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연재] 이현우의 레전드 스토리 : <19> 공포의 4번 타자, 윌리 맥코비
연재

윌리 맥코비 © MLB.com
If you pitch to him he’ll ruin baseball. He’d hit 80 home runs. There’s no comparison between McCovey and anybody else in the league.
스파키 앤더슨(통산 2,194승 감독)
윌리 맥코비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협적인 좌타 거포 중 한 명이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스타입니다. 맥코비는 1959년 데뷔해 1980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 2588경기 2211안타 521홈런 1555타점 타율 0.270 출루율 0.374 OPS 0.889를 기록했고 신인왕, 올스타 6회, MVP 1회, 홈런왕 3회, 타점왕 1회를 차지했습니다. 521홈런은 은퇴할 때를 기준으로 베이브 루스에 이어 역대 좌타자 홈런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습니다.
맥코비는 무시무시한 타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했는데요. 샌프란시스코 감독 허먼 프랭크스는 "그보다 공을 더 세게 치는 선수는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고, 이런 파워는 상대에게 두려움을 안겨줬습니다. 승부욕의 화신인 밥 깁슨(통산 251승)조차도 "가장 무서운 타자"라고 불렀을 정도였죠. 실제로 맥코비는 1969년 고의사구만 45개를 얻어냈는데, 이는 배리 본즈(2002년)가 경신하기 전까지 역대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습니다.
전설적인 스카우트의 눈에 띄다

윌리 맥코비 © MLB.com
윌리 리 맥코비(Willie Lee McCovey)는 1938년 1월 10일, 미국 앨라배마주 모빌에서 프랭크와 에스더 맥코비 부부의 열 자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철도 노동자였던 아버지 프랭크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성실하게 일했고, 어머니 에스더는 다정하지만 엄격하게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1940-50년대 앨라배마주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이들이 성장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미국 남부에는 인종 차별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맥코비는 "아이들은 길모퉁이를 서성이며 갱단에 가담하거나, 스포츠에 뛰어들었습니다.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제 친구들은 스포츠에 뛰어들었으니까요"라고 회고했습니다. 맥코비는 야구, 농구, 미식축구에서 모두 재능을 드러냈는데요. 맥코비는 야구에선 1루수를 맡았고, 농구에선 센터였으며, 미식축구에선 엔드로 뛰었습니다. 그런 맥코비를 지켜보는 이가 있었습니다. 전 니그로리그 구단주이자 뉴욕 자이언츠의 스카우트 알렉스 폼페즈였죠.
1950년대 중반 자이언츠에는 놀라운 재능을 지닌 유망주들이 모여 있었는데요. 후안 마리샬, 게일로드 페리, 알루 삼형제, 짐 레이 하트 등이 대표적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전설적인 스카우트 폼페즈가 있었습니다. 폼페즈는 니그로리그 시절 인맥 덕분에 미국 전역에 정보원(birddog)을 두고 있었고, 그 중 한 명인 모빌의 구장 관리자 제시 토마스가 토마스가 추천한 맥코비를 지켜본 후 트라이아웃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한편, 맥코비는 1954년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고등학교를 1년 일찍 중퇴한 후 빵집에서 일하고 있었고, 연말 연휴 동안 형(와이엇)을 만나러 로스앤젤레스에 가 있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가 너무 마음에 든 맥코비는 그곳에 남아서 일할 생각이었죠. 하지만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맥코비는 곧바로 동부를 향합니다. 편지에는 폼페즈가 보낸 자이언츠의 트라이아웃 캠프 초청장과 플로리다주 멜버른행 버스 표가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이벌 올랜도 세페다와의 경쟁

