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 베이브 루스', 지미 폭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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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폭스 Ⓒ MLB.com
야구에서는 좌타자가 우타자보다 유리합니다. 먼저 좌타자는 타석에서 우타자보다 1m 이상 1루 베이스에 가깝습니다. 흔히 야구 경기에서 한 걸음 차이로 아웃과 세이프가 갈리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무시하지 못할 장점입니다. 또한, 우완 투수가 좌완 투수보다 훨씬 많다는 점도 좌타자에게 유리한 요소로 작용하는데요. 타자들은 투구 궤적과 시야 등으로 인해 반대손 투수에게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타이 콥, 베이브 루스, 테드 윌리엄스 등 한 시대를 대표하는 타자들은 대부분 좌타자였습니다. 수준급 좌투수가 드물고 수비 시프트가 발전하지 않은 과거에는 이런 경향이 더 두드러졌죠. 하지만 지미 폭스는 예외였는데요. 그는 1932년 58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2017년 스탠튼이 깨기 전까지 금지약물 선수를 제외하면 로저 매리스(61), 베이브 루스(60, 59)에 이어 역대 공동 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습니다.
한편, 폭스는 통산 장타율(0.609)에서도 역대 4위에 올라있는데, 그보다 높은 장타율을 기록한 3명(베이브 루스, 테드 윌리엄스, 루 게릭)은 모두 좌타자였습니다. 심지어 역대 5위 배리 본즈(0.607)도 좌타자였죠. 그야말로 우타자 중에선 독보적인 장타력을 지닌 타자였던 셈입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괴수(The Beast)'였는데요. 아직까지도 많은 현지 전문가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우타 거포로 폭스를 꼽습니다.
메릴랜드의 강인한 소년

지미 폭스 Ⓒ MLB.com
지미 폭스의 본명은 '제임스 에모리 폭스(James Emory Foxx)'로, 1907년 10월 22일 미국 메릴랜드주의 시골 마을인 서들러스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델 폭스는 비교적 성공한 소작농이었고, 지역 야구팀에서 거포 외야수로 활약했습니다. 아버지의 야구 사랑은 아들에게로 이어졌는데요. 폭스는 매일 농사를 지은 후 아버지(델)와 캐치볼을 했고 자연스럽게 야구라는 스포츠와 사랑에 빠지게 됐습니다.
폭스는 타고난 운동선수였는데요. 5피트 11인치(180cm)로 운동선수로서 큰 키는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도와 농장 일을 하면서 근육질의 체격을 갖춘 그는 공부로도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야구뿐만 아니라 육상, 미식축구, 농구, 배구 등 모든 스포츠 종목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실제로 폭스는 고교 시절 100m와 200m 달리기에서 메릴랜드주 기록을 세우기도 했었죠.
폭스는 서들러스빌 고교에 재학 중이던 1924년 메릴랜드 지역 출신 전직 메이저리거이자 마이너리그 이스턴 파머스의 감독이었던 프랭크 '홈런' 베이커의 눈에 띕니다. 여기에는 전설 하나가 전해지는데요. 길을 잃은 베이커가 밭을 갈고 있던 폭스에게 가까운 마을이 어디냐고 묻자 폭스가 쟁기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며 방향을 가리켰고, 그 괴력에 놀란 베이커가 폭스를 영입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거짓일 가능성이 큽니다. '세이버매트릭스의 대부' 빌 제임스가 지적했듯이 이미 메릴랜드주에서 폭스는 알려질 만큼 알려진 선수였기 때문이죠. 이스턴 파머스와 계약한 폭스는 투수나 3루수를 하고 싶었지만, 팀에 포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포수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이적료 2,000달러를 받고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로 이적하는데요.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만 16세였습니다.
메이저리그를 침공한 괴수(The Beast)

