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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 속 나의 영웅 ‘날쌘돌이’ 서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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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애국가 속 나의 영웅 날쌘돌이서정원
故 신인기 씨를 통해 돌아본 이라는 숭고한 직업에 대하여

 

 

 

 

19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TV 방송국은 24시간 송출 체제가 아니었습니다. 12시 전후로 정규 방송이 끝나면 어김없이 애국가가 흘러나온 뒤 정파(停波) 화면(테스트 패턴)으로 넘어갔습니다. 당시 애국가는 마치 이제 잘 시간입니다를 알려주는 알람 시계와도 같았습니다. ▲일출 장면, ▲무궁화에 몰려든 꿀벌의 모습, ▲하늘 높이 날아가는 기러기 떼, ▲나라를 지키는 국군 장병, ▲컨테이너를 가득 싣고가는 배,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모습, ▲태극기가 펄럭이는 영상 등은 애국가 영상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애국가 속 나의 영웅 날쌘돌이서정원

1990년대 중·후반 초등학생이었던 저는 늘 TV로 뉴스 말미의 내일의 날씨까지 확인한 뒤 애국가를 듣고 잠에 드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애국가 영상 속에는 살아온 인생이 10년도 채 되지 않았던 어린 제 가슴을 요동치게 한 어느 영웅의 모습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1994617 미국에서 열린 FIFA 월드컵(C) 스페인과의 첫 경기에서 2:2 동점 골을 터뜨린 날쌘돌이서정원 선수의 어퍼컷 세레머니 장면이었습니다.

 

ⓒ 애국가 영상에 등장한 서정원의 골 세레머니 장면

 

 

대부분 카메라를 의식한 세레머니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 위치는 우리 교민들이 많이 앉아 있던 곳이었습니다. 타지에서 우리 선수들을 응원하는 교민들에 대한 작은 보답이었던 것입니다. 이후로도 서정원은 원정 경기에서 골을 넣으면 늘 우리 응원단 앞에 가서 세레머니를 했습니다. 등번호 11의 흰색 국가대표 라피도 유니폼을 입고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린 뒤 오른손으로 어퍼컷을 하던 그 선수는 그렇게 저의 첫 번째 꿈이 되었습니다.

 

 

 

ⓒ 1994 미국 월드컵 스페인전에서 동점골을 기록하고 환호하는 서정원

 

 

초등학교 때 방과 후 친구들과 축구를 하면서도, 중학교 때 가족들 몰래 가입한 축구부에서도, 골을 넣으면 매번 그 세레머니를 흉내 내곤 했습니다. 비록 축구선수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훌륭한 사람이 되지도 못했지만) 축구를 하면서 배운 깨달음들은 제 삶의 귀중한 자산이 되어주었습니다.

 

 

 

ⓒ 1994 UPPER DECK WORLD CUP CONTENDERS #264 SEO JUNG-WON(BRG Authentic)

 

 

사실, 축구를 좋아만 했지, 축구선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본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주 잠깐, 내가 좋아하는 선수를 멀리서 응원하는 삶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이라는 한 글자 뒤에 숨고 나니 모든 게 편해졌던 것 같습니다. 제게 꿈의 도피처였던 셈입니다.

 

 

 

 

 

고개를 떨군 이탈리아의 축구영웅 로베르토 바조

한편 1994 FIFA 미국 월드컵브라질의 우승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는데, 우승국 브라질보다 결승전에서 승부차기를 실축한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로베르토 바조는 조별리그에서는 부상 여파로 부진했지만 16나이지리아전에서 2, 8스페인전에서 1, 준결승 불가리아전에서 2골을 기록했습니다. 이처럼 토너먼트에서만 5골을 넣으며 이탈리아를 결승까지 이끌었지만, 결승전 패배의 모든 화살은 승부차기의 마지막 키커였던 로베르토 바조에게 향했습니다.

 

 

 

 

 

 

고개를 떨군 로베르토 바조. 그 순간만큼은 그를 지지하는 팬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로베르토 바조선수 생활에 큰 미련은 없지만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승부차기는 다시 차고 싶다. 나는 거의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 1994 미국 월드컵 결승전(승부차기)에서 실축한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바조 ①

 

 

브라질이탈리아를 꺾고 24년 만에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는데, 펠레(Pele)가 은퇴한 이후 처음 이뤄낸 월드컵 우승이자 세계 최초 4번째 월드컵 우승이었습니다. 한편 4년 뒤 로베르토 바조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와의 8강전에서 0:0 무승부로 다시 한번 승부차기를 경험했습니다. 다행히 첫 번째 키커로 나서 골을 성공시켜 1994년 승부차기 실축을 설욕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안타깝게 패해 준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1997928.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국립경기장에서는 숙명의 맞대결 한일전이 열렸습니다. 일명 도쿄대첩이란 불린 19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 B3차전 경기였습니다. 당시 일본엔 귀화 선수인 로페스를 포함해 미우라, 나카타 등 핵심 멤버들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 1997년 한일전(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동점골을 기록한 서정원

 

 

후반 22야마구치에게 실점하며 0:1로 끌려가던 우리나라는 후반 38분과 41, 서정원이민성이 연속골을 기록하며 극적인 2:1 역전승을 거뒀습니다.

