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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연재]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 : <20> 부정투구의 대명사, 게일로드 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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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게일로드 페리 © MLB.com

 

게일로드 페리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논쟁의 여지가 다분한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기록적인 면에서 그는 꾸준함의 상징과도 같은 투수였습니다. 페리는 13년 연속 15승 이상, 15년 연속 200이닝 이상, 14년 연속 평균자책점 3.40 이하를 달성했는데요. 이에 근접한 꾸준함을 보여준 투수는 사이 영과 그렉 매덕스뿐입니다. 이런 꾸준함을 바탕으로 페리는 역사상 8명뿐인 300승+3500탈삼진을 달성했고, 40세의 나이로 최고령 사이 영 상 수상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도덕적인 면에서 그는 '부정투구'의 상징과도 같은 투수였습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1920년 공에 타액이나 바셀린과 같은 이물질을 발라 던지는 스핏볼(Spitball)을 금지시켰습니다. 하지만 페리는 대놓고 스핏볼을 던졌(거나 던지는 척했)고, 이 때문에 끊임없는 감시를 받았으나 한 번도 이물질이 적발된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논란으로 인해 페리는 뛰어난 기록에도 불구하고 투표 자격 3년 차에서야 77.2%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형과 함께 고교 리그를 지배하다

짐 페리(왼쪽)과 게일로드 페리(오른쪽) © MLB.com

 

페리의 풀네임은 '게일로드 잭슨 페리(Gaylord Jackson Perry)'로, 1938년 9월 15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윌리엄 스턴에서 에반과 루비 페리 부부의 세 자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에반 페리는 젊은 시절 지역 내에서 야구와 미식축구를 넘나들며 활약한 유명한 운동선수였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마이너리그 계약을 거절하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어린 시절 게일로드는 형 짐, 여동생 캐롤린과 함께 아버지의 농장 일을 도우며 자랐습니다.

 

페리 형제는 점심시간마다 아버지와 함께 캐치볼을 하면서 야구를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운동 신경과 조기 교육 덕분에 짐 & 게일로드 형제는 훗날 나란히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200승 이상을 달성하는 대투수로 성장했습니다. 페리는 윌리엄 스턴 고교 시절 야구뿐만 아니라 미식축구와 농구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는데요. 특히 미식축구에선 2학년과 3학년 때 오펜스 엔드와 디펜스 엔드로 올-스테이트(All-State) 팀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페리는 농구에서도 경기당 평균 30득점 2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을 94승(8패)로 이끌었는데요. 하지만 페리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는 야구였습니다. 그는 부상으로 야구에 차질이 생기지 않기 위해 고교 마지막 해엔 미식축구를 포기했고, 농구 선수로서 받은 여러 건의 대학 장학금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페리는 신입생 시절 3루수를 맡았고, 두 살 많은 형(짐)이 에이스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1학년이 끝나갈 무렵부터는 형과 번갈아서 투수로 출전했습니다.

 

페리 형제의 활약에 힘입어 윌리엄 스턴 고교는 노스캐롤라이나주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차지했는데, 특히 1955년 결승전(3전 2선승제)에선 형제가 나란히 2경기 연속 무실점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고교 시절 38경기에서 33승을 기록한 페리는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페리는 형(짐)이 마이너리그에서 뛰고 있는 클리블랜드와 계약을 맺길 내심 바랐는데요. 하지만 클리블랜드는 치열한 영입 경쟁에서 일찌감치 탈락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와 계약을 맺다
게일로드 페리 © MLB.com

 

1958년 고교 졸업 후 페리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규모인 계약금 9만 달러를 제시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계약 첫해 페리를 노던 리그(클래스C)의 세인트 클라우드로 배정했고, 그곳에서 페리는 9승 5패 128이닝 평균자책점 2.29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59년 텍사스 리그(더블 A)의 코퍼스 크리스티로 승격된 페리는 10승 11패 191이닝 평균자책점 4.05로 실망스러운 성적을 기록했는데요.

 

​페리는 1960년 리오그란데 벨리로 이름을 바꾼 샌프란시스코 산하 텍사스 리그(더블 A) 팀에서 9승 13패 188이닝 평균자책점 2.82로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961년 퍼시픽코스트 리그(트리플 A)의 타코마로 승격돼서도 16승 10패 219이닝 평균자책점 2.55로 또 한 번의 훌륭한 시즌을 보낸 페리는 시즌 종료 후 메이저리그 40인 로스터에 이름을 올렸고, 1962년 4월 14일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릅니다.