윌리 맥코비(좌)와 올랜도 세페다(우) © MLB.com
이제 막 17세가 되었고 188cm에 71kg으로 마른 체형이었던 맥코비는 트라이아웃에서 특별히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지 못했지만, 폼페즈의 추천으로 자이언츠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해 자이언츠의 트라이아웃에 참여한 수십 명의 유망주 중에는 푸에르토리코에서 온 동갑내기 1루수 올랜도 세페다도 있었는데요. 훗날 나란히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맥코비와 세페다는 이후 약 10년간 자이언츠의 1루수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게 됩니다.
맥코비는 1955년 조지아주 리그(D 레벨)의 샌더스빌에서 프로에 데뷔해 타율 0.305 19홈런 113타점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6년 캐롤라이나 리그(B 레벨)의 버지니아주 댄빌에선 타율 0.310 29홈런 89타점을 기록한 후 1957년 더블 A 댈러스로 승격해 타율 0.281 11홈런 65타점을 기록합니다. 하지만 1958년 트리플 A 피닉스에서 타율 0.319 14홈런 89타점을 기록했음에도 맥코비는 메이저리그의 부름을 받지 못했는데요.
샌프란시스코에는 1958년 타율 0.312 25홈런 96타점 OPS 0.854로 신인왕을 차지한 1루수 세페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59년 맥코비가 트리플 A에서 7월까지 타율 0.372 29홈런 92타점으로 무력시위를 펼치자, 구단도 그를 콜업시키지 않을 수 없었죠. 1959년 7월 30일 빅리그에 데뷔한 맥코비는 타율 0.354 13홈런 38타점 OPS 1.085를 기록하며 단 52경기를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셔널리그(NL) 신인왕에 선정됩니다.
이때부터 샌프란시스코의 고민이 시작되는데요. 샌프란시스코는 나란히 신인왕을 수상한 만 22세의 젊은 동갑내기 1루수 두 명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선수 중 한 명을 트레이드하는 대신 두 선수 모두 유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두 선수가 공존하기 위해선 결국 한 명이 포지션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죠(지명타자는 1973년 아메리칸리그에 처음 도입된 제도로, 내셔널리그에 지명타자가 정식 도입된 것은 2022시즌부터 입니다).
좌익수로 포지션을 옮기다

윌리 맥코비 © MLB.com
먼저 포지션을 옮기는 대상이 된 선수는 세페다였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그의 운동 능력이 더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세페다는 맥코비가 데뷔한 1959년 3루수로 포지션 변경을 시도했지만, 4경기에서 실책 3개를 기록하자 좌익수로 옮겨 44경기를 소화했습니다. 그리고 1960년에도 좌익수로 시즌을 시작했죠. 하지만 세페다는 본 포지션인 1루수로 뛰길 원했고, 이로 인해 맥코비는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연평균 88경기 출전에 그쳤습니다.
훗날 세페다는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좌익수로 뛸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때 저는 21살이었고 예민했습니다. 친구들은 제게 1루수 자리를 요구하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건 제 자존심이자, 무지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습니다. 언제나 충실한 동료였던 맥코비는 그저 뛰고 싶었을 뿐입니다"라고 후회했는데요. 하지만 맥코비는 "왜 그가 포지션을 바꿔야 합니까?"라며 세페다를 옹호했습니다.
빌 리그니 감독은 "세페다의 주저함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운동능력이 더 뛰어났기 때문에 포지션을 옮기는 게 더 쉬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는 좌익수가 아니라 1루수입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수였습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나 라인업을 짜는 것과 중재하는 것은 감독의 역할이고, 따라서 리그니는 비판을 완전히 피해 갈 순 없습니다.
세페다는 1961년 타율 0.311 46홈런 142타점 OPS 0.970으로 홈런·타점 부문 1위에 올랐고, 이듬해 샌프란시스코는 세페다를 풀타임 1루수로 기용하고 맥코비를 외야수로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팀 선배인 윌리 메이스로부터 도움을 받았지만, 커다란 덩치(193cm 90kg)에 고질적인 무릎 부상을 달고 살았던 그에게 외야 수비는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요. 하지만 제한적인 출전 기회에서도 타율 0.293 20홈런 54타점 OPS 0.957을 기록합니다.
야구계에서 가장 강력한 타자

윌리 맥코비 © MLB.com
샌프란시스코는 1962년 윌리 메이스(타율 0.304 39홈런 141타점 OPS .999)와 올랜도 세페다(타율 0.306 35홈런 114타점 OPS 0.865) 쌍포와 둘을 뒷받침하는 맥코비의 활약을 앞세워 103승 62패(0.624)로 리그 1위를 차지하면서 8년 만에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습니다. 이는 맥코비의 커리어에서 유일한 월드시리즈이기도 했습니다. 맥코비는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 양키스의 랄프 테리를 상대로 홈런을 치면서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7차전 팀이 0-1으로 뒤진 9회 말 2사 2, 3루 찬스에서 타석에 들어선 맥코비는 테리를 상대로 강력한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를 때려냈는데요. 하지만 이를 2루수 바비 리처드슨이 낚아채면서 양키스의 승리로 시리즈가 끝났습니다. 26년 후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맥코비는 자신의 경력이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는지 묻는 질문에 "1962년 WS 7차전에서 리처드슨의 머리 위로 공을 날린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1962년 정규 시즌과 월드시리즈에서 활약을 통해 맥코비는 마침내 이듬해부터 선발 라인업에 고정적으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죠. 맥코비는 풀타임 첫해인 1963년 타율 0.280 44홈런 102타점 OPS 0.915로 홈런 부문 리그 1위에 오릅니다. 물론 익숙하지 않은 좌익수 자리에서 리그 최다인 실책 13개를 기록했지만, 세파다와는 달리 맥코비는 외야수로 출전하는 것에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맥코비는 선수 생활 초기 팀 선배인 윌리 메이스와 경기장 안팎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요. 메이스는 의외로 사생활을 철저하게 보호했고, 많은 사람과 친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맥코비만큼은 예외였죠. 메이스는 어디를 가든 맥코비를 데리고 다녔고, 그를 "야구계에서 가장 강력한 타자"라고 소개했습니다. 그와 함께 지내면서 맥코비는 메이스의 훌륭한 인성과 별명(The Say Hey Kid)에서 알 수 있는 특유의 낙천성을 이어받을 수 있었습니다.
1루수로 복귀 후 전성기를 맞이하다

