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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더의 달인이자 괴짜였던 스티브 칼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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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칼튼 Ⓒ MLB.com

 

스티브 칼튼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좌완 투수 중 한 명이자,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입니다. 칼튼은 1966년부터 1988년까지 24시즌 통산 329승 244패 5,217.2이닝 4,136탈삼진 평균자책점 3.22를 기록했고 올스타 10회, 사이영상 4회, 골드글러브 1회, 다승왕 4회, 방어율왕 1회, 탈삼진왕 5회, 트리플크라운 1회, 월드시리즈 우승 2회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1994년 첫 번째 투표에서 95.6%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칼튼의 별명은 '레프티(Lefty)'. 메이저리그 역대 좌완 다승 2위(전체 11위), 좌완 탈삼진 2위(전체 4위)에 올라있는 그에게 걸맞은 별명인데요. MLB 역사상 300승과 4000탈삼진을 동시에 달성한 투수는 4명(칼튼, 놀란 라이언, 랜디 존슨, 로저 클레멘스) 뿐입니다. 또한, 칼튼은 MLB 최초로 사이영상을 4회 이상 수상한 투수였죠. 그뿐만 아니라 필라델피아의 에이스로서 마이크 슈미트와 함께 1980년 창단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끈 주역이기도 합니다.

 

 

플로리다의 농구 소년에서, 야구 소년으로

스티브 칼튼 Ⓒ MLB.com

 

스티븐 노먼 칼튼(Steve Norman Carlton)은 1944년 12월 22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항공 정비사였던 조 칼튼과 그의 아내 앤 칼튼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칼튼은 리틀 리그와 아메리칸 리전 베이스볼(미국과 캐나다의 50개 주에서 13~19세의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아마추어 야구)에서 활동했는데요. 칼튼은 10대부터 동양 철학과 명상에 깊은 관심이 있었고, 이는 훗날 그가 위대한 투수로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교 시절 칼튼은 야구와 농구를 병행했는데요. 칼튼은 학창 시절 학업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졸업 후 특별한 계획도 없었습니다. 사실 칼튼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는 농구였죠. 하지만 칼튼은 자신이 치명적인 왼팔을 지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고교 3학년 때 농구 팀에 선발되지 못하자, 그는 농구를 그만두고 야구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인트루이스의 입단 테스트를 통과하고 5000달러에 계약을 맺습니다.

 

칼튼은 프로 입단 첫해인 1964년 네 팀에서 활약하며 세인트루이스의 마이너리그 시스템을 빠르게 통과했습니다. 플로리다 교육리그에서 7경기 2승 3패 ERA 2.89을 기록했고, 시즌 시작 후 웨스턴 캐롤라이나 리그(클래스 A)에 배정되어 11경기 10승 1패 ERA 1.03을 기록했습니다. 시즌 중반 노던 리그(싱글 A)로 승격된 후에는 12경기 4승 4패 ERA 3.36을 기록했고, 다시 텍사스 리그(더블 A)로 승격되어 4경기 1승 1패 ERA 2.63을 기록합니다.

 

그러자 세인트루이스는 이듬해인 1965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칼튼을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리고 1965년 4월 12일, 칼튼은 만 20세의 나이에 리글리 필드에서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이후 두 시즌 동안 칼튼은 마이너리그와 메이저리그를 오가며 활약했습니다. 칼튼은 1965년 15경기(3선발) 0승 0패 25이닝 21탈삼진 ERA 2.52를, 1966년 9경기 3승 3패 52이닝 25탈삼진 ERA 3.12를 기록했습니다.

 

 

밥 깁슨으로부터 영향을 받다

스티브 칼튼(좌)과 밥 깁슨(우) Ⓒ MLB.com

 

칼튼은 풀타임 첫해인 1967년 만 22세의 나이로 14승 9패 193이닝 168탈삼진 ERA 2.98을 기록하며 세인트루이스 선발진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해 세인트루이스는 101승 60패(.627)로 정규 시즌 NL 1위에 올랐고, 월드시리즈에선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보스턴 레드삭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합니다. 그 중심에는 에이스 밥 깁슨이 있었는데요. 깁슨은 1967년 월드시리즈에서 3경기 3승 무패 27이닝 ERA 1.00을 기록하며 전설을 썼습니다.

