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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의 영원한 에이스, 짐 파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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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파머 Ⓒ MLB.com

 

짐 파머는 1970년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 중 한 명이자,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입니다. 파머는 1965년부터 1984년까지 20시즌 동안 볼티모어에서만 활약하며 통산 268승 152패 3,948이닝 2,212탈삼진 ERA 2.86을 기록했고, 올스타 6회, 사이영상 3회, 골드글러브 4회, 다승왕 3회, 방어율왕 2회, 월드시리즈 우승 3회를 차지했는데요. 파머의 268승은 지금까지도 볼티모어 구단 역사상 최다승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파머의 시대에 볼티모어는 포스트시즌에 8번 진출했고, 6번의 아메리칸리그 우승과 3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보냈습니다. 파머는 잦은 부상에 시달리면서도 8번의 20승 시즌을 기록할 정도로 꾸준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또한, 1970년대 기준으로 최다승(186)과 최저 평균자책점(2.58)을 기록한 투수이기도 하죠. 특히 1973년부터 1976년까지 4시즌 동안 3차례나 사이영 상을 수상할 정도로 압도적인 전성기를 보냈습니다. 

 


제임스 앨빈 위즌에서, 짐 파머로

짐 파머 Ⓒ MLB.com

 

짐 파머의 본명은 '제임스 앨빈 위즌(James Alvin Wiesen)'으로, 1945년 10월 15일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난 후 이틀 만에 의류 사업가 모 위즌과 그의 아내 폴리 부부에게 입양됐습니다. 비슷한 시기 짐의 누나인 보니도 위즌 부부에게 입양됐고, 그들은 뉴욕 파크 애비뉴의 저택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1955년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양어머니 폴리는 곧 두 아이와 함께 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로 이사했는데요. 그때 짐의 나이는 9살이었습니다.

 

폴리는 이듬해인 1956년 배우 맥스 파머와 결혼했지만, 짐은 한동안 위즌이라는 성으로 불리길 원했다고 전해지는데요. 하지만 새아버지 맥스는 짐과 그의 누나 보니를 사랑으로 품었죠.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던 짐은 리틀 리그에서 뛰었는데, 연말 시상식에서 우수상을 받기 직전 코치들에게 자신을 '제임스 앨빈 파머'라고 호명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훗날 맥스는 "그날 밤은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파머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그의 가족은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로 이사했습니다. 파머는 스코츠데일 고교에서 야구, 농구, 미식축구를 섭렵했고, 모든 종목에서 올스테이트(All State, 주 대표팀)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또한, 졸업 평균 학점이 3.4일 정도로 우등생이었는데요. 파머는 고교 졸업 후 UCLA, USC, 스탠퍼드를 비롯한 여러 명문대로부터 장학금 제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파머의 선택은 집에서 가까운 애리조나 주립대(ASU)였죠.

 

당시 ASU의 감독은 바비 윙클스로, 훗날 대학리그(NCAA) 우승을 세 차례나 이끈 후 메이저리그 팀의 감독으로 영전했을 정도로 유능한 지도자였습니다. 윙클스는 파머에게 대학 여름 야구에서 더 많은 경험을 쌓으라고 조언했고, 파머는 1963년 사우스다코다주의 위너 패샌츠에서 뛰며 여름을 보냈습니다. 팀은 리그 결승전에서 패했지만 파머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스카우트 총괄 해리 달튼에게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이른 성공 후 찾아온 위기

짐 파머 Ⓒ MLB.com

 

파머는 여름 리그가 끝난 직후 볼티모어와 5만 달러에 계약을 맺습니다. 훗날 파머의 회고에 따르면 여름 리그 종료 후 그에게 영입 제안을 한 구단은 무려 13팀에 달했지만, 볼티모어의 스카우트인 짐 루소와 짐 윌슨이 예의 바른 태도로 그의 부모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점이 계약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파머는 입단 첫해인 1964년 볼티모어 산하 싱글 A 구단인 애버딘에서 11승 3패 129이닝 107탈삼진 ERA 2.51을 기록했는데요.

