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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버그의 별, 윌리 스타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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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 스타젤 Ⓒ MLB.com

 

윌리 스타젤은 1960~70년대를 대표하는 거포 중 한 명이자,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프랜차이즈 스타입니다. 스타젤은 1962년부터 1982년까지 21시즌 동안 피츠버그에서만 활약하며 통산 2,360경기 2,232안타 475홈런 1,540타점 17도루 타율 0.282 출루율 0.360 OPS 0.889 WAR 57.6을 기록했고, 올스타 7회, 내셔널리그 MVP 1회, 홈런왕 2회, 타점왕 1회, 월드시리즈 우승 2회, 월드시리즈 MVP 1회 등 위대한 업적을 여럿 달성했습니다.

 

그는 1970년대에 통틀어 가장 많은 홈런(296개)를 때려낸 선수이자, 뛰어난 리더십을 갖춘 선수기도 했는데요. 실력과 인망을 모두 갖춘 스타젤은 팀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피츠버그를 지구 우승 6회, 리그 우승 2회, 월드시리즈 우승 2회(1971, 1979년)로 이끌었죠. 그래서 붙은 별명이 '팝스(Pops, 아빠)'입니다. 또한, 스타젤은 팬 서비스와 선행으로도 이름이 높았고, 이를 바탕으로 1974년 로베르토 클레멘테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미완의 원석

윌리 스타젤 Ⓒ MLB.com

 

윌리 스타젤의 본명은 '윌버 도넬 스타젤(Wilver Dornell Stargell)'로 1940년 3월 6일 미국 오클라호마주 얼스버러의 작은 마을에서 윌리엄과 글래디스 스타젤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모님이 이혼한 후 한동안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사는 이모의 돌봄을 받았고, 1946년경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외곽의 알라메다로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어린 시절 스타젤이 가장 사랑한 스포츠 종목은 당연하게도 야구였습니다.

 

엔시널 고교 재학 시절, 스타젤은 야구 팀과 미식축구 팀에서 활약했는데요. 이 시기 스타젤의 야구 팀 동료 중에는 훗날 메이저리그 선수가 되는 토미 하퍼와 커트 모튼도 있었습니다. 이 둘에 비하면 스타젤은 몸집이 크고 뼈가 굵지만 아직 덜 다듬어진 선수였을 뿐이었죠. 하지만 피츠버그의 전설적인 스카우트 밥 주크는 그의 투박한 실력 속에서도 잠재력을 발견하고 1958년 8월, 계약금 1,500달러에 스타젤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듬해인 1959년, 피츠버그는 스타젤을 뉴멕시코주 로즈웰과 텍사스주 샌안젤로의 D 레벨 팀으로 배정했는데요. 이 지역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겐 매우 혹독한 환경이었습니다. 원정 경기를 하는 동안 스타젤은 백인 선수들과 같은 숙소에 머물 수 없었고, 유색인종 거주 지역에 있는 전용 숙소에서 지냈죠. 또한, 백인 선수들이 식당에서 편안하게 식사를 하는 동안 스타젤은 직접 만든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버스에서 기다렸습니다.

 

이 시기 스타젤의 삶과 커리어에 큰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텍사스 주 플레인뷰를 방문했을 때, 야구장으로 걸어가던 스타젤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머리에 총을 겨누면서 "오늘 밤 경기에 출전하면 네 머리를 날려버리겠다"라는 협박을 했습니다. 스타젤은 겁에 질렸지만, 용기를 내서 경기에 나섰죠. 다행히 그 이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훗날 스타젤은 이 시건을 통해 성공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생겼다고 회고했습니다.