 

깁슨은 마운드 위의 전사였습니다. 강한 승부욕을 지닌 그는 누구에게도 지는 걸 싫어했고, 강력한 구위를 바탕으로 상대 타자를 압도하는 투구를 펼쳤죠. 칼튼은 팀 선배인 깁슨이 마운드에 오르기 전까지 어떤 루틴을 수행하는지, 마운드에 올라선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한편, 영혼의 배터리 팀 맥카버와도 이 시기에 인연을 맺습니다. 젊은 좌완 투수와 베테랑 포수는 훗날 필라델피아에서도 인연을 이어가게 됩니다.

 

칼튼은 1968년 13승 11패 232이닝 162탈삼진 ERA 2.99를 기록하며 커리어 첫 올스타에 선정됐습니다. 같은 해 그의 멘토인 깁슨은 22승 9패 304.2이닝 268탈삼진 ERA 1.12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웠고, 세인트루이스는 2년 연속 월드시리즈에 진출합니다. 하지만 세인트루이스의 월드시리즈 선발진에 칼튼의 자리는 없었죠. 칼튼은 월드시리즈에서 불펜으로 등판해 4이닝 3실점을 기록했고, 세인트루이스는 디트로이트에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습니다.

 

시즌 종료 후 일본에서 열린 시범 경기에서 칼튼은 일본의 홈런왕 왕정치를 상대로 첫 두 타석에서 홈런을 허용합니다. 그러자 그동안 연습해 오던 구종을 시험해 보기로 결정하는데요. 바로 슬라이더였죠. 칼튼은 좌타자인 왕정치에게 슬라이더를 던졌고, 그가 뒤로 물러나면서 공이 스트라이크가 되었을 때 뭔가를 해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장착한 칼튼의 슬라이더는 우완 깁슨의 슬라이더와 함께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의 슬라이더로 꼽힙니다.

 


세인트루이스의 원투펀치

스티브 칼튼 Ⓒ MLB.com

 

칼튼은 당당한 체격(193cm 95kg)에서 내리꽂는 강력한 패스트볼과 커브볼을 갖추고 있었고, 여기에 슬라이더라는 레퍼토리가 추가되면서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발돋움합니다. 칼튼은 1969년 17승 11패 236.1이닝 210탈삼진 ERA 2.17으로 2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며 깁슨과 함께 세인트루이스의 원투펀치를 맡았는데요. 특히 9월 15일 뉴욕 메츠전에선 9이닝 동안 탈삼진 19개를 기록하며 당시 기준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70년 10승 19패 253.2이닝 193탈삼진 ERA 3.73으로 최다패를 기록하는 극심한 부진에 빠집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부진은 다양한 점이 원인으로 지목되는데요. 먼저 언급해야 것은 구단과의 연봉 관련 갈등입니다. 세인트루이스는 칼튼(1969년 연봉 26,000달러)에게 1970년 연봉으로 31,000달러를 제안했지만 칼튼은 5만 달러를 받길 원했고, 양측의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칼튼은 스프링 캠프에 합류가 늦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원인은 따로 있었죠. 칼튼은 1970년 어느 시점부터 자신을 슈퍼스타의 문턱까지 올려준 슬라이더를 던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왜 슬라이더를 던지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소속팀 세인트루이스가 부상 방지를 위해 슬라이더를 던지지 말라고 칼튼을 설득했다는 건데요. 당시 야구인들에게 슬라이더는 위력적이지만, 반대 급부로 부상 위험성이 높은 '악마의 구종'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칼튼은 1971년 20승 9패 273.1이닝 172탈삼진 ERA 3.56으로 커리어 첫 20승을 달성했지만, 세부 지표 면에서는 최다패를 기록했던 직전 해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또 한 번 연봉 협상에서 갈등을 겪자, 세인트루이스 구단주 거시 부시는 칼튼을 트레이드하라고 명령했죠. 머지않아 칼튼은 1972년 2월 25일, 우완 릭 와이즈와 트레이드되어 필라델피아로 이적했는데요. 당시까지만 해도 이 트레이드는 합리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필라델피아 이적 후 맞이한 전성기

릭 와이즈(좌)와 스티브 칼튼(우) Ⓒ MLB.com

 