 

페리는 데뷔전에서 2.2이닝 4실점으로 무너졌지만, 두 번째 경기에선 5이닝 2실점을 기록했고, 세 번째 경기에선 9이닝 1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기대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6경기에서 1패 평균자책점 8.76으로 처참한 성적을 거둔 후 트리플 A로 강등됩니다. 타코마로 돌아간 페리는 10승 7패 156이닝 평균자책점 2.48로 준수한 활약을 펼쳤고, 이를 바탕으로 메이저리그에 다시 콜업됐지만 3승 1패 평균자책점 5.23으로 시즌을 마칩니다.

 

이듬해인 1963년에도 페리는 31경기(4선발)에서 1승 6패 평균자책점 4.03을 기록하는데 그쳤습니다. 그러자 페리는 '금단의 구종'에 손을 댔습니다. 자서전 <나와 스핏볼>에 따르면 페리는 1964년 팀 선배 밥 쇼로부터 스핏볼을 배웠는데요. 스핏볼은 공에 타액이나 바셀린과 같은 이물질을 발라 던지는 구종을 말하는데, 이렇게 공을 던지면 공이 투수의 손가락에서 미끄러지기 때문에 회전이 덜 걸리면서 불규칙한 움직임을 만들어냅니다.

 


악마의 구종에 손을 대다
게일로드 페리 © MLB.com

 

축구로 치면 '무회전 슛', 야구에서는 '너클볼'과 유사합니다. 문제는 "가르치는 데는 10분, 배우는 데는 평생(Ten minutes to teach but a lifetime to learn)"이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로 배우기 힘든 너클볼과는 달리, 스핏볼은 이물질을 바르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비슷한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너클볼은 회전을 억제하기 위해 손가락 관절로 밀어 던지기 때문에 구속이 느리다는 약점이 있지만, 스핏볼은 그런 것마저도 없었죠.

 

이런 의미에서 스핏볼은 '너클볼의 움직임을 가진 패스트볼'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에 따라 메이저리그는 1920년 스핏볼을 금지시켰습니다. 물론 금지 조치 이후에도 적지 않은 투수들이 은근슬쩍 스핏볼을 던졌고, 1960년대에는 오히려 금지 이전보다 스핏볼을 던지는 투수들이 더 많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1963시즌 종료 후 밀워키 브레이브스와 3:4 트레이드를 통해 자이언츠로 이적한 베테랑 투수 밥 쇼(통산 108승)도 그중 한 명이었죠.

 

페리는 1964년 스프링 캠프에서 투수 코치 래리 잰슨과 함께 훈련하면서 기존 구종인 패스트볼과 커브의 구위를 강화했고, 새로운 구종인 고속 슬라이더를 장착했습니다. 한편, 비밀리에 쇼의 지도를 받으며 스핏볼을 던지는 법을 배웠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페리는 연습 투구와 시범 경기에서 틈틈이 스핏볼을 구사하며 던지는 요령을 익혔습니다. 자서전에 따르면 페리가 정규 시즌에서 처음으로 스핏볼을 던진 것은 1964년 5월 31일이었습니다.

 

그날 뉴욕 메츠와 더블헤더 2차전은 연장 23회까지 가는 바람에 경기 시간이 7시간 23분이나 걸렸는데요. 해당 경기에서 6-6으로 맞선 13회 말 구원 투수로 등판한 페리는 10이닝 동안 7피안타 1볼넷 9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하며 앨빈 다크 감독의 신뢰를 얻습니다. 그리고 페리는 이 해 44경기(19선발) 12승 11패 2세이브 206.1이닝 155탈삼진 평균자책점 2.75를 기록하면서 메이저리그 데뷔 3년 만에 처음으로 성공적인 시즌을 보냅니다.

 


마리샬과 함께 원투펀치로 떠오르다
게일로드 페리 © MLB.com

전년도 활약으로 기대가 높아졌지만, 1965년 페리는 47경기(26선발) 8승 12패 195.2이닝 170탈삼진 평균자책점 4.19으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또한 심판과 언쟁을 벌이고, 동료의 수비 실수에 대해 불평하고, 안타를 실책으로 바꾸려고 기자실에 전화를 거는 등 형편없는 태도로 문제를 일으켰죠. 새 감독인 허먼 프랭크스에게 경고를 받은 후 페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했지만, 그는 이후로도 선수 생활 내내 수비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1966년 27세의 페리는 자이언츠 투수진에서 명확한 보직이 없었는데요. 하지만 그는 스프링 캠프에 3주 먼저 참가해 구슬땀을 흘렸고, 시범경기에서 5승 무패로 전례 없는 활약을 펼치며 달라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한 페리는 36경기(35선발)에서 21승 8패 255.2이닝 201탈삼진 평균자책점 2.99을 기록하며 후안 마리샬과 함께 다저스의 코팩스 & 드라이스데일 콤비에 필적하는 '원투펀치'로 떠오르게 됩니다.