 

 
고난의 커리어 초기
윌리 스타젤 Ⓒ MLB.com

 

스타젤은 편견을 극복하고 마이너리그를 빠르게 통과한 후 1962년 9월 16일, 만 22세의 나이로 피츠버그에 데뷔해 10경기에서 타율 0.290 0홈런 4타점 OPS 0.805를 기록했습니다. 실질적인 신인 시즌인 1963년에는 108경기에서 타율 0.243 11홈런 47타점 OPS 0.717으로 부진했지만, 풀타임 첫해였던 1964년 144경기에서 타율 0.273 21홈런 78타점 OPS 0.805를 기록하며 개인 통산 첫 올스타에 선정되는 영광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빅리그 3년 차인 1965년 타율 0.272 27홈런 107타점 OPS 0.829로 커리어 첫 100타점을 돌파한 후 1966년 타율 0.315 33홈런 102타점 OPS 0.962를 기록하는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는데요. 하지만 스타젤이 컨디셔닝 문제를 겪으면서 1967년 스프링캠프에 235파운드(107kg)의 체중으로 나타나자, 피츠버그의 조 L. 브라운 단장은 그에게 벌금을 부과한 후 목표 체중을 215파운드(98kg)로 정하고 다이어트를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다이어트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했죠. 스타젤은 급격한 체중 감소로 인해 5월 말까지 타율 0.193에 그치는 부진을 겪었고, 134경기 타율 0.271 20홈런 73타점 OPS 0.831이라는 전년도 대비 크게 하락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칩니다. 이러한 참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피츠버그는 스타젤에게 시즌 종료 후 개인 트레이너와 함께 훈련하도록 지시했고, 그는 1968년 생애 최고의 몸 상태로 스프링캠프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번에는 신임 감독 래리 셰퍼드가 그를 향해 너무 근육질이라고 비판했다는 겁니다. 스타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타율 0.237 24홈런 67타점 OPS 0.757을 기록합니다. 물론 그의 경기력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는데요 강하고 정확한 어깨를 가졌고 최선을 다했지만, 고교 시절 미식축구를 하다가 심각한 부상을 당한 후 무릎이 약해져서 넓은 포브스 필드의 외야에서 충분한 범위를 커버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1970년대 최고의 거포로 거듭나다

피츠버그의 옛 홈구장 포브스 필드 Ⓒ MLB.com

 

한편, 경력 초기에 스타젤은 좌완 투수에게 속수무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1969년을 기점으로 몇 가지 변화를 통해 그는 '적당히 훌륭한 선수'에서 1970년대 최고의 거포로 거듭날 수 있었는데요. 먼저 1968년 타율 0.237으로 부진한 시즌을 보낸 스타젤은 팀 선배인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조언을 받아들여 배트를 더 무거운 38온스(약 1.1kg)로 바꿨습니다. 팀 동료 넬리 브라일스는 "갑자기 스윙의 빈틈이 사라졌다"라고 회상했습니다.

 

한편, 대니 머토 감독를 다시 영입한 것도 스타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줬습니다. 스타젤은 자신의 몸무게를 쉴 새 없이 질타하던 전임 감독인 해리 워커나 래리 셰퍼드와는 궁합이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첫 감독이었단 머토는 달랐는데요. 훗날 스타젤은 "머토 가독님이 1964시즌 후 건강 문제로 사임했을 때, 저는 누군가를 잃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자신감을 되찾기 위해 그의 존재가 필요했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변화는 소속팀 피츠버그가 '타자들의 무덤'이라 불리던 포브스 필드에서 벗어나 홈구장을 쓰리 리버스 스타디움으로 이전한 것이었죠. 포브스 필드는 홈플레이트에서 중앙 펜스까지 457피트(139m), 좌·우중간 펜스까지 406피트(124m), 좌·우측 폴대까지 365-375피트(111~114m)에 달하는 매머드급 구장이었습니다(참고로 KBO 리그의 홈구장 중 가장 큰 잠실 야구장의 중앙 펜스까지 거리가 125m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전문가는 스타젤이 선수 생활을 포브스 필드가 아닌 다른 곳에서 했더라면 통산 600홈런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라고 평했는데요. 물론 1970년 개장한 피츠버그의 홈구장 쓰리 리버스 스타디움 역시 홈 플레이트부터의 거리가 중앙 펜스 400피트(122m), 좌·우중간 펜스 375피트(114m), 좌·우 폴대 335피트(102m)로 꽤나 투수 친화적인 환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광활한 옛 홈구장(포브스 필드)에 비할 바는 아니었죠.

