년 6월 15일 고척 스카이돔에서 열린 KBO 키움 히어로즈와 두산 베어스의 경기에서 재밌는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 The Joong Ang
외야의 여성 팬이 스케치북에 “이정후, 여기로 공 날려줘”라는 문구를 적어 응원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정후가 그 팬이 앉아있던 곳으로 홈런을 날린 것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앤서니 리조의 은퇴식 경기에도 나왔습니다.
ⓒ MLB.com
이날 경기는 시카고 컵스와 탬파베이 레이스의 맞대결이었습니다. 리조는 경기 전 시구와 짧은 은퇴식을 가진 뒤 리글리 필드 외야석에서 경기를 지켜봤습니다. 리글리 필드라는 유서 깊은 옛 구장에서 팬들과 함께 관중석에서 핫도그와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게 작은 꿈이었다고 합니다.
ⓒ MLB.com
그리고 2회 말, 컵스의 신인 모이세스 바예스테로스(Moisés Ballesteros)가 친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관중석에 있던 리조에게 바로 날아간 것입니다. 공은 리조의 손을 맞고 튀어 뒤쪽으로 떨어졌습니다.
ⓒ Sports Illustrated
리조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두 팔을 하늘로 치켜들며 공을 잡아준 팬과 함께 기뻐했습니다. 이 홈런은 발레스테로스의 MLB 첫 홈런이라는 기념비적인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재밌는 건 리조가 어디에 있건 공과 카메라는 그를 쫓아다닌다는 것입니다.
‘진짜 남자(True Man)’ 리조, 이젠 ‘Truman’으로
따뜻하고 섬세한 남자 앤서니 리조. 하지만 경기장에서는 그 누구보다 ‘진짜 남자, 상남자’였습니다.
벤치 클리어링이라도 벌어지는 날이면 제일 먼저 뛰쳐나가 몸싸움을 하며 클럽하우스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리조는 메이저리그 전체 역사에서 단 9명뿐인 ‘200회 이상 몸에 공을 맞은 타자’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 Sports Illustrated
리조는 홈플레이트에 최대한 붙어 투수들이 몸쪽 승부를 걸도록 유도했습니다. 아무리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라도 절대 피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 Fox Sports
상대 팀이 번트 모션을 취하면, 리조는 1루에서 홈플레이트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려들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안전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습니다.
리조는 의심의 여지 없는 리더, 팀의 상징이자 영혼이었습니다.

ⓒ 영화 《트루먼 쇼》 포스터
리조는 영화 《트루먼 쇼, The Truman Show》의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짐 캐리 分)’처럼 늘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습니다.
은퇴 이후 시카고 컵스 구단의 ‘앰배서더(명예 홍보대사)’로 활동한다는 소식은, 그동안 우리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던 그의 플레이 장면에 대한 구단 측의 출연료 성격의 보답이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이 직함은 빌리 윌리엄스(Billy Williams), 퍼거슨 젠킨스(Ferguson Jenkins)와 같은 팀의 레전드에게만 주어졌던 것입니다. 리조 역시 그 레전드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시카고 컵스의 톰 리키츠(Tom Ricketts) 회장은 “리조는 우리 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시대를 상징하는 선수”라며, “그가 앞으로도 우리 구단의 일원으로 함께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주인공인 것을 모르던 ‘트루먼 쇼’의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
‘트루먼’이라는 이름엔 ‘진짜 사람(true man)’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트루먼 쇼’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진짜 삶을 산 존재였을 지도 모릅니다.
‘트루먼 쇼’의 세트장을 야구장으로 바꿔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자신의 인생(경기장에서의 모습)이 미국 전역에 방송되는 삶을 살다 무대(경기장) 밖으로 떠나기로 마음먹은 주인공.
리조는 어린 시절 암 투병으로 인해 야구보다 더 소중한 그 무엇이 있음을 깨달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의 꿈은 메이저리거가 되는 것이었지, 메이저리그에서 현역 생활을 오래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쩐지 영화 속 주인공 트루먼과 리조(트루 맨)의 삶이 조금 닮아있지 않나요?
트루먼이 세트장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떠났듯 이젠 리조도 ‘메이저리그’라는 무대에서 빠져나와 그라운드 위의 ‘True Man’이 아닌 영화 속 ‘Truman’처럼 야구장 밖 세상을 모험하겠죠? 그의 인생 2막이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아참.
이제 못 볼지도 모르니 미리 말해둬야겠네요.
“Good Afternoon,
Good Eveningand
Good Night.”
“Goodbye Rizz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