윌리 맥코비 © MLB.com
드디어 스타덤에 오르나 싶었던 맥코비는 이듬해인 1964년 타율 0.220 18홈런 54타점 OPS 0.748로 부진을 겪습니다. 시즌 시작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정신적으로 힘들었고, 왼 발바닥에 원인 모를 통증으로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1965시즌을 앞두고 그의 신발에 넣을 특수 깔창이 제작됐고, 동갑내기 친구이자 기존 1루수인 세페다의 부상으로 1루수로 복귀하면서 통증을 줄일 수 있었던 맥코비는 멋지게 반등에 성공했습니다.
맥코비는 1965년 타율 0.276 39홈런 92타점 OPS 0.920으로 메이스에 이어 홈런 2위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1966년 세페다가 부상에서 복귀하면서 샌프란시스코는 두 동갑내기 스타 1루수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선택은 맥코비였죠. 샌프란시스코는 5월 8일, 세페다를 세인트루이스로 트레이드했습니다. 세페다는 1967년 타율 0.325 25홈런 111타점 OPS 0.923으로 MVP를 수상했지만 몇 년 후 무릎 부상으로 은퇴합니다.
반면, 맥코비는 이때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하는데요. 맥코비는 1966년 타율 0.295 36홈런 96타점 OPS 0.977을 기록하며 홈런 공동 4위와 OPS 부문 2위에 올랐고, 1967년에는 무릎 부상으로 135경기 출전에 그쳤음에도 타율 0.276 31홈런 91타점 OPS 0.913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투수의 해'라고 불린 1968년 타율 0.293 36홈런 105타점 OPS 0.923으로 홈런·타점·장타율 부문 1위에 오르면서 최고의 타자로 우뚝 섭니다.
맥코비의 커리어 최고의 시즌은 1969년이었는데요 맥코비는 1969년 타율 0.320 45홈런 126타점 OPS 1.108로 홈런·타점·OPS 부문 1위를 차지하면서 내셔널리그 MVP에 선정됩니다. 또한, 올스타전에서 홈런 두 방을 터뜨리며 올스타 MVP까지 거머쥐었습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이 해 맥코비는 고의사구 45개(볼넷 121개)로 당시 기준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세웠을 만큼 상대팀의 철저한 견제를 받으면서도 이와 같은 성적을 기록했다는 겁니다.
잦은 부상 그리고 이적

윌리 맥코비 © MLB.com
맥코비는 1970년에도 타율 0.289 39홈런 126타점 OPS 1.056으로 장타율·OPS 부문 리그 1위에 올랐습니다. 볼넷 137개(1위)와 고의사구 40개(1위)라는 집중 견제를 받으면서 세운 기록이었죠.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맥코비의 전성기는 1971년 마지막 시범경기에서 무릎 연골이 찢어지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맥코비는 수술을 받지 않고 시즌을 뛰는 선택을 내렸지만, 105경기에서 타율 0.277 18홈런 70타점 OPS 0.876을 기록하는 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는 1971년 부상 투혼을 발휘한 맥코비와 마지막 불꽃을 태운 메이스, 그리고 젊은 바비 본즈의 활약에 힘입어 NL 서부지구 1위를 차지하고 9년 만에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는데요. 맥코비는 정규 시즌 부진을 딛고 챔피언십시리즈(NLCS)에서 타율 0.429 2홈런 6타점 OPS 1.413으로 원 맨 쇼를 펼쳤으나, 샌프란시스코는 투수진이 무너지면서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1승 3패로 패했고 그렇게 그의 마지막 가을야구가 끝납니다.
맥코비는 1972년 시즌 4번째 경기에서 샌디에이고의 존 제터와 1루에서 충돌하면서 오른팔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 부상으로 맥코비는 거의 2개월 가까이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복귀한 후에도 고전을 면치 못하면서 타율 0.213 14홈런 35타점 OPS 0.719으로 시즌을 마쳤는데요. 맥코비가 부상자 명단에 있는 동안 샌프란시스코는 메이스를 메츠로 트레이드했고, 이는 고액 연봉을 받는 베테랑 선수를 정리하려는 노력의 시작이었습니다.
부상에서 회복한 맥코비는 1973년 타율 0.266 29홈런 75타점 OPS 0.966을 기록했고, 볼넷 105개(고의사구 25개)를 골라냈습니다. 하지만 시즌 종료 후 샌프란시스코는 맥코비를 샌디에이고로 트레이드합니다. 맥코비는 트레이드 소식을 듣고도 당황하지 않았는데요. 구단주 스톤햄이 트레이드 전에 미리 어느 팀으로 가고 싶은지 물었기 때문입니다. 맥코비는 서부 해안에 남기를 원했고, 샌디에이고의 날씨가 아픈 무릎에 훨씬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커리어 말년