 

 

 

ⓒ 1997년 한일전에서 동점골을 넣은 후 환호하는 서정원

 

 

후반 38이기형이 오른쪽 코너킥 지점에서 길게 올린 크로스를 최용수가 헤딩으로 서정원에게 패스, 이 패스를 이어받은 서정원이 헤딩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한 것입니다. 이날 서정원이 헤딩으로 동점을 만든 골 장면 역시 애국가 영상에 들어갔습니다. 애국가 장면에 이나 등장할 정도로 극적인 골을 많이 기록한 서정원이었습니다.

 

ⓒ 애국가 영상에 등장한 서정원과 이민성

 

 

울트라 니폰(Ultra Nippon)’이라는 이름의 6만여 관중 앞에 섰던 11명의 태극전사들. 서정원이 침묵시키고, 이민성이 침몰시켰다는 그 경기. 당시 MBC 송재익 캐스터의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신문선 해설위원의 이민서어어어어엉 멘트는 28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축구팬들의 귓가를 맴돌고 있습니다.

 

 

 

ⓒ  <2017 한·일 축구 레전드 매치> 서정원 실착 유니폼(카드 읽어주는 남자, 프레임 : COLLEXX)

 

 

 

 

 

1998 프랑스 월드컵과 2002 ·일 월드컵 … 사라진 그의 이름

큰 경기에 더욱 강했던 서정원. 1998 프랑스 월드컵을 앞둔 우리나라 서정원이라는 이름의 세글자가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무엇보다 당시(1997-98 시즌) 서정원은 프랑스리그인 ‘RC 스트라스부르 알자스에서 뛰고 있었기 때문에 기대가 더 컸습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프랑스로 출국하기 전 수두에 걸린 아들을 안아주다 자신도 수두에 걸린 것입니다. 비행기에서 선수단과 따로 떨어져 앉는 것은 물론 숙소에서도 혼자 방을 써야 했습니다. 특히 수두는 땀을 흘리면 안 된다는 말에 훈련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경기에는 출전했으나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해 서정원다운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 1998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전에서 투혼을 발휘한 우리나라 선수들

 

 

 

서정원1999년 십자인대 수술을 받은 뒤에도 거스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아 두 차례 히딩크호에 승선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소속팀이었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 김호 감독의 항의로 히딩크와의 인연은 끝이 났습니다. 선발로 출전시키지 않으려면 왜 차출하느냐는 항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역사적인 첫 월드컵에 출전하고 싶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었겠지요? 하지만 서정원은 후배들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크게 상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훗날 히딩크 감독은 그의 자서전을 통해 최종 엔트리에 선발하지 못해 아쉬운 멤버를 언급했는데, 고종수, 박성배, 그리고 서정원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 오스트리아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간 서정원

 

 

한편 서정원의 이름은 2006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도 자주 거론됐습니다. 2005년 주변의 은퇴 권유를 뿌리치고 오스트리아 ‘SV 잘츠부르크‘SV 리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는데, 녹슬지 않은 기량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습니다. 서정원이 뛴 36경기 중 무려 25경기나 ‘Best 11’에 선정된 것입니다. 당시 36의 나이를 고려하면 서정원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어찌 이런 팬들 앞에서 나태해질 수 있겠는가

현역에서 물러난 서정원U-20·23 대표팀 코치,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수석코치·감독직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중국 슈퍼리그 청두 룽청의 지휘봉을 잡고 있습니다.

 

2016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 시절, 울산 현대와의 경기에서 역전패를 당한 후 팬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직접 버스에서 내려 수원 팬들에게 사과한 일화도 유명합니다. 버스에서 내린 서정원 감독은 정말 죄송하다. 선수들은 잘못이 없다. 잘못이 있다면 모두 나의 책임이다며 팬들 앞에서 고개 숙여 사과했습니다. 팬들은 실수가 반복되는 이유, 후반기의 구체적인 목표 등을 캐물었고, 서정원 감독은 차근차근 이에 답했습니다. 서정원 감독은 반드시 반등하겠다, 믿어 달라,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으로 팬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렇게 약 30분이 흐른 뒤에야 버스는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 시절 서정원

 

 

