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로의 영어와 야구 세계
이치로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것이 결정된 순간부터 기다려 온 장면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치로가 영어로 자신의 기념 연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치로는 2001년 시애틀 데뷔 후 공식적인 인터뷰에서 영어를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몇 차례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치로는 치밀한 준비로 꽤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을 연출하곤 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2003년 진행된 밥 코스타스와의 단독 인터뷰입니다. 미국 야구에 대한 느낌부터 킹콩과 고질라가 대결하면 누가 이길 것인지에 대한 소소한 질문까지, 메이저리그에서 돌풍을 일으키던 이치로의 다양한 생각을 듣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인터뷰가 유명해진 건 질문자 코스타스도 예상하지 못한 이치로의 돌출 발언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코스타스는 주요 질문을 모두 마친 뒤 분위기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이치로에게 가장 좋아하는 미국식 표현을 물었습니다. 코스타스는 그저 영어를 막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이나 미국에 처음 오는 사람들이 내놓는 흔한 답변을 예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질문을 접한 이치로는 갑자기 혼자 큭큭대며 웃음을 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그 유명한 답을 내놓았습니다. “8월의 캔자스시티는 양말 속에서 그 짓을 하는 두 마리의 생쥐보다 뜨겁다”.

상상을 초월한 이치로의 답변에 코스타스와 방송사 스태프들의 폭소가 터졌습니다. 나름 유머러스한 모습을 보이려던 이치로도 이 정도 반응에는 조금 당황한 듯했습니다. 이치로는 “그 표현을 알려준 제 동료가 좀 짓궂다”고 덧붙였습니다. 한참을 웃던 코스타스는 그 동료가 생각보다 더 나쁜 사람인 것 같다며, 그 표현은 미국에서 흔히 쓰는 표현이 아니라고 설명해 줬다고 합니다.
코스타스는 훗날 자신이 40년 넘게 방송인으로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로 바로 이때 이치로와의 인터뷰를 꼽았습니다. 엉뚱한 답변 자체도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이었지만, 사실 코스타스는 모든 질문에 이치로가 철학자처럼 심사숙고한 뒤 답하는 면모를 더 인상적으로 기억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치로가 실제 사용되는 표현을 잘못 듣고 옮겼다는 말도 있지만, 디테일을 떠나 이날 이치로의 인터뷰는 그의 독특한 이미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소재가 됐습니다. 이치로의 야구 경력에서 '레이저빔' 송구가 유독 남다른 입지를 갖는 것과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치로의 영어와 관련된 짧지만 강렬한 또 하나의 추억은 켄 그리피 주니어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피는 현역 생활 막바지인 2009년 시애틀로 돌아와 22년 빅리그 선수 경력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동경했던 이치로와 잠시나마 동료가 됐습니다. 2010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그리피는 2013년 시애틀 구단 명예의 전당 멤버가 됐습니다. 이때 이치로가 그리피에게 공식 축하 인사 영상을 영어로 남겼습니다.
이치로는 어릴 적 우상이던 그리피와 꿈꾸던 팀 동료가 되어 잊지 못할 시간을 보냈고, 그 기간이 길지는 않아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피가 뉴욕 양키스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알지만, 자신의 축하를 받아주길 바란다고 농담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2013년에 이치로는 양키스 소속이었기에, 축하 인사도 양키스 유니폼을 입은 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이치로는 야구 모자를 뒤집어쓰더니 ‘My, Oh My!’ 라고 외쳤습니다. 모자를 뒤집어쓴 것은 홈런 더비와 같은 행사에서 그리피가 보여준 상징적인 모습이고, ‘My, Oh My!’는 시애틀의 전설적인 캐스터인 데이브 니호스 씨의 유명한 어구입니다. 특히 시애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인 1995년 디비전 시리즈 끝내기 승리 때, 그리피가 결승 득점을 하는 순간 니호스가 외친 ‘My, Oh My!’가 가장 유명합니다. 자신의 학창 시절 기숙사 방에 그리피의 사진을 걸어두고 프로 선수의 꿈을 키우던 이치로였기에, 이 축하 영상은 유쾌하면서도 의미심장하고, 눈물이 고일 만큼 애틋했습니다.