트레이드 전까지 칼튼은 통산 77승을 기록하고 있었고, 와이즈는 75승을 기록 중이었습니다. 오히려 직전 해 성적만 놓고 보면 와이즈가 17승 14패 272.1이닝 155탈삼진 ERA 2.88로, 칼튼(3.56)보다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었죠. 탈삼진 능력은 칼튼이 나았지만 제구력 면에선 와이즈가 뛰어났다는 게 당대의 평가였습니다. 두 투수와 모두 호흡을 맞춰본 포수 맥카버도 당시 이 트레이드를 "정말 좋은 거래를 위한 정말 좋은 거래"라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이 트레이드는 세인트루이스 구단 역사상 최악의 트레이드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칼튼은 세인트루이스가 자신을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했다는 사실에 격분했고, 이는 그에게 엄청난 동기 부여가 됐죠. 칼튼은 그해 25승이라는 개인 목표를 세웠고, 봉인했던 슬라이더를 다시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덕분에 칼튼은 필라델피아 이적 첫 시즌이었던 1972년부터 27승 10패 346.1이닝 310탈삼진 ERA 1.97 WAR 12.1을 기록합니다.

 

칼튼의 1972년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한 투수가 '가장 압도적인 활약을 펼친 시즌'으로 꼽힙니다. 실제로 이해 칼튼은 다승(27)·탈삼진(310)·평균자책점(1.97) 부문 NL 1위를 차지하며 투수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고, 완투(30)와 이닝(346.1) 부문에서도 1위에 올랐습니다. 한편, WAR(승리기여도)에서도 <베이스볼레퍼런스> 기준 12.1승, <팬그래프> 기준 11.1승을 기록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활약한 모든 투수를 통틀어 가장 높은 기록입니다.

 

놀라운 점은 59승 97패(.395)를 기록한 필라델피아에서 이런 기록을 남겼다는 것이죠. 칼튼의 27승은 이해 필라델피아 구단이 거둔 전체 승리의 46%에 해당하는 수치로, 이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 기록입니다. 당연하게도 시즌 종료 후 칼튼은 만장일치로 NL 사이영상을 수상했죠. 칼튼은 자신의 성공 비결을 고된 훈련 덕분이라고 말했는데, 그중에는 드럼통에 쌀과 모래를 집어 넣고 손을 넣었다 빼는 걸 반복하는 동양 무술식 훈련도 있었습니다.

 

 

언론과 갈등을 빚다

스티브 칼튼 Ⓒ MLB.com

 

칼튼은 1973년 13승 20패 293.1이닝 223탈삼진 ERA 3.90으로 부진했습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1973년 칼튼의 부진은 적전해 너무 많은 이닝을 던진 여파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칼튼의 부진 이후 일부 언론은 그가 한 시즌 동안 반짝 활약을 펼친 선수가 아니었냐는 의문을 제기했죠. 게다가 그의 특이한 훈련 방식에 대한 의문 제기도 칼튼과 언론 사이에 악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로 인해 칼튼은 어느 순간부터 기자들과의 대화를 멈추게 됩니다.

 

칼튼의 침묵은 언론인 사이에서도 유명했는데요. 애틀랜타 해설위원 어니 존슨은 "내셔널리그 최고의 투수 두 명은 영어를 못 합니다.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멕시코 출신 다저스 레전드)와 스티브 칼튼이죠"라고 말했습니다. 훗날 칼튼은 "(언론과 대화하지 않은 건) 당시 제겐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꽤 많은 혹평을 받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자신을 혹평하는 기사를 읽는 것은 하루를 제대로 시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칼튼은 마운드에서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을 투수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습니다. 실제로 그의 훈련 방식은 마운드 위에서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방해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죠. 칼튼은 "몸은 신전이다"라는 철학을 믿는 트레이너 거스 호플링의 지도 아래 '명상', '동양 무술' 등의 독특한 훈련 방식을 도입했고, 1974년 16승 13패 291이닝 240탈삼진 ERA 3.22로 탈삼진 1위에 오르면서 반등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칼튼은 1976년 20승 7패 252.2이닝 195탈삼진 ERA 3.13을 기록하며 필라델피아를 26년 만에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1977년 23승 10패 283이닝 198탈삼진 ERA 2.64로 다승왕을 차지하고 필라델피아의 2년 연속 지구 1위를 견인하면서 커리어 두 번째 사이영상을 수상했습니다. 칼튼은 1978년에도 16승 13패 247.1이닝 161탈삼진 ERA 2.84이란 준수한 성적을 거뒀고, 필라델피아는 3년 연속 가을야구 무대를 밟으며 전성기를 보냅니다.