 

그러자 볼티모어는 1965년 만 19세에 불과했던 그를 전격적으로 메이저리그에 콜업했고, 파머는 1965년 4월 18일 보스턴 전에서 빅리그에 데뷔합니다. 데뷔 시즌 그는 주로 임시 선발 또는 롱릴리버로 기용되면서 27경기(6선발) 5승 4패 92이닝 75탈삼진 ERA 3.72를 기록했는데요. 이듬해인 1966년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한 파머는 만 20세의 나이에 30경기 15승 10패 208.1이닝 147탈삼진 ERA 3.46이란 인상적인 성적을 남깁니다.

 

파머는 1966년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 9이닝 4피안타 6K 무실점으로 월드시리즈에서 완봉승을 거둔 최연소 투수(만 20세 11개월)가 됐고, 볼티모어는 디펜딩 챔피언 다저스를 4연승으로 꺾고 창단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파머는 등판일 아침에 항상 팬케이크를 먹는 습관 때문에 '케이크'라는 별명도 얻었는데요. 하지만 빠르게 스타덤에 오르는 듯했던 파머에게 이듬해 선수 생명의 최대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훗날 회고에 따르면 파머는 1966년 볼티모어에 있는 새 집에서 페인트칠을 하다가 팔을 다쳤습니다. 코르티손(통증 완화 주사)를 맞아가며 어떻게든 정규 시즌을 완주했지만, 월드시리즈 즈음에는 팔을 들기조차 힘들 정도로 통증이 악화됐죠. 파머는 1967시즌을 순조롭게 출발했지만 5월 13일 양키스전에서 9이닝 1피안타 완봉승을 따낸 후 다음 등판에서 1이닝 동안 4피안타 3실점을 허용했고 곧바로 마이너리그로 강등됩니다.

 

 

기적이 일어나다

짐 파머 Ⓒ MLB.com

 

파머는 마이너리그에서 7경기를 소화한 후 9월 메이저리그로 복귀해 두 번의 선발 등판을 했지만 몸 상태는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구단 의료진에 따르면 파머의 부상은 처음엔 이두근 염증에서 시작됐지만, 팔을 너무 많이 사용하다 보니 어깨 회전근개 파열로 이어진 것이었죠. 그의 부상이 어느 정도였냐면 향후 전망이 너무 암울해서 야구를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타자 전향을 하는 것까지 고려할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파머는 이듬해인 1968년 메이저리그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습니다. 마이너리그에선 10경기에 등판했지만, 승 없이 2패 37이닝 36볼넷 37탈삼진 ERA 438에 그쳤는데요. 결국 파머는 1968년 9월에 DFA(방출 대기) 처분을 받았고, 신생팀 시애틀과 신시내티의 합류로 열린 확장 드래프트에서도 보호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어떤 팀으로부터도 지명받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파머의 선수 생활이 끝났다고 여겼습니다.

 

1968시즌 종료 후 볼티모어 투수 코치였던 조지 뱀버거는 파머에게 마지막으로 푸에르토리코 윈터리그에서 뛰어보길 권했는데요. 그런데 프랭크 로빈슨 감독이 이끄는 푸에르토리코의 샌터스 크래버스에서 투수로 뛰면서 파머의 통증은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졌고, 패스트볼은 다시 시속 95마일(약 153km) 대를 회복했습니다. 이에 대해 파머는 "제 생각에는 기적이었습니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받은 기분이었죠"라고 회고했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파머는 1969년 16승 4패 181이닝 123탈삼진 ERA 2.34의 성적으로 재기에 성공합니다. 그는 약 6주간 부상자 명단에 등재됐지만, 팔이 아닌 허리를 다쳐서였죠. 그리고 같은 해 8월 13일, 파머는 부상자 명단에서 복귀한지 불과 4일 만에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노히터(no-hitter)를 작성하는데요. 이는 그의 커리어에서 유일한 노히터였습니다. 한편 승률 0.800에선 아메리칸리그 1위, 평균자책점과 완봉승(6번)에선 2위를 차지합니다.

 

 

삼각편대의 막내에서, 볼티모어의 에이스로

짐 파머 Ⓒ MLB.com

 

 

파머는 1970년부터 1978년까지 9시즌 동안 20승 이상을 8번, 사이영 상을 3번이나 수상하는 대투수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까지 파머는 팀 선배인 데이브 맥널리와 마이크 쿠엘라에게 가려져 3번째 선발 투수로 여겨졌는데요. 실제로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맥널리는 65승, 쿠엘라는 67승, 파머는 56승을 기록했고, 파머는 세 시즌 모두 포스트시즌에서 맥널리와 쿠엘라에 이어 3번째 경기에 등판했습니다.