공개된 영어 인터뷰 외에 클럽하우스 안에서는 이치로가 영어와 스페인어의 각종 속어를 동원해 동료들과 짓궂은 농담을 즐긴다는 증언이 숱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만큼 이치로의 명예의 전당 입성 연설은 기대할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지난달 열린 명예의 전당 입성 기자회견은 꽤 진중한 분위기에서 진행됐습니다. 그래도 이치로는 자신의 기질을 적정선에서 표출했습니다. 일본 오릭스와 메이저리그 시애틀에 이어, 명예의 전당 입성이 생애 세 번째 신인 경험이라고 말한 이치로는, 이제 51세나 됐으니 혹여 ‘루키 헤이징’을 하려면 부드럽게 부탁한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현역 시절 많은 기록을 세웠지만, 야구가 없었다면 자신은 바보나 멍청이로 불렸을 사람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 팀 동료들이 좀 나쁜 친구들이었죠? 밥 코스타스씨?”라는 말로 앞서 언급한 2003년 코스타스와의 일화를 되새겼습니다.
이치로는 3천 안타와 한 시즌 최다 262안타로 기자들의 인정을 받았는데, 단 한 명에게만 인정받지 못했다며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자신에게 표를 던지지 않은 기자를 유머의 소재로 삼았습니다. 해당 기자에게 저녁을 사겠다는 약속은 이제 파기됐다며 청중들의 웃음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매일 작은 요소를 놓치지 않고 집중한 결과 큰 기록을 쌓았다며, 자신이 항상 준비된 선수이길 바랐다고 했습니다. 늘 스프링캠프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릭 리즈의 샤우팅을 받을 수 있도록” 어깨도 준비된 상태였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레이저빔’ 송구 때 릭 리즈가 외친 말을 그대로 흉내 내 소리치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변곡점을 진지하게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치로는 일본에서 매년 타격왕을 차지하면서도 내면의 갈등이 극심했는데, 그때 노모 히데오를 보고 영감을 받아 자신도 미국 무대에 도전하게 됐다며 노모에게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이날 연설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어를 사용한 대목이었습니다. 시애틀과 뉴욕 양키스, 마이애미까지 자신이 거친 팀의 의미도 차근차근 짚었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꾸준한 모습의 팀 동료가 되길 원했다면서, 자신이 만난 팀 동료 중 가장 꾸준했던 사람을 자신의 아내 유미코 씨라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명예의 전당 입성 연설 2주 뒤, 이치로는 등번호 51번을 영구결번하는 시애틀 구단 행사에서 당분간 마지막이 될 영어 연설을 펼쳤습니다. 일방적으로 자신을 응원하는 관중들이 모인 자리인 만큼 격식은 줄이고 감정은 더 과감하게 드러냈습니다.
2주 만에 두 번의 영어 연설을 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도전이었다는 너스레로 시작한 이치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의 말을 인용해 연설을 시작하겠다고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빌어먹을 시애틀 선수인 게 자랑스럽다. (I am damn proud to be a Seattle mariner.)” 바로 켄 그리피 주니어가 명예의 전당 입성 연설에서 했던 말이었습니다.
51번을 영구결번하는 자리인 만큼, 자신보다 앞서 51번을 달았던 랜디 존슨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옛 동료들과 구단 관계자는 물론 자신의 통역으로 오래 함께 한 앨런 터너에게 각별한 인사도 잊지 않았습니다. 또, 명예의 전당에서 이미 선보였던 이른바 ‘레이저빔 샤우팅’을 릭 리즈 앞에서 다시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올해 시애틀이 정말 좋은 기회를 잡은 만큼, 압박을 이겨내고 승리를 따내라는 조언도 건넸습니다.
지난 2016년 ESPN의 방송인 토드 그리샴은 이치로의 영어 실력을 문제삼아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3천 안타가 인상적이긴 하지만 미국 생활 15년 동안 영어를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게 더 놀랍다”는 트윗을 남겨 이치로가 인터뷰에서 통역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조롱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치로가 인터뷰로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고, 중남미 선수들도 10년 넘게 통역으로만 인터뷰하는 경우가 있기에 그리샴의 의견은 그다지 공감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치로가 실제로 영어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언이 추가되면서 그리샴은 여러 매체로부터 공격받고 결국 사과까지 했습니다. (이후 그리샴은 트윗을 삭제했습니다.)
야구 선수의 영어 구사 능력 자체를 평가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이치로가 영어를 사용할 때마다 그의 완벽주의자다운 성격과 자신만의 유머 세계가 절묘하게 묻어나곤 했습니다. 여기에 항상 핵심까지 짚는 예리함을 덧붙여 말 그대로 청중들을 들었다 놨다 했습니다. 듣는 사람을 휘어잡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흔한 말로 재미와 의미를 모두 담았습니다. 이치로 개인에 대한 호불호야 있을 수 있지만, 야구 선수 이치로의 영어는 그의 세계를 엿보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도구였임이 분명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