윌리 맥코비 © MLB.com
트레이드 소식을 들은 샌디에이고 감독 존 맥나마라도 "이 팀에는 '진짜 스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틀림없는 '일류 선수'를 갖게 됐습니다"라며 만족감을 드러냈습니다. 맥코비는 샌디에이고로 이적 후 첫 2년간 준수한 활약을 펼쳤는데요. 맥코비는 1974년 타율 0.253 22홈런 63타점 OPS 0.922를 기록했고, 1975년에는 타율 0.252 23홈런 68타점 OPS 0.805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약팀인 샌디에이고의 성적을 혼자서 끌어올릴 수는 없었죠.
1976년 38세의 맥코비는 첫 71경기에서 타율 0.203에 그쳤고, 8월 30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로 트레이드된 후 타율 0.204 7홈런 36타점 OPS 0.619으로 시즌을 마칩니다. 다음 시즌 보장된 계약이 없었기에 맥코비의 선수 생활은 이대로 끝날 것처럼 보였는데요. 하지만 현역으로 남고 싶었던 맥코비는 고민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연락을 취했고, 샌프란시스코는 조건 없이 다음 해 스프링캠프에 그를 초대함으로써 레전드에 대한 예우를 갖췄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감독 조 알토벨리는 "그(맥코비)는 모든 것을 얻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고, 저는 그를 존경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홈 개막전에서 약 4만 명에 달하는 관중이 보낸 기립박수에 감동을 받은 맥코비는 눈물을 흘립니다. 절치부심한 맥코비는 샌프란시스코 복귀 첫해인 1977년 141경기에 출전해 타율 0.280 28홈런 86타점 OPS 0.867을 기록하면서 NL 올해의 컴백 플레이어 상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이후 맥코비는 샌프란시스코에서 3시즌을 더 뛰었는데요. 맥코비는 1978년 타율 0.228 12홈런 64타점 OPS 0.694를 기록했고 6월 30일 애틀랜타전에서 통산 500홈런을 달성했습니다. 1979년 타율 0.249 15홈런 57타점 OPS 0.720을 기록했고, 1980년 타율 0.204 1홈런 16타점 OPS 0.586을 기록한 후 42세의 나이로 화려했던 선수 생활의 막을 내렸습니다. 마지막 홈런(통산 521홈런)으로 그는 테드 윌리엄스와 함께 좌타자 역대 홈런 공동 2위에 올라섰습니다.

은퇴 후의 삶

맥코비 만과 맥코비의 동상 © MLB.com
은퇴 후에도 맥코비는 샌프란시스코와 굳건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맥코비는 스프링 트레이닝 인스트럭터, 단장 특별 보좌관, 수석 고문 등 구단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았는데요. 한편, 투표 자격이 주어진 첫해인 1986년 81.4%의 득표율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샌프란시스코는 그의 등번호 44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현재 홈구장인 오라클 파크의 가장 큰 특징은 우측 외야 담장 바깥쪽이 곧바로 바다에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샌프란시스코는 이곳에서 뛰었을 경우 많은 공을 바다에 빠뜨렸을 그를 기리기 위해 우측 외야 너머에 있는 만의 이름을 맥코비 만(McCovey Cove)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리고 만의 입구에 맥코비의 동상을 세웠죠. 동상 밑에는 1980년부터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한 선수에게 수여해 온 '윌리 맥 어워드(Willie Mac Award)' 수상자의 이름이 적혀있는데요. 모든 샌프란시스코 팬들에게 사랑받았던 맥코비는 2018년 10월 31일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