 

부정투구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페리는 그해 밀워키 브레이브스의 감독 바비 브래건이 불만을 제기한 것을 시작으로 선수 생활 내내 심판의 검열을 받았고, 상대 팀의 면밀한 감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16년 후인 1982년 8월 23일 레드삭스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퇴장당하기 전까지 한 번도 퇴장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를 퇴장시킨 데이브 필립스 심판은 몸수색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페리의 퇴장 사유는 '이물질 없이 이런 궤적의 투구는 불가능하다'라는 거였죠. 즉, 페리는 선수 생활 22년간 한 번도 확실하게 이물질 사용이 적발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는 '완전 범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걸까요. 페리의 자서전인 <나와 스핏볼>에서 고백한 것처럼 그가 팀 선배인 쇼로부터 스핏볼을 배웠고, 이를 구사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부정 투구(스핏볼)를 던진 적은 별로 없었다고 주장했는데요.

 

 

심리전의 달인
게일로드 페리 © MLB.com

 

페리가 부정 투구의 대명사가 된 것은 끊임없이 모자와 벨트 등을 만져대는 등 의심할 만한 행위를 일부러 티 나게 자행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973년에는 페리가 그날따라 계속 머리를 만져대자, 양키스의 랄프 후크 감독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마운드로 돌진하며 모자를 벗겨서 집어던지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당연하게도 드러난 것은 없었죠. 정말로 부정 투구를 하는 상황이라면 의심할 만한 행동을 할 리가 없으니까요.

 

페리가 이런 행동을 한 이유는 타자들을 혼란시켜 심리적인 우위를 가져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해 페리는 실제 부정 투구는 다른 투수들처럼 은밀하게 사용했고, 오히려 부정 투구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 의심할 만한 행위를 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요. 타자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져대는 페리의 행위에 치를 떨면서도 막상 몸수색을 하면 부정 투구에 대한 물증이 없는 상황에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때마다 페리는 교활한 미소를 지었죠.

 

1966년을 기점으로 정상급 투수로 올라선 페리는 이후에도 꾸준한 활약을 펼칩니다. 그는 1967년 15승 17패 293이닝 230탈삼진 ERA 2.61, 1968년 16승 15패 290.2이닝 173탈삼진 ERA 2.45를 기록했고, 1969년에는 19승 14패 325.1이닝 233탈삼진 ERA 2.49으로 이닝 부문 NL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 23승 13패 328.2이닝 214탈삼진 ERA 3.20으로 다승·이닝 부문 1위를 차지하며 밥 깁슨에 이어 사이 영 상 투표 2위에 오릅니다.

 

페리는 1971년에도 16승 12패 280이닝 158탈삼진 ERA 2.76이란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소속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도 NL 서부 지구 1위를 차지하며 9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는데요. 그는 피츠버그와 NLCS 1차전에서 9이닝 4실점(3자책) 완투승을 거뒀지만, 사흘 휴식 후 등판한 4차전에서 5.2이닝 7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됐고, 샌프란시스코도 1승 3패로 시리즈에서 패했습니다. 이는 그의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가을야구이기도 했죠.

 


클리블랜드 이적 후 사이영상을 수상하다
게일로드 페리 © MLB.com

 

1971시즌 종료 후 샌프란시스코는 페리를 내야수 프랭크 더피와 함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현 가디언스)로 트레이드합니다. 트레이드 대가는 클리블랜드의 에이스 샘 맥도웰(통산 141승)이었는데요. 대부분의 전문가는 샌프란시스코가 트레이드의 승자라고 평가했습니다. 맥도웰은 페리보다 4살이나 어렸고, 탈삼진왕을 5차례나 차지한 좌완 파이어볼러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페리는 전문가의 평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이듬해 맹활약을 펼칩니다.

 

그는 클리블랜드 이적 첫해인 1972년 24승 16패 342.2이닝 234탈삼진 ERA 1.92로 다승·완투(29) 부문 AL 1위에 오르며 커리어 첫 사이 영 상을 수상합니다. 이는 2007년 CC 사바시아가 수상하기 전까지 클리블랜드 역사상 유일한 사이영상 수상 기록이었죠. 반면, 샌프란시스코로 이적한 맥도웰은 1972년 10승 8패 164.1이닝 122탈삼진 ERA 4.33에 그쳤고, 1973시즌 중반 양키스로 트레이드된 후 1975년 32세라는 이른 나이에 은퇴했습니다.