 

이 시기 볼티모어의 선발진은 역대 최강의 선발진 중 하나로 꼽힌다. 1970년 맥널리는 24승 9패 296이닝 185탈삼진 ERA 3.22, 쿠엘라는 24승 8패 297.2이닝 190탈삼진 ERA 3.48, 파머는 20승 10패 305이닝 199탈삼진 ERA 2.71을 기록했는데요. 볼티모어는 강력한 선발진을 앞세워 108승 54패로 AL 동부지구 1위에 올랐고 ALCS와 월드시리즈에서 각각 미네소타(3승)와 신시내티(4승1패)를 연파하며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립니다.

 

이듬해인 1971년 맥널리는 21승 5패 224.1이닝 91탈삼진 ERA 2.89, 쿠엘라는 20승 9패 292.1이닝 124탈삼진 ERA 3.08, 파머는 20승 9패 282이닝 184탈삼진 ERA 2.68을 기록했고, 팻 도브슨이 새롭게 합류해 20승 8패 282.1이닝 187탈삼진 ERA 2.90을 기록했습니다. MLB 역사상 20승 투수를 4명 배출한 팀은 1920년 화이트삭스와 1971년 볼티모어뿐입니다. 하지만 이해 볼티모어는 월드시리즈에서 피츠버그에 3승 4패로 패했습니다.

 

파머가 볼티모어의 확고부동한 에이스로 올라선 것은 1972시즌부터였는데요. 1972년 맥널리, 쿠엘라, 도브슨이 모두 하락세를 보이며 볼티모어는 80승 74패로 동부지구 3위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파머는 21승 10패 274.1이닝 184탈삼진 ERA 2.07으로 한층 더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팀을 지탱했죠. 그리고 1973년 22승 9패 296.1이닝 158탈삼진 ERA 2.40으로 평균자책점 부문 1위에 오르며 생애 첫 사이영 상을 수상합니다.

 

 

경기장 밖에서도 완벽한 엄.친.아

짐 파머 Ⓒ MLB.com

 

그러나 파머의 성공은 1974년 스프링 트레이닝 도중 팔에 문제가 생기면서 잠시 중단됩니다. 이해 파머는 5월 4일부터 6월 7일까지 7경기 연속 패배 후 팔꿈치 척골 신경(ulnar nerve) 손상 진단을 받았는데요. 처음에는 수술까지 고려했지만, 다행히도 정형외과 전문의 로버트 컬런로부터 냉온수 치료와 약물 치료를 받으면서 팔꿈치 통증이 완화된 파머는 두 달 후 복귀해 7승 12패 178.2이닝 84탈삼진 ERA 3.27로 시즌을 마쳤습니다.

 

건강하게 돌아온 파머는 1975년 23승 11패 323이닝 193탈삼진 ERA 2.09으로 다승, 평균자책점, 완봉승(10번) 부문 1위에 오르며 커리어 두 번째 사이영 상을 수상합니다. 그리고 1976년 22승 13패 315이닝 159탈삼진 ERA 2.51으로 다승과 이닝 부문 1위를 차지하고 2년 연속이자, 세 번째 사이영 상을 수상하면서 최전성기를 보냅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아메리칸리그에서 사이영 상을 세 차례 수상한 투수는 파머가 처음이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1977년 20승 11패 319이닝 193탈삼진 ERA 2.91을, 1978년 21승 12패 296이닝 138탈삼진 ERA 2.46을 기록하는 꾸준한 활약을 펼칩니다. 한편, 야구계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일 뿐만 아니라, 수려한 외모까지 갖춘 파머는 경기장 밖에서도 화제를 모았는데요. 파머는 유명 남성용 언더웨어 브랜드의 대표 모델로 활동하며 신문과 TV 광고는 물론 뉴욕 타임스퀘어 등 유명 거리에 사진이 걸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파머는 그렇게 번 모델료 및 판매 수익금 전액을 희귀 유전 질환인 낭포성 섬유증(Cystic Fibrosis) 재단에 기부했습니다. 파머는 1979년 팔꿈치 통증으로 두 차례나 부상자 명단에 오르면서 10승 6패 155.2이닝 67탈삼진 ERA 3.30에 그쳤고, 1980년에도 16승 10패 224이닝 109탈삼진 ERA 3.98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볼티모어의 에이스는 아닐지라도 젊은 투수들에게 존경받는 리더로서 팀을 이끌었습니다.