 


피츠버그의 쌍포

로베르토 클레멘테와 윌리 스타젤 Ⓒ MLB.com

 

1969년 38온스(약 1.1kg)로 배트 무게를 늘린 스타젤은 타율 0.307 29홈런 92타점 OPS 0.938로 반등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 타율 0.264 31홈런 85타점 OPS 0.839으로 적응기를 거친 스타젤은 새 홈구장인 <스리 리버스 스타디움>에서의 첫 풀 시즌인 1971년 타율 0.295 48홈런 125타점 OPS 1.026으로 커리어 첫 홈런왕과 함께 타점·장타율·OPS 부문 리그 2위를 차지하며 내셔널리그 MVP 투표 2위에 오릅니다.

 

스타젤의 활약에 힘입어 소속팀 피츠버그도 1971년 NL 동부지구 1위를 차지하며 가을야구 무대를 밟았는데요. 비록 스타젤은 포스트시즌에서 타율 0.132 0홈런 1타점으로 부진했지만, 팀 선배인 로베르토 클레멘테가 월드시리즈에서 타율 0.414 2홈런 4타점 OPS 1.210으로 맹활약을 펼치면서 피츠버그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4승 3패로 꺾고 1960시즌 이후 11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뛰어난 장타력으로 리그를 지배했는데요. 스타젤은 1972년 타율 0.293 33홈런 112타점 OPS 0.930으로 내셔널리그 MVP 투표에서 3위에 올랐고, 1973년 타율 0.299 44홈런 119타점 OPS 1.038로 홈런(44)·타점(119)·2루타(43)·장타율(.646)·OPS(1.038) 부문 리그 1위를 차지하며 피트 로즈에 이어 MVP 투표 2위에 오릅니다. 한 시즌에 홈런과 2루타를 각각 40개 이상 때려낸 타자는 1940년 행크 그린버그 이후 처음이었죠.

 

스타젤은 1974년에도 타율 0.301 25홈런 96타점 OPS 0.944로 통산 3번째이자 마지막 3할 타율 달성과 함께 2년 연속 OPS(출루율+장타율) 부문에서 메이저리그 전체 1위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풀타임 1루수로 전향한 1975년 만 35세의 나이에 갈비뼈가 부러져 124경기 출전에 그쳤음에도 불구하고 타율 0.295 22홈런 90타점 OPS 0.891으로 여전한 타격 생산력을 뽐내며 내셔널리그 MVP 투표 7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기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지배력

윌리 스타젤 Ⓒ MLB.com

 

스타젤은 기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지배력'을 지닌 타자였습니다. 6피트 3인치(191cm), 225파운드(102kg)라는 위풍당당한 체격의 스타젤은 대기 타석에서 배트가 아닌 쇠망치를 휘두르며 몸을 풀었고,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특유의 위압감을 뽐냈습니다. 한편, 엄청난 배트 스피드를 바탕으로 터무니없는 비거리를 만들어냈죠. 실제로 포브스 필드 개장 후 61년간 86피트 높이의 우측 지붕을 넘긴 홈런은 단 18개에 불과했는데요.

 

그중 7개는 스타젤이 넘긴 홈런이었습니다. 다저스타디움의 장외 홈런 4개 가운데 2개도 스타젤이 만들어냈죠. 1978년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홈구장인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비거리 535피트(약 163m) 짜리 홈런을 터뜨렸고, 엑스포스는 공이 떨어진 좌석을 금색으로 칠하며 이를 기념했습니다. 이런 스타젤의 파워에 대해 다저스의 돈 서튼은 "그는 단순히 투수들의 공을 친 게 아니라, 그들의 자존감을 앗아갔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스타젤은 1976년 타율 0.257 20홈런 65타점 OPS 0.797로 최악의 부진을 겪습니다. 많은 전문가는 스타젤의 나이와 결부시켜 '그의 전성기는 끝났다'라고 말했지만, 부진의 원인은 따로 있었죠. 사랑하는 아내 델로레스가 뇌동맥류 질환으로 6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던 겁니다. 훗날 스타젤은 "1976시즌은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제 눈에는 온갖 장비를 몸에 두른 아내만 보였고, 도저히 경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이듬해인 1977년 다행히도 그의 아내는 건강을 회복했지만, 스타젤은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벤치 클리어링 과정에서 팔꿈치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며 63경기에서 타율 0.274 13홈런 35타점 OPS 0.931을 기록하는 데 그쳤습니다. 그러나 1978년 부상에서 돌아온 스타젤은 40경기에 결장했음에도 타율 0.295 28홈런 97타점 OPS 0.949으로 재기에 성공하면서 내셔널리그 올해의 컴백 플레이어상을 수상했습니다.