지미 폭스 Ⓒ MLB.com
폭스는 1925년 5월 1일 메이저리그 데뷔전에서 워싱턴 세네터스의 베테랑 좌완 빈 그레그를 상대로 커리어 첫 안타를 때려냅니다. 하지만 애슬레틱스의 전설적인 감독 코니 맥은 더 많은 출전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폭스를 구단 산하 마이너리그 팀으로 내려보냈습니다. 이윽고 9월에 메이저리그로 복귀한 폭스는 첫 10경기에서 타율 0.667이란 좋은 성적으로 데뷔 시즌을 마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6년에도 26경기에서 타율 0.313을 기록했습니다.
폭스는 1927년 당시로선 꽤 큰 금액인 3,000달러에 연봉 계약을 맺었지만, 애슬레틱스의 주전 포수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미키 코크런이었기에 여전히 백업 역할에 머무르며 61경기 출전에 그칩니다. 그러나 이 시즌은 그가 대부분의 경기를 1루수로 나섰다는 점에서 그에게 중요한 분기점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렇게 제한된 출전 시간에도 불구하고 폭스는 타율 0.323 3홈런 20타점 OPS 0.908을 기록하며 코치진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습니다.
1928년 만 20세의 폭스는 3루수로 61경기, 1루수로 30경기, 포수로 20경기에 나서서 타율 0.328 13홈런 79타점 OPS 0.964를 기록하며 떠오르는 스타가 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29년 주전 1루수 자리를 차지한 폭스는 타율 0.354 33홈런 118타점 OPS 1.088로 전성기의 시작을 알립니다. 소속팀 애슬레틱스 역시 104승으로 리그 1위에 오른 후 월드시리즈에서 컵스를 4승 1패로 꺾고 우승을 차지합니다.
1930년은 폭스와 애슬레틱스가 많은 것을 얻은 한 해였습니다. 폭스는 타율 0.335 37홈런 156타점 OPS 1.066을 기록했고, 애슬레틱스는 정규 시즌 양키스를 제치고 아메리칸리그 1위를 차지한 후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4승 2패로 꺾고 월드시리즈 2연패를 달성하는데요. 폭스를 좋아하는 야구 팬들은 그에게 '더블 엑스(Double X)', '괴수(The Beast)', '메릴랜드의 강인한 소년' 등 다양한 별명을 지어줬습니다.
단일시즌 우타자 홈런 신기록을 세우다

지미 폭스 Ⓒ MLB.com
1931년 폭스는 심각한 무릎 부상에 더해 훗날 그를 괴롭히게 될 부비동(코 주위의 얼굴 뼛속에 있는 빈 공간) 문제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처음으로 3할 타율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타율 0.291 30홈런 120타점 OPS 0.947으로 여전히 뛰어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애슬레틱스도 107승 45패(0.704)로 리그 1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하며 월드시리즈 3연패에 실패합니다.
이후 애슬레틱스는 40년 동안 가을야구 무대를 밟지 못하는 암흑기를 맞이했지만, 폭스는 최전성기를 맞이합니다. 폭스는 1932년 타율 0.364 58홈런 169타점 OPS 1.218로 홈런, 타점 부문 1위에 오르면서 MVP를 차지하는데요. 홈런 58개는 당시 기준으로 베이브 루스의 1927년 60홈런, 1921년 59홈런에 이어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죠. 특히 폭스는 7월 말까지 41홈런을 때려내며 팬들을 설레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홈런왕의 대명사' 루스보다 한 달 이상 빠른 페이스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8월에 엄지와 손목을 다치면서 급격하게 페이스가 하락했고 결국 58홈런으로 시즌을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폭스가 루스보다 어려운 조건에서 뛰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1930년대 들어 아메리칸리그의 많은 구단은 홈구장에 스크린을 설치했습니다. 실제로 폭스는 이해 스크린 때문에 잃어버린 홈런이 세인트루이스에서만 6개에 달했다고 전해집니다.
1932시즌 종료 후 대공황으로 인해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진 구단주 겸 감독 코니 맥은 애슬레틱스의 핵심 선수들을 하나둘씩 떠나보내야만 했습니다. 알 시몬스가 가장 먼저 팀을 떠났고, 레프티 그로브와 미키 코크런 등이 그 뒤를 이었죠. 하지만 폭스는 마지막까지 팀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1933년 타율 0.356 48홈런 163타점 OPS 1.153으로 트리플크라운을 차지하면서 2년 연속 MVP에 선정됩니다.
레드삭스로 트레이드되다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지미 폭스(좌)와 바비 도어(우) Ⓒ MLB.com
이후에도 폭스는 1934년 타율 0.334 44홈런 130타점 OPS 1.102, 1935년 타율 0.346 36홈런 115타점 OPS 1.096으로 뛰어난 성적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1935시즌 종료 후 오랫동안 소문으로만 돌았던 폭스의 트레이드가 마침내 성사됐는데요. 보스턴 레드삭스가 이적료 15만 달러를 주고 애슬레틱스로부터 폭스와 투수 조니 마컴을 영입한 것이죠. 폭스도 연봉이 7,000달러 인상된 이 트레이드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폭스는 보스턴으로 이적한 첫해인 1936년 타율 0.338 41홈런 143타점 OPS 1.071을 기록한 것을 시작으로 1940년까지 5시즌 동안 리그 최정상급 타자로 군림했는데요. 특히 1938년에는 타율 0.349 50홈런 175타점 OPS 1.166으로 타율, 타점 부문 1위를 차지하면서 개인 통산 3번째 MVP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39년 레드삭스에는 테드 윌리엄스라는 또 한 명의 레전드가 입단했습니다.
이해 레드삭스는 우타자인 폭스와 좌타자인 윌리엄스가 강력한 좌/우 듀오를 형성하면서 최종적으론 2위에 그쳤지만 시즌 끝까지 양키스와 우승 경쟁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요. 폭스는 타율 0.360 35홈런 105타점 OPS 1.158로 개인 통산 4번째이자, 마지막 홈런왕을 차지했습니다. 만 20세의 겁 없는 신인 윌리엄스도 타율 0.327 31홈런 145타점 OPS 1.045로 데뷔 첫해부터 타점왕에 오릅니다.
신인 윌리엄스에게 베테랑 폭스는 멘토 이상의 존재였다고 전해지는데요. 두 전설적인 타자의 우정은 폭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다만 두 선수가 함께 활약한 건 1939년부터 1941년까지 단 3시즌에 불과했습니다. 폭스는 1940년 타율 0.297 36홈런 119타점 OPS 0.993으로 아쉽게 3할 타율을 놓쳤지만, 12년 연속 30홈런+100타점 기록을 이어가며 여전히 건재한 기량을 과시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기량 하락