 

 

필라델피아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다

스티브 칼튼 Ⓒ MLB.com

 

하지만 필라델피아는 3년 연속 NLCS에서 신시내티와 다저스에 일방적으로 무릎을 꿇었고, 여기에는 같은 기간 포스트시즌 4경기에서 1승 2패 27.2이닝 20탈삼진 ERA 5.53에 그친 에이스 칼튼의 부진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칼튼은 1979년 18승 11패 251이닝 213탈삼진 ERA 3.62으로 평소보다 부진한 시즌을 보냈고, 필라델피아도 84승 78패(.519)로 NL 동부지구 4위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칼튼은 이듬해인 1980년 또 한 번의 역사적인 시즌을 보냅니다.

 

​칼튼은 1980년 24승 9패 304이닝 286탈삼진 ERA 2.34로 다승·이닝·탈삼진 부문 1위를 차지하며 필라델피아의 지구 1위 탈환을 이끌고, 커리어 세 번째 사이영상을 수상했습니다. 또한, 포스트시즌에서도 3승 무패 17.1이닝 23탈삼진 ERA 2.30으로 필라델피아의 창단 첫 월드시리즈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우며 가을야구에 약하다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한편, 칼튼의 304이닝은 메이저리그 투수가 한 시즌에 300이닝을 던진 마지막 기록이기도 합니다.

 

파업으로 단축된 1981시즌 칼튼은 13승 4패 190이닝 179탈삼진 ERA 2.42로 발렌수엘라와 시버에 이어 사이영상 투표 3위에 올랐고, 생애 첫 골드글러브를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1982년 23승 11패 295.2이닝 286탈삼진 ERA 3.10으로 다승·이닝·탈삼진 부문 1위에 오르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네 번째 사이영상을 수상합니다. 이듬해인 1983년에도 그는 15승 16패 283.2이닝 275탈삼진 ERA 3.11으로 이닝과 탈삼진 부문 1위에 오릅니다.

 

특히 그해 9월 23일엔 친정팀인 세인트루이스를 상대로 칼튼은 MLB 역사상 16번째 300승 고지를 밟았습니다. 또한, 1983년 6월 7일엔 통산 3,526번째 삼진을 잡아내며 놀란 라이언을 제치고 MLB 역대 탈삼진 1위에 등극하죠(훗날 라이언은 칼튼의 4,136탈삼진을 뛰어넘어 5,714탈삼진으로 역대 탈삼진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하지만 칼튼은 1984년 13승 7패 229이닝 163탈삼진 ERA 3.58을 기록한 것을 마지막으로 급격한 기량 하락을 겪습니다.

 


커리어 후반기 그리고 은퇴 후의 삶

스티브 칼튼 Ⓒ MLB.com

 

1985년 40세의 칼튼은 회전근개 염좌로 커리어 첫 부상자 명단에 오르면서 1승 8패 92이닝 48탈삼진 ERA 3.33에 머물렀고, 이듬해 6월 24일 필라델피아에서 방출됐습니다. 이후 칼튼은 샌프란시스코와 화이트삭스를 거치며 1986년을 9승 14패 ERA 5.10으로 마쳤고, 1987년에도 클리블랜드와 미네소타에서 6승 14패 ERA 5.74에 그쳤다습니다 그리고 1988년 4경기에서 1패 ERA 16.76을 기록한 것을 마지막으로 미네소타에서도 방출됐습니다.

 

이후에도 칼튼은 커리어를 이어가길 희망했지만, 아무도 황혼기를 지난 투수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양키스가 1989년 그에게 훈련 시설을 제공했으나, 스프링캠프 로스터에는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칼튼은 미네소타가 자신이 다른 팀과 계약을 맺지 못하도록 음모를 꾸몄다고 믿었는데요.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빅리그에서 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생각은 달랐죠.

 

 

칼튼은 1994년 첫 번째 투표에서 96%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오랫동안 언론과 소통을 단절했던 그는 즉시 기자회견을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무려 45분 동안 미국 대통령 중 8명이 반역죄를 저질렀고, 에이즈는 성소수자와 유색인종을 근절하기 위해 정부가 만들어낸 바이러스이며 시온 장로회와 유대계 은행가들이 비밀리에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등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쏟아내며 인터뷰에 참석한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후 칼튼은 다시 조용한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현재 그는 콜로라도주 더랑고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주 가끔씩 자선 골프 모임이나 필라델피아의 경기 전 시구에 참여하는 것을 제외하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인 2017년 ESPN의 로이 파이어스톤과 인터뷰에서 칼튼은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세상에 슬라이더를 던지는 법을 가르치려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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