 


피츠버그의 별

윌리 스타젤 Ⓒ MLB.com

 

스타젤은 선수 생활 후반에 '팝스(Pops, 아빠)'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이는 시끌벅적하고 다양한 인종으로 이루어진 피츠버그 클럽 하우스의 리더이자, 정신적인 지주인 그에게 딱 맞는 애칭이었습니다. 그는 1978시즌부터 팀 동료들이 좋은 투구, 중요한 안타, 훌륭한 수비를 선보일 때마다 손수 만든 노란색 별을 나눠주곤 했는데요. 선수들은 피츠버그의 검은색 모자에 '스타젤의 별(Stargell's Star)'을 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피츠버그의 2루수 필 가너는 "제 배트, 글러브, 유니폼을 훔쳐 가는 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제 별은 가져가지 말아 주세요. 저는 그것을 얻을 자격이 있거든요"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외야수 빌 로빈슨은 "스타젤은 우리의 버팀목이었습니다. 우리가 야구에서든, 개인적으로든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는 그 짐을 함께 짊어졌습니다"라고 말했죠. 한편, 스티브 블래스가 갑작스러운 제구 난조를 겪을 때도 스타젤은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훗날 원인 불명의 이유로 발생한 갑작스러운 제구 난조를 가리키는 용어인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Steve Blass Syndrome)'은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는데요. 블래스는 "연습 경기에서 제가 던질 차례가 되면, 항상 그가 타석에 서 있었어요. 헬멧도 쓰지 않고 말이죠. 마치 '어디를 맞히건 상관없어. 우리 관계는 그보다 더 강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스타젤만큼 저를 든든하게 지켜준 사람은 없었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스타젤은 1979년 타율 0.281 32홈런 82타점 OPS 0.904로 피츠버그의 지구 1위를 견인하며 39세의 나이로 MVP에 선정됐습니다. 이어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신시내티를 상대로 타율 0.455 2홈런 6타점 OPS 1.753, 월드시리즈에선 볼티모어를 상대로 타율 0.400 3홈런 7타점 OPS 1.208을 기록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죠. 그러면서 그는 한 해 동안 정규 시즌, 챔피언십시리즈, 월드시리즈에서 모두 MVP를 차지한 역사상 유일한 선수가 됐습니다.

 


은퇴 후의 삶

윌리 스타젤 Ⓒ MLB.com

 

1979년 마지막 불꽃을 태운 스타젤은 이후 현역으로 세 시즌을 더 뛰었지만 다시는 정기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무릎 부상으로 고통받던 그는 결국 1982년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했고, 피츠버그는 1982년 9월 6일 그의 등번호 8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리고 1988년 첫 번째 투표에서 82.4%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누렸죠. 하지만 스타젤은 은퇴 후 여러모로 힘겨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스타젤은 1984년 아내 델로레스와 18년간의 결혼 생활을 마치고 헤어졌는데요. 이듬해인 1985년에는 마약 복용이 적발된 전 팀 동료 데일 베라가 스타젤이 자신에게 암페타민을 제공했다고 허위자백을 했습니다. 사무국의 조사 결과 스타젤의 무죄가 밝혀졌지만, 피츠버그 구단주는 모든 코치진을 해고했는데, 그중에는 타격코치로 첫해를 마친 스타젤도 있었습니다. 이후 스타젤은 애틀랜타의 코치로 거의 10년을 보냅니다.

 

1997년 피츠버그의 새 구단주인 케빈 맥클래치가 직접 연락해 그를 특별 고문으로 맞이하면서, 스타젤은 친정팀과의 오랜 갈등을 끝내고 피츠버그에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이때쯤 스타젤의 건강은 꾸준히 악화되고 있었는데요. 스타젤은 2001년 4월 9일, 만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피츠버그의 새 홈구장인 PNC 파크에서 첫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죠. 지금도 PNC 파크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PNC 파크 앞에 세워진 윌리 스타젤의 동상 Ⓒ ML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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