지미 폭스(좌)와 테드 윌리엄스(우) Ⓒ MLB.com
1941년 만 33세의 폭스는 타율 0.300 19홈런 105타점 OPS 0.917으로 심각한 장타력 감소를 겪었습니다. 그의 보스턴 생활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죠. 보스턴 시절 그는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였는데요. 선수 생활 초기에는 술을 많이 마신 적이 없었지만, 1935년 시범경기에서 마이너리그 투수의 공에 이마를 맞은 후 부비동 문제로 인해 극심한 통증을 느끼면서 알코올에 의존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술 문제와는 별개로 폭스는 폭력적인 행동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온화한 성격으로 유명했고 동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죠. 일부는 폭스의 커리어가 음주로 인해 단축됐을 것이라고 단정하지만, 그보단 부비동 문제로 인한 만성적인 통증과 시력 저하가 더 큰 타격을 입혔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젊은 시절부터 여러 큰 부상을 참고 경기를 뛴 것도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폭스는 1942시즌 중반 컵스로 트레이드된 후 타율 0.205를 기록했고, 시즌이 끝난 뒤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1년 후인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자원입대했지만 비강염으로 인해 거부당하자, 컵스의 선수 겸 코치로 15경기에 출전했습니다. 이후 1945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89경기에 출전해 타율 0.268 7홈런 38타점 OPS 0.756을 기록한 것을 마지막으로 커리어를 마무리했습니다.

초라했던 말년

영화 그들만의 리그(A League of Their Own, 1992) Ⓒ MLB.com
폭스는 첫 번째 부인과의 이혼과 투자 실패로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은퇴 후 레드삭스의 라디오 해설자, 마이너리그 팀들의 감독과 코치, 운송 회사와 유통 업체에서 일하는 등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했는데요.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활동은 1952년 여성 프로야구 팀인 포트웨인 데이지스의 감독을 맡았던 겁니다. 이는 영화 그들만의 리그(A League of Their Own, 1992)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죠.
이때 영화 속 감독인 지미 듀건(톰 행크스 분)이 처음에는 선수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매일 술만 마신 것과는 달리(물론 나중에는 선수들의 열정에 감동해 술을 끊고 열과 성을 다해 이들을 지도한다), 폭스는 처음부터 선수들을 존중했습니다. 폭스의 지도를 받았던 데이지스의 선수들은 "그는 화를 낸 적도 없었고 폭력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친절한 사람이었고 모두에게 신사다웠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나 장거리 버스 이동은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건강에 악영향을 끼쳤고, 그는 데이지스의 감독을 1년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몇 년간 힘든 시간을 보낸 폭스는 결국 파산하고 말았죠. 그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고, 전 동료이자 단장인 조 크로닌의 제안을 받아들여 레드삭스 산하 트리플 A 구단인 미니애폴리스 밀러스의 타격코치를 맡았습니다.
폭스는 선수들에게 존경을 받았지만, 두 번이나 병원에 입원하는 등 건강 문제로 1년 만에 해고됩니다. 이는 그의 마지막 야구 관련 직업이기도 했는데요. 1966년 금슬이 좋았던 두 번째 아내와 사별하면서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입은 폭스는 1년 뒤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97년 10월 그의 90번째 생일을 기념해 고향인 서들러스빌엔 '메릴랜드 출신 강인한 소년'의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지미 폭스 Ⓒ MLB 명예의 전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