사실 팬들에게 그렇게까지 해명하는 감독은 없습니다. 그만큼 서정원 감독은 자신이 지휘하는 팀과 선수도 소중하지만, 그 팀을 사랑해주는 팬들 역시 소중했던 것입니다. 팬들의 도가 지나쳤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서정원 감독은 축구를,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너무 사랑하기에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긴 것입니다. 서정원 감독의 약속을 받아낸 팬들은 떠나는 선수단에게 응원가로 다시 힘을 북돋아 줬다고 합니다. 각성한 수원 삼성 블루윙즈는 그해 FA컵 결승전에서 FC 서울을 만나 승부차기 끝에 10:9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서정원 감독이 부임한 후 처음으로 팀에 우승 트로피를 안겨준 순간이었습니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홈구장인 수원월드컵경기장은 새가 날개를 펼친 모양의 디자인으로 인해 빅버드(Big Bird)’라는 애칭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6년 재단장한 빅버드의 홈팀 응원석 2층 난간엔 한동안 서정원 감독의 명언이 걸려 있었습니다.

 

어찌 이런 팬들 앞에서 나태해질 수 있겠는가”   - 서정원

 

 

 

 

흐릿하지만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사진

은 누구나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분명 서정원의 팬이었지만, 감히 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부끄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꿈의 도피처로만 여긴 나도 과연 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199512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창단한 후 수원 명예 사진기자 모임인 블루포토의 창단을 주도하며, 팀의 각종 행사와 국내외 경기에 늘 동행했던 故 신인기 씨의 스토리를 접하고 나서였습니다.

 

 

 ⓒ 故 신인기 씨의 생전 모습

 

 

신인기 씨는 처음엔 박건하 선수를 좋아했는데, 그의 발자취를 남기려다 보니 어느새 구단 모든 선수들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는데, 기꺼이 그 일을 자신의 사명처럼 받아들였습니다. 심지어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도 빅버드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200996 빅버드에서 열린 수원 삼성 블루윙즈강원 FC’의 경기. 악화된 병세에도 그는 경기장을 찾았고, 구단은 경기 시작 전 쾌유를 비는 영상을 전광판에 띄우기도 했습니다. 2:3으로 끌려가던 경기. 마침내 후반전 44에두(Edú)가 동점골을 터뜨렸습니다.

 

 

 

 ⓒ 강원 FC와의 경기에서 동점골을 기록한 후 신인기 씨를 위한 세레머니를 하는 에두

 

 

에두는 코너 플래그 쪽에 있던 신인기 씨에게 달려갔고, 그렇게 악수를 하며 쾌유를 비는 세레머니를 했습니다. 신인기 씨는 휠체어를 타고 링거를 맞아가면서도 끝내 카메라를 놓지 않았습니다.

 

 

 

ⓒ 故 신인기 씨가 직접 찍은 에두의 세레머니 사진

 

 

힘이 없어 떨리는 손으로 셔터를 누른 탓에 초점이 흔들려 피사체인 에두의 사진 속 모습은 다소 흐릿했습니다. 하지만 축구팬들에겐 그 어떤 사진보다 따뜻하고 선명한 사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당시 동점골을 기록한 에두는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경기하는 날에는 항상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전지훈련을 할 때에도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몸이 많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럼에도 우리를 찍기 위해 경기장에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그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첫 번째 골을 넣었을 때도 그를 찾았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두 번째 골을 넣고 그에게 달려갔던 것이다.”

 

 

 

경기가 끝난 후 선수단과 단체 사진을 찍은 신인기 씨는 몸이 허락하는 한 수원의 경기를 한 경기라도 더 찍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 故 신인기 씨가 찍은 수원 삼성 블루윙스 선수단 앨범 2권(카드 읽어주는 남자)

 

 

 

신인기 씨는 생전에 수원을 주제로 한 사진전을 열고 싶다고 말했는데, 구단과 팬들이 이 사실을 알고 수원 성빈센트병원에서 사진 전시회를 열어주었습니다.

 

 

ⓒ 신인기 사진전시회 <2009.9.21.~10.5.> 장면(blog.naver.com/howmany70)

 

 

사진전을 마친 후 그는 제 생의 가장 행복한 날을 빅버드에서 보냈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뒤 그해 106, 43세의 나이로 한 마리 새가 되어 파란 날개를 달고 하늘로 떠났습니다.

 

 

 

 

이라는 숭고한 직업에 대하여

故 신인기 씨는 진정한 팬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졌습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직업일 수도 있습니다대가 없이 헌신하고, 좌절 속에서도 그 곁을 지켜주며, 타인의 꿈을 자신의 꿈처럼 응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1994 미국 월드컵 결승전(승부차기)에서 실축한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바조 ②

 

 

다행히 팬이 되기 위한 자격 같은 건 없습니다. 스포츠 스타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응원의 대상이 가족 혹은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열렬히, 그리고 기꺼이 응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누군가의 팬일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팬이 되어준다면, 언젠가는 로베르토 바조 같은 선수가 또 승부차기를 실축하더라도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 선수를 격려하고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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