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브럴, 빌리 와그너를 이어받다
연재
탈삼진율(33.2%) 피안타율(.187) 역대 1위(800이닝 이상). WHIP(0.998) 역대 1위(500이닝 이상)인 빌리 와그너는 막차를 타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다.
9번째 투표에서 73.8%의 득표율로 헌액 기준인 75.0%를 넘지 못했지만, 마지막 기회였던 10번째 투표에서 82.5%를 얻었다.
기자 투표를 통해 명예의 전당에 오른 8명의 릴리버 중 선발 경력이 없고 멀티 이닝 마무리의 시대에 뛰지 않은 선수는 마리아노 리베라, 트레버 호프먼, 빌리 와그너 세 명뿐이다. 600세이브를 한 호프먼 조차 3수를 했을 정도로, 1이닝 마무리가 명전의 관문을 뚫기는 쉽지 않다.
무시무시한 강속구와 슬라이더(본인은 커브라고 주장)로 타자를 공격했던 와그너는 직설적인 언사로도 유명했다. 와그너는 배리 본즈와 신경전을 자주 벌였는데, 본즈가 "또 너냐. 이 번에는 쓴 맛을 보여주겠다"라고 하면, 와그너는 "나는 제프 켄트 말고는 아무도 두렵지 않아. 최고의 타자는 바로 켄트거든"이라며 하며 본즈의 신경을 박박 긁었다(켄트는 본즈의 팀 동료이자 본즈가 가장 싫어하는 선수였다).
역대 좌완 중 세이브 2위인 와그너는 원래 오른손잡이였다.
그는 5살 때 부모가 이혼한 후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꼬마 와그너는 미식축구를 대단히 좋아했는데, 할아버지는 공을 사줄 돈이 없었다.
7살 때 와그너는 모자로 만든 가짜 공을 가지고 옆집 친구와 미식축구를 하고 놀았다. 하지만 몸싸움을 하다가 오른 팔이 부러졌다. 팔에 깁스를 하고 있는 동안, 왼 팔로 공을 던지고 놀았는데, 어느새 왼 팔로 던지는 것이 더 편해졌다.
왼손 글러브가 없었던 그는, 오른손 글러브를 뒤집어서 사용했다. 12살 때 리틀 리그 입단 테스트 때도 왼손 글러브가 없어 오른손으로 던졌고, 이후 삼촌이 사준 싸구려 왼손 글러브를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사용했다. 와그너는 13살 때 삼촌의 양자로 입적됐다.
휴스턴의 마무리가 된 와그너는 어느날 경기가 끝난 후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와그너는 애틀랜타를 상대로 세이브에 성공한 후 주먹을 치켜들었는데, 이를 본 할아버지가 "상대 팀에게 예의를 지키라"며 혼을 낸 것이었다. 애틀랜타는 할아버지의 최애 구단이었다.
필리스와 메츠, 레드삭스를 거치면서 부상이 많았던 와그너는 2010년 38세 시즌에 애틀랜타에 입단했다. 그리고 자신과 판박이인 투수를 발견했다.
앨라배마주 출신인 킴브럴은 고등학교 시절 평범한 유격수에 불과했다. 애틀랜타의 33라운드 지명을 거절한 킴브럴은 집에서 가까운 커뮤니티칼리지에 입학했다. 킴브럴은 높은 순위의 지명을 받기 위해 투수로 전향했지만 여전히 프로 팀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85마일 투수가 주목 받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학년을 마친 킴브럴은 방학 때 삼촌들을 도와 공사 일을 하다가 석고보드를 발에 떨어뜨려 깁스를 하게 됐다. 붕대를 풀고 나서도 불편함이 가시지 않았던 킴브럴은 그 때부터 상체 위주의 피칭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구속이 5마일 올랐다.
어느날 코치는 미식축구 필드를 지나가다 킴브럴이 한쪽 골대에서 다른쪽 골대로 공을 던지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킴브럴을 제대로 키워보기로 마음먹었다. 피나는 웨이트를 통해 강력한 상체를 만들자, 킴브럴의 구속은 다시 5마일이 더 올랐다. 평균 95마일을 던지게 된 킴브럴은 2008년 애틀랜타의 3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킴브럴은 강속구와 너클커브를 가지고 마이너리그를 평정했다. 메이저리그에 올라오는데 걸린 시간은 23개월이었다.
킴브럴이 데뷔한 시즌은 와그너가 입단한 시즌이었다. 마무리인 와그너는 37세이브 ERA 1.43을 기록했고, 킴브럴은 21경기밖에 등판하지 않았지만 ERA 0.44를 기록했다. 9이닝당 삼진이 13.5개인 와그너와 17.4개인 킴브럴은 강력한 원투펀치였다. 단신 좌완 와그너(178cm)와 단신 우완 킴브럴(183cm)은 불펜에 나타난 코팩스 & 드라이스데일을 보는 것 같았다.
킴브럴은 와그너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자신감이 마무리의 또 다른 핵심 무기임을 확인했다. 팀의 승패가 걸린 상황에서 와그너가 두 가지 구종으로 타자를 어떻게 요리하는지를 생생히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와그너가 있기 때문에 마무리가 언제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시즌이 끝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킴브럴에 대해 "녀석(son)은 정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빠른 구속과 위력적인 슬라이더를 가지고 있어서 어떠한 타자도 쉽게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마무리에게 필요한 모든 자질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큰 업적을 만들어낼 겁니다"라고 했던 와그너가 시즌 후 은퇴를 선언한 것이었다.
여전히 추풍낙엽처럼 타자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은퇴할 시점이 전혀 아니었던 와그너는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어서라고 했지만, 믿고 맡길 투수가 있어서이기도 했다. 좌완 역대 최다 세이브 기록(존 프랑코 424세이브)에 두 개를 남겨둔 상황에서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킴브럴의 길을 열어줬다.
이듬해 킴브럴은 애틀랜타의 마무리가 됐고, 와그너는 자신의 판타지 팀에 킴브럴을 넣었다. 그러자 역사가 쓰여졌다.
2011년 킴브럴은 46개의 세이브로 시즌을 끝냈는데, 이는 토드 워렐의 내셔널리그 신인 기록(1986년 36세이브)과 네프탈리 펠리스의 메이저리그 신인 기록(2010년 40세이브)을 모두 경신한 것이었다. 127개의 삼진은 그 해 불펜투수 1위였고, 클리프 리를 제치고 그 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긴 38.1이닝 연속 무실점도 만들었다.
킴브럴은 2001년 푸홀스 이후 처음으로 만장일치 신인왕이 됐다. 불펜투수가 만장일치 신인왕이 된 건 역대 최초였다. 그렇게 킴브럴은, 와그너의 후계자가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