 


얼 위버와의 '애증 관계'

얼 위버(좌)와 짐 파머(우) Ⓒ MLB.com

 

파머는 파업으로 단축된 1981년 7승 8패 127.1이닝 35탈삼진 ERA 3.75에 그쳤습니다. 그리고 1982년에도 첫 5번의 등판에서도 1승 1패 ERA 6.84에 머물자, 볼티모어의 단장 행크 피터스는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공개적으로 "파머는 절대, 절대, 절대 볼티모어 유니폼을 입고 다시 선발 등판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볼티모어의 감독인 얼 위버의 생각은 달랐는데요. 위버는 파머가 상황을 반전시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파머와 위버는 그야말로 '애증의 관계'였습니다. 위버는 1968년 볼티모어의 1루 코치로 부임했고, 후반기부터 행크 바우어의 뒤를 이어 감독이 됐습니다. 파머는 이듬해 부상에서 복귀했고, 이후 둘은 14년간 볼티모어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했죠. 파머와 위버는 투구, 수비 시프트, 번트 여부 등을 놓고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의견 충돌을 빚었습니다. 하지만 둘과 함께 한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잘 맞는 짝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위버는 선수 생활 내내 부상에 시달렸던 파머에 대해 "동양인들이 '말띠의 해', 용띠의 해'로 구분한다면 나는 '팔꿈치의 해', '어깨의 해'로 기억한다"라고 비꼬았습니다. 파머도 "위버에게 많은 걸 배웠습니다. 가장 먼저 배운 건 그가 투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겁니다"라고 맞섰습니다. 하지만 파머는 "위버는 (나중에 그들을 미치게 만들지 몰라도) 좋은 투수를 알아보고 끝까지 믿어주는 재능이 있었다"라고 인정했습니다.

 

위버 역시 누구보다도 파머의 능력을 믿었죠. 위버는 1979년 구단과 연봉 협상에서 공개적으로 갈등을 빚은 파머의 라커에 "아버지의 날 축하합니다. 제발 이제 철 좀 드세요"라고 적힌 메모를 붙였습니다. 하지만 그해 ALCS 1차전에서 사이 영 상을 수상한 마이크 플래너건이 아닌, 부진했던 파머를 선발로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해당 경기에서 놀란 라이언과 맞붙은 파머는 9이닝 3실점으로 호투를 펼치며 팀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커리어 말년과 은퇴 후의 삶

짐 파머 Ⓒ MLB.com

 

1982년 위버는 파머를 잠시 불펜으로 이동시켰지만, 6월에 다시 선발진에 포함시켰습니다. 파머는 선발진 복귀 후 11연승을 포함해 6월부터 9월까지 24경기에서 13승 1패 ERA 2.24로 감독의 믿음에 부응하는 활약을 펼쳤습니다. 결국 파머는 1982시즌을 15승 5패 227이닝 103탈삼진 ERA 3.13으로 마칩니다. 하지만 1982년을 끝으로 '명장' 위버가 팀을 떠났고, 파머는 1983년 5승 4패 76.2이닝 34탈삼진 ERA 4.23에 그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 립켄 주니어가 이끄는 볼티모어는 98승 64패로 AL 동부지구 1위에 올랐고 챔피언십시리즈에서 화이트삭스(3승 1패), 월드시리즈에서 필라델피아(4승 1패)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는데요. 파머는 1983년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구원 등판해 2이닝 무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됐습니다. 이는 파머가 메이저리그에서 거둔 마지막 승리이기도 했죠. 이듬해인 1984년 5경기 3패 ERA 9.17에 그친 후 은퇴했기 때문입니다.

 

파머는 1990년 첫 번째 투표에서 92.6%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그의 등번호 22번은 1985년 볼티모어로부터 영구결번으로 지정됐습니다. 달변인 파머는 현역 선수로 활동하는 동안에도 여러 포스트시즌 경기와 1981년 월드시리즈를 중계했고, 은퇴 후 본격적으로 의 해설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1989년부터는 볼티모어의 지역 케이블 TV의 해설 위원을 맡아 지금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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