 

이후에도 페리는 약 3년 반 동안 클리블랜드의 에이스로 활약했는데요. 특히 1974년에는 선발 15연승 포함 21승 13패 322.1이닝 216탈삼진 ERA 2.51으로 2008년 클리프 리(22승) 전까지 클리블랜드의 마지막 20승 투수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여기에 더해 시즌 시작 전 클리블랜드가 영입한 친형 짐 페리는 1974년 17승 12패 252이닝 71탈삼진 ERA 2.96을 기록하면서 '페리 형제'는 팀의 77승 가운데 거의 절반(38승)에 가까운 승수를 합작합니다.

 

하지만 페리는 1974시즌 중반 클리블랜드에 합류한 프랭크 로빈슨과 불화를 겪습니다. 로빈슨은 선수로서는 모범적이고 유쾌한 리더였지만, 감독으로선 포용력과 참을성이 부족했습니다. 1975시즌을 앞두고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감독이 된 로빈슨은 평소 자신의 지론대로 선수들에게 신체 단련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요. 문제는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했다는 겁니다. 그의 고압적인 강제 훈련은 페리 형제 등 베테랑 선수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죠.

 


MLB 역사상 최초의 양대리그 사이영상
게일로드 페리 © MLB.com

 

페리는 1975년 6월까지 6승 9패 ERA 3.55를 기록한 후 텍사스 레인저스로 트레이드됩니다. 하지만 텍사스에서 12승 8패 ERA 3.03으로 반등에 성공하며 18승 17패 305.2이닝 233탈삼진 ERA 3.24이란 뛰어난 성적으로 1975시즌을 마칩니다. 이후 페리는 텍사스 소속으로 1976년 15승 14패 250.1이닝 143탈삼진 ERA 3.24를, 1976년 15승 12패 238이닝 177탈삼진 ERA 3.37을 기록한 후 1978시즌을 앞두고 이번엔 샌디에이고로 트레이드됩니다.

 

샌디에이고 이적 첫해인 1978년 39세의 페리는 21승 6패 260.2이닝 154탈삼진 ERA 2.73으로 다승·승률(0.778) 부문 2관왕을 차지하며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러면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양대 리그에서 모두 사이 영 상을 수상한 투수가 됐죠. 페리는 1979년에도 12승 11패 232.2이닝 140탈삼진 ERA 3.06을 기록했지만, 팀의 방향성을 놓고 수뇌부와 마찰을 일으키면서 자신을 트레이드하지 않으면 은퇴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샌디에이고는 몇 달간 페리를 설득했지만 여의치 않자, 그를 다시 영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텍사스로 페리를 보냅니다. 페리는 1980년 이적 후 8월까지 준수한 활약을 펼쳤지만, 텍사스에서도 팀 동료들과 마찰을 빚으면서 양키스로 트레이드됩니다. 페리는 1980시즌을 10승 13패 205.2이닝 135탈삼진 ERA 3.68로 마친 후 양키스로부터 방출됐고 이후 1981년 애틀랜타, 1982년 시애틀, 1983년 시애틀/캔자스시티를 차례로 거칩니다.

 

페리는 시애틀 소속이었던 1982년 5월 6일 양키스를 상대로 완투승을 거두며 통산 300승을 달성했고, 1983시즌을 마친 후 만 44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은퇴 시점을 기준으로 페리의 통산 314승은 역대 11위, 3534탈삼진은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죠. 페리는 투표 자격 3년 차인 1991년 77.2%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2005년 7월 23일 샌프란시스코는 그의 등번호(36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부정투구에 가려진 이면
게일로드 페리 © MLB.com

 

페리가 '꼼수'로만 연명하는 투수였다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는 강력한 싱커와 두 종류의 슬라이더 그리고 체인지업과 커브볼(+가끔씩 던지는 스핏볼)을 원하는 코스에 자유자재로 던진 역사상 최고의 이닝 이터 중 한 명이었습니다. 실제로 페리와 동시대에 부정 투구 혐의를 받은 사람은 100명도 넘었는데요. 하지만 그 가운데 페리와 비견될 업적을 남긴 투수는 '스커프 볼(Scuffball)의 달인' 돈 서튼(통산 324승) 정도입니다.

 

이를 근거로 미국 매체 <디 애슬레틱>은 2020년 페리를 가장 위대한 메이저리그 선수 100인에서 68위로 선정했습니다. 페리는 2022년 12월 1일 향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요. 전직 심판인 빌 할러는 "페리를 매의 눈으로 봤습니다. 그는 절대 공에 입을 대지도, 이물질을 바르지도 않았습니다. 글러브에서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페리가 어떤 선수인지 말씀드리자면, 그는 정말 대단한 투수이고, 훌륭